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데뷔작 '환상의 빛'
어떤 영화를 보면 한동안 그 영화만 생각한다. 이 신(scene)과 저 시퀀스를 순서 없이 되짚거나 혹은 그 배우의 표정과 저 대사를 곱씹는다. 그러다보면 내 몸 어딘가에 그 작품이 남는 것처럼 느껴진다. 다른 걸 보느라 잠시 잊지만, 그런 영화는 대개 예상 못 한 순간에 불쑥 떠올라 또 한 번 머릿속을 헤집는다. 그때 정말 잊히지 않는 무언가가 됐다고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그런 영화들의 공통점은 슬펐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는 슬퍼하는 사람들이 있고, 슬픔을 견뎌내는 사람들의 안간힘이 있었다. 나는 그런 영화를 볼 때면 매번 속수무책으로 매혹됐다.
그 비탄(悲歎)에 뭐가 있길래 그토록 마음이 흔들렸냐고 묻는다면, 결국 이 단어를 고를 것이다. 그게 더 '인간적'이라는 것. 지독한 슬픔을 견디지 못 하고 죽어버리는 것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죽으면 더이상 산 게 아니기에 생을 끝내는 일은 인간적이라는 말 옆에 오래 머물 수 없다. 반면 산다는 건 다르다. 기어코 살아서 비통을 견디며 고통의 이유와 의미를 찾는다. 쉽게 알 수 있을 리 없다. 그랬다면 그렇게 아프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럼 이제 어떡해야 하나. 살아봐야 한다, 알 수 있을 때까지. 이런 종류의 슬픔은 오직 인간에게만 있다.
그리고나서 한 영화를 떠올린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환상의 빛'(1995). 이 작품에는 그의 최근작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가 있다. 더 차분하고 더 고요하다. 덜 수다스럽고 덜 극적이다. 어떤 이들은 이를 두고 고레에다 감독이 다큐멘터리 연출가였다는 걸 언급하며 다큐 감각이 남아있는 초기작이라고 평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건 스타일이 아니라 당위다. 남겨진 유미코(에스미 마키코)는 그저 산다. 살려면 마냥 슬픔에 파묻혀 있을 수는 없고, 생활해야 한다. 고레에다 감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가야 하는 삶을 담았다. 그게 전부다.
'환상의 빛'에서 '사건'이라고 할 만한 일은 짧게 지나간다. 출근했던 남편 이쿠오(아사노 타다노부)는 퇴근할 때가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는다. 그날 밤 이쿠오가 아닌 경찰이 유미코를 찾는다. '남성 한 명이 기차 사고를 당했는데, 신원을 확인해 달라.' 경찰서에 가보니 죽은 남자의 신발이, 그리고 주머니에서 나온 열쇠가 이쿠오의 것이다. 남편이 죽었다. "철로 가운데를 걷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쿠오가 출근하고, 유미코가 남편의 죽음을 확인한 뒤 집에 돌아오기까지 걸린 러닝타임은 5분. 이 영화의 남은 시간은 이제 남겨진 유미코와 갓난아기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여러 갈래를 떠올릴 수 있다. 흔한 것 중 하나는 아내가 남편의 사고가 어떻게 일어나게 된 것인지 사건의 진실을 찾아들어가는 이야기이고, 또 다른 평범한 이야기는 이쿠오의 죽음이 유미코의 삶을 어떻게 극적으로 변화시켰는지 따라가 보는 것이다. 혹은 아버지 없이 자란 아들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고레에다 감독은 이중 어떤 것도 택하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길로 간다. 유미코는 남편이 죽은지 몇 해가 흐른 어느 겨울에 딸 하나를 둔 이혼한 남자와 재혼한다. 그렇게 살아간다. 유미코는 유별나게 행복한 것 같지 않지만 달리 불행하지도 않다.
그러면 이제 이런 질문이 나올 차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왜 '환상의 빛'을 끝까지 봐야 하는가. 고레에다 감독은 그 물음 그대로 답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 일도 없기 때문에 봐야 한다.' 다시 말해,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은 여자가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다면 그것 자체로 사건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질문을 다시 던져야 한다. 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거냐고 물을 게 아니라 왜 그녀는 슬퍼하지도 고통스러워 하지도 않는 것이냐고. 여기까지 왔으면 이제는 답할 수 있다. '유미코는 필사적으로 견뎌내고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고통이 아닐 뿐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순간들이다. 유미코가 청소를 하다가 잠시 멈춰 설 때. 잠을 잘 이루지 못하거나 조용히 창 밖에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기도 하며, 가끔 입을 굳에 다물때. 이쿠오를 알지 못하는 아들이 이쿠오처럼 자전거를 타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볼 때. 하필이면 이쿠오가 탔던 것과 같은 녹색 자전거를 바라보고 있을 때. 이쿠오의 열쇠에 달려 있던 방울을 차마 버릴 수 없을 때. 이웃에 사는 해녀가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 시간도 삶도 흘러가지만 잠복했던 슬픔이 터져 나오는 때가 있다. 유미코는 매일 침전되지는 않아도 매번 침전된다.
유미코에게는 두 가지 고통이 있다. 하나는 이쿠오의 부재. 다른 하나는 이쿠오의 존재다. 부재(不在)가 죽음이라면, 존재(存在)는 이유다. 죽음이라는 건 명확한데, 죽은 이유는 알 수 없다. 이쿠오는 죽을 이유가 없었다. "철로 가운데를 걷고 있었답니다. 경적 소리와 급브레이크 소리에도 똑바로 걸어가고 있었대요." 이유가 명확한 죽음이었다면, 잊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를 알 수 없기에 계속 생각해야 한다. 청소를 하다가 문득, 잠을 자다가 문득, 이쿠오를 닮은 아들을 보다가 문득. 죽지 않고, 견디며 살아내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니까 계속 살아봐야 한다.
'환상의 빛'에서 유미코는 딱 한 번 운다. 그녀가 현재 남편에게 토로할 때다. "난 정말 모르겠어. 그가 왜 자살을 했고, 왜 철로 위를 걷고 있었는지. 그게 떠오를 때면 정말 견딜 수 없게 돼." 솔직한 마음을 내보였으니 이제 괜찮을 걸까. 그렇지 않다. 유별나게 행복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불행하지도 않은 유미코는 매번 무너질 게다. 그렇게 버티며 살아갈 것이다. 이쿠오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고레에다 감독은 어떤 특별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 길을 선택했으나 대신 가장 슬픈 길을 택했다고. 그건 너무 인간적이어서 슬픈 길이었다고.
(글) 손정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