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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정빈 Sep 22. 2017

장이머우는 없다

영화 '그레이트 월'

 장이머우(67·張藝謀) 감독의 '영웅'(2002)은 충격적이었다. 스크린을 물들인 원색 영상미의 극한을 관객에게 선사해서가 아니다. 그가 이 아름다워 보이는 듯한 영화를 통해 전한 메시지는, 과거 그의 영화를 사랑했던 이들이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영웅'에서 도착한 곳은 '천하'(天下)였다. 세 명의 무사는 무자비한 폭력으로 중국 대륙을 통일한 진나라 왕을 암살하는 작전에 힘을 모으지만, 한 명이 천하를 이유로 배신한다. 세상을 다시 혼란에 빠뜨리지 말고, 천하를 위해 진 왕이 대륙을 잘 통치할 수 있게 힘을 실어주자는 주장이었다. 극중 그 배신자가 바로 '영웅'이다.


 스스로 영웅이 된 장이머우 또한 '변절자'가 됐다. 중국의 패권주의에 동의했다는 의심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장이머우가 누구인가. 어린 시절부터 반혁명주의자의 아들로 삿대질을 받았고, 중국의 대표적인 반체제 예술인으로 성장했다. 거장이라는 칭호는 '붉은 수수밭'(1989) '홍등'(1992) '인생'(1995) 등에서 중국 체제의 그림자를 품위있게, 그러면서도 강하게 비판해서 얻은 것이었다. 그의 영화는 언제나 '검열대상'이었다. 그런 그가, 중국 정치 체제에 동의하는 영화를 내놨다는 걸 영화인과 세계 관객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장이머우는 이후 '2008 베이징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을 맡아 중국을 '홍보'했다.


 15년 전 이야기를 지금 다시 끌어올리는 건 장이머우의 신작 '그레이트 월'(2월15일 개봉) 때문이다. 이 작품은 세상에서 강력한 무기를 찾아 길을 떠난 두 명의 서양 용병 이야기다. 이들은 우연히 만리장성을 맞닥뜨리고 포로로 잡혔다가, 정체불명의 적에 맞서는 만리장성 수비대의 정신에 동화돼 그들과 힘을 합친다. 맷 데이먼과 류더화의 출연으로, 또 장이머우의 첫 판타지액션블록버스터로 화제가 됐다. 그러나 중요하 건 '그레이트 월'이 사실상 또다른 '영웅'이라는 점이다. 오히려 '영웅'보다 더 노골적으로 중화(中華) 사상을 부르짖는 작품이었다.


 언뜻 '그레이트 월'은 부실한 서사를 압도적인 영상으로 만회하는 영화로 보인다. 그렇다면 장이머우의 도전이 참패했다는 정도로 표현하는 데서 그쳤을 것이다. 내놓는 작품마다 찬사를 받을 수 없는 노릇이고, 깊이는 없어지고 테크닉만 남았기에 장이머우의 전성기가 끝났다고 평하면 그만이다. 문제는 이 실패에 어떤 의도가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레이트 월'은 목표가 분명한 영화이고, 장이머우는 그 목표에 딱 들어맞는 어딘가 어설픈 연출을 보여줬다는 것. 정교하게 만들지 않은 이유는 이 정도 선에서 중국을 대변해야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을까, 하는 강한 의심이다.


 장이머우는 먼저 중국의 선진 문명을 적극 광고한다. 이 영화 미덕으로 홍보되는 크고 화려한 전투 장면은, 만리장성의 거대한 규모와 적의 압도적인 물량 공세와는 별개로 극도로 과장돼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장이머우는 초반부 대규모 전투 시퀀스 대부분을 성벽 수비대의 수성(守城) 기술을 보여주는 데 할애한다. 그들이 얼마나 뛰어난 기술을 가졌으며, 이 기술이 어떻게 활용되는지 영화는 반복해서 나열한다. 전투는 없고, 아름다운 갑옷을 입은 미소년·미소녀 군인들이 비효율적인 전투 방식에도 불구하고 '의도된 예술적 완성도'를 위해 기꺼이 몸을 던진다. 이건 일종의 열병식으로 보인다. 우리는 이런 장면을 중국이 그들의 힘을 대놓고 과시하던 전승절 70주년 기념 행사에서 본 적이 있다.


 '그레이트 월'의 오만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수비대는 맷 데이먼과 페드로 파스칼이 연기한 '윌리엄'과 '페로'를 "야만인"으로 부르는 데 주저함이 없다. 포로가 된 이들을 수비대의 전투 장면을 모두 볼 수 있는 장벽 위로 데리고 올라오는 장면은 수상하다. 기막힌 우연으로 감방 열쇠를 찾지 못해 성벽 위로 올라올 수 있게 된 윌리엄과 페로는 이들의 압도적인 방어 기술을 넋놓고 '감상'하며 입을 다물지 못한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이런 거 본 적 있냐"고 묻고, "봤을리가 없지 않느냐"고 답한다.


 '힘자랑'만 할 수 없으니 이제 사상적으로 보완할 때다. 주제는 신뢰다. 여기서 또 한 번 당황스러운 장면이 등장한다. 린 사령관(징톈)과 윌리엄이 성벽에 서서 서로의 삶과 가치관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두 사람의 말을 각각 요약하면 이렇다. 윌리엄은 용병이다. 돈을 준다면 누구를 위해서도 싸울 수 있고, 그렇게 살아왔다. 반면 린은 '나'가 아닌 '우리'를 주어로 쓰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깃발을 옮기지 않는다. 우리는 돈이 아닌 신뢰를 위해 싸우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린은 윌리엄에게 "우린 다른 것 같다"고 말하고, 카메라는 린의 말에 감화한 듯한 윌리엄의 얼굴을 잡는다.


 장이머우의 이분법과 사상적 우월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영화는 페로와 발라드(윌럼 더포)를 신뢰를 져버린 배신자로 그림으로써 기어코 '정신 승리'에 나선다. 영화는 페로를 사막 한가운데 버려지게 하고, 수비대로부터 더 큰 은혜를 받은 것으로 보이는 발라드에게는 천벌을 내린다. 이 에피소드가 '그레이트 월'의 중심 서사와는 어떤 영향도 주고받지 않은 채 독립적으로 진행된다는 점, 페로와 발라드가 극중 어떤 역할도 부여받지 못했다는 점은 '서양인의 배신'이 철저히 기획돼 삽입됐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게 한다.


 이 영화에는 사실상 어떤 갈등도 없다. 갈등이 없다는 건 고민이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대륙을 공격해오는 미지의 생명체가 결국은 수비대와 윌리엄의 합작으로 멸망하게 될 것을 예상하지 못할 관객은 없고, 당연히 그렇게 진행된다. 윌리엄은 수비대가 공유하는 가치를 갑작스럽게 체득해 새로운 인물로 태어난다. 그렇게 하지 못한 인물은 벌을 받거나, 벌을 받지 않았다면 대신 용서를 받았다. 이건 최소한의 고뇌와 설득이 있었던 '영웅'의 장이머우와는 또 다른 장이머우다. 그는 이미 십여년 전에 전향했고, 이제는 완전히 돌아선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때의 거장'을 그리워 할 수밖에 없는 건 '그레이트 월'에도 여전히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리장성 수비대의 전임 사령관을 장사(葬事)지내는 시퀀스가 그것이다. 상복을 입은 군인들이 하늘 위로 등불을 날려보내며 그의 의로운 죽음을 추모한다. 슬픔과 결기가 어우러져 시(詩)적이다. 다만 우리도 이제 우리가 알았던 장이머우를 그렇게 보내줘야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글) 손정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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