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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정빈 Dec 24. 2021

살기 위해 그 폐허를 노려보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드라이브 마이 카'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 카'의 러닝 타임은 180분이다. 영화 내에서 벌어진 사건의 총량이 많아 과도하게 시간을 들인 게 아니다. 사건이 모두 끝난 자리에서 시작된 고통을 응시하고, 그 아픔의 실체에 다가가려면 그만큼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했을 뿐이다. 영화는 시간을 신중히 쓴다. 3시간을 1시간 같이 느끼게 하는 눈요기는 없다. 오히려 상영 시간이 실제보다 더 길다는 실감을 준다. 그렇게 해야만 이 시간을 함께 견딘 관객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말 하나를 남길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살아야 한다.'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라는 남자가 있다. 연극 배우이자 연출가인 그는 아내가 외도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하지만 모른 척했다. 그러고나서 얼마 뒤 아내는 급사했다. 그렇게 2년이 지났고, 그는 여전히 연극을 만들고 있으며, 연출을 제안받아 히로시마로 간다.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 이 작품은 아내가 죽었던 그 때 했던 바로 그 희곡이다. <바냐 아저씨>를 만들기 위해 간 곳에서 가후쿠는 뜻밖에 아내와 외도했던 남자를, 그리고 자신의 차를 대신 몰아준다는 운전기사를 만난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 수록된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소설은 하루키의 단편답게 모호함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하마구치 감독은 소설 <드라이브 마이 카>를 기둥으로 <바냐 아저씨>에 관한 분량을 늘리고(이 소설 속에 이미 <바냐 아저씨>에 관한 얘기가 있다), <여자 없는 남자들>의 다른 단편 속 내용을 차용해 각본을 완성했다. 그는 이 방법으로 원작의 빈 공간을 메우려 하고, 그렇게 관객과 함께 가후쿠라는 남자의 마음 속으로 서서히 접근하기 시작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이야기를 많이 담아놔 도무지 손에 잘 잡히지 않는 영화다. 애초에 이 영화는 소설과 희곡과 하마구치 감독이 직접 쓴 각본이 뒤섞인 채로 만들어졌고, 가후쿠의 여정과 아내 오토가 죽기 전에 풀어냈던 이야기, 그리고 가후쿠가 만들어가는 <바냐 아저씨>의 대사와 이 작품을 준비하는 배우들의 연기가 혼재된 이야기가 아닌가. 게다가 이 영화 속 사건이라고 할 만한 건 짧게 보여지는 아내의 외도와 죽음이 전부. 나머지 긴 시간은 전부 가후쿠의 마음에 남겨져 있는 삶의 잔해를 들여다 보는 데 쓰인다.


말하자면 하마구치 감독은 '드라이브 마이 카'에 이야기를 많이 담아놓고도 그 이야기들이 보여주는 사건의 기승전결을 따라가지 않는다. 대신 사건의 파장이 한 인간의 내면에 남겨놓은 것만을 시종일관 노려본다. 그 속을 골똘히 응시하다보면, 이 짜깁기 된 영화 속 짜깁기 된 이야기들이 종국에 한 자리에 모여 회한과 고백과 변화로 나타나는 걸 목도하게 된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관객을 이해시키기보다 느낄 수밖에 없게 한다. 이 영화적 경험은 하마구치 감독이 왜 현재 세계 영화계가 가장 주목하는 예술가인지 알게 한다.

하마구치 감독은 "인간의 내면을 그리는 데는 영화보다 소설이 적합하다"고 했지만, 그는 어떤 경우엔 영화가 소설보다 사람의 마음을 더 잘 담아낼 수도 있다는 걸 증명한다. 그는 차를 함께 탄다는 것만으로도, 차에 탄 사람들의 위치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눈이 향한 방향으로, 말로, 침묵으로, 이미 알고 있었던 것으로,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로 폐허가 된 한 남자의 속을 조심스레 드러내 보인다. 하마구치 감독은 영화라는 도구가 얼만큼이나 마음의 움직임을 섬세하게 담아낼 수 있을지 실험하는 것 같다. 눈에 보이는 움직임만이 운동이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면, '드라이브 마이 카'를 결코 정적인 영화로 부를 순 없다. 


이 영화는 어쩌면 아주 단순한 얘기를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말하라, 그리고 들어라. 더 정확히 말하기 위해 애쓰고 더 똑바로 듣기 위해 노력하라.' 하마구치 감독에게 세계는 언제나 부조리하고, 인간은 모두가 수수께끼다(영화 초반 가후쿠는 대표적인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하고 있다). 어떤 것도 완벽하게 알 수는 없다는 건, 우리가 마주한 비극적 숙명 같은 것이다. 나도 타인도 세상도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인간은 살아있다고 할 수 없을 테니 살고싶다면 혹은 살기 위해서라면 말해야 하고, 들어야 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에필로그 시퀀스 직전에 <바냐 아저씨>의 마지막 대목을 공연하는 모습을 길게 보여준다. '소냐'는 '바냐 아저씨'에게 우리 삶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끝까지 살아보자고 말한다("사는 거예요. 길고 긴 낮과 오랜 밤들을 살아 나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주는 시련들을 참아내요."). 소냐를 연기하는 배우는 이 대사를 목소리를 통해 말하는 게 아니라 수화(手話)로 보여주고 있다. 이 연극 속 소냐의 말은 그렇게 어떻게든 말해지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관객은 소냐의 수화를 어떻게든 듣고(보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우린 그 모습을 보고 끝내 무언가를 느끼고 있지 않은가.


(글) 손정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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