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한산성'
흡사 호랑이 두 마리가 눈 덮인 산 속에서 서로를 노려보며 서있는 형국이다. 승부는 피할 수 없고, 맞붙으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서로의 실력은 잘 알고 있다. 절대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꼬리를 보이며 돌아서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서로를 한참 동안 마주보며 으르렁 거리던 두 맹수는 승부를 내기 위해 서로를 향해 달린다. 조용하던 산이 순간 흔들린다.
비유하자면 영화 '남한산성'(감독 황동혁)에서 배우 이병헌과 김윤석이 보여준 연기가 이렇다. 이들의 대사 자체에 결기가 담겨있는 건 분명하나 말해지지 않으면 그건 말 그대로 대사에 그친다. 두 배우의 연기는 활자를 살아숨쉬게 한다. 그렇게 살아서 입을 뚫고 나온 말들이 거대한 충돌을 일으킨다. 서로를 마주보지도, 옷깃 하나 스치지 않지만, 관객의 마음은 이들이 만든 에너지로 인해 요동친다. 이병헌과 김윤석이 보여준 경지다.
1636년 조선, 청나라의 침략에 왕은 궁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한다. 산성을 포위한 청의 칼끝이 점점 조선의 목을 위협해오자 주화파(主和派) 최명길(이병헌)은 "적의 아가리 속에도 분명 삶의 길은 있는 것"이라며 화친을 말한다. 이에 척화파(斥和派) 김상헌(김윤석)은 "명길이 말하는 삶은 곧 죽음이다. 한 나라의 군왕이 어찌 치욕스러운 삶을 구걸하느냐"며 결사항전을 주장하며 맞선다. 인조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뇌에 빠진다.
김훈 작가의 소설은 영화화가 어렵다. 우선 문장의 강렬함을 영상으로 옮기기 만만찮다. 감정의 높낮이 변화는 적고 대신 인물의 행동이나 처한 상황 변화를 세밀하게 보여주는 식으로 서사를 전진시키기에 2시간짜리 영화로 축약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말이 창궐했다'는 표현까지 있을 만큼 말이 중요한 '남한산성'을 영화로 만드는 건 더 어려운 작업이어서 최고 배우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미세한 표정 하나, 작은 행동 하나가 감정이 되고 정보가 돼야 했기에 이병헌과 김윤석의 예민함은 필수적이었다. 두 배우는 김훈의 글을 연기하는 데 성공했다.
황동혁 감독의 뚝심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황 감독의 연출에는 흥행을 위한 타협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는 거대한 슬픔과 깊은 고뇌가 지배하고, 아주 작은 희망만 남겨진 원작의 공기를 스크린에 옮기는 데 성공했다. 흥행만이 지상 과제가 된 듯한 최근 한국영화계에서 그것과는 정반대의 길을 간 것인데, 어쩌면 이 부분이 '남한산성'이 일궈낸 최대 성과라고도 할 수 있다. 추위를 최대한 섬세하게 표현해 조선에 닥친 위기를 상징케 하고, 목표가 명확한 촬영 방식으로 글을 이미지화하는 연출은 '성실한 각색'이라는 말과 어울린다.
다만 영화 '남한산성'은 소설 '남한산성'을 뛰어넘지 못한다. 글을 영상으로 옮겼다고 해서 '영화화'라고 할 수 없다. 소설이 시나리오로 옮겨질 때 탄생한 새로운 시각과 해석, 그것이 원작과 긴밀한 호응을 이루며 다른 작품으로 탈바꿈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 영화화다. '남한산성'에는 이렇게 창조된 개성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김훈의 소설을 큰 단점 없이 영화로 만들어낸 것 자체가 성과인 건 분명하다. 그러나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지 못하면, 다시 말해 영화가 소설과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영화는 소설의 구체성을 당해낼 수 없다.
인조의 고뇌를 상당 부분 들어낸 선택에도 의문이 남는다. 명분과 실리의 대립 뒤에는 결국 선택이 있다. 다시 말해, 대립하는 자들의 이야기 못지 않게 쏟아지는 주장들 사이에서 가장 나은 것을 선택하는 사람의 서사도 중요하다(김훈 작가는 이 부분을 "아버지로서의 선택"이라고 말했다). 결과론적인 지적이지만, 인조가 최명길·김상헌과 대등한 위치에서 다뤄졌다면, '남한산성'은 더 깊은 작품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박해일은 그 정도 역량을 갖춘 배우이기도 하다.
청의 공격 하루를 앞두고 벌어지는 김상헌과 최명길의 설전(舌戰)은 이 작품에 관해 이야기할 때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명장면이다. 앞서 언급처럼 이병헌·김윤석 두 배우가 빼어난 연기를 보여준 것에 더해 이 장면이 현재 한국 정치의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삼전도 굴욕'은 패배의 역사이지만 최소한 최명길과 김상헌, 두 충신의 소신과 철학은 결코 굴욕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관객은 인조의 삼배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비난할 수 없다. 그에 반해 현재 우리나라 정치는 이미 세상을 떠난 대통령을 물고늘어지는 정도의 수준이다.
(글) 손정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