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윤희에게'를 보고 떠올린 영화들
"눈은 언제쯤 그치려나…" 어느 겨울, 마사코 고모(키노 하나)는 조카 쥰(나카무라 유코)과 함께 집 앞에 쌓여만가는 눈을 퍼내며 말한다. 조카는 고모에게 웃으며 핀잔을 준다. "왜 그런 쓸데 없는 말을 해. 여기서 산지 몇 년째인데." 일본 오타루는 겨울 내내 눈이 내리는 도시다. 이날도 눈은 쉬지 않고 내린다. 마사코는 쥰의 말을 들은 체 만 체 하며 혼잣말을 내뱉는다. "눈이 와서 치우면 또 눈이 오고. 치우면 또 눈이 오고. 자연 앞에선 무력해지는 수밖에 없다니까."
'윤희에게'에서 쥰은 가끔 부치지 못 할 편지를 쓴다. 오래 전에 만나 사랑했으나 헤어져야 했던 연인 윤희(김희애)를 향한 그리움을 종이 위에 차곡차곡 눌러 담는다. 그녀는 말한다. "네 꿈을 꾸게 되는 날이면 너에게 편지를 쓰곤 했다"고. 다만 보낼 순 없다. 윤희는 이미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있으니까. 조카의 애달픈 마음을 알고 있던 고모는 쥰이 어젯밤 쓴 것으로 보이는 편지를 몰래 윤희에게 보낸다. 그렇게 20년 만에 쥰의 마음이 윤희에게 가닿는다.
쥰은 료코(타키우치 쿠미)라는 여성과 가까워진 것으로 보인다. 료코는 쥰에게 관심을 표현 하지만 그녀는 마음을 열지 않는다. 오히려 숨기는 게 있다면 계속 숨기고 살라고 충고한다. 쥰은 여전히 옛사랑을 그리워한다. 과거의 쥰은 윤희에 대한 감정을 짊어지지 못 했던 것으로 보인다. "난 비겁했어. 너한테서 도망쳤고 여전히 도망치고 있어." 쥰은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윤희에게 온전히 마음을 던지지 못 했던 쥰이 윤희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열 수는 없다.
말하자면 도시 전체를 덮은 눈은 윤희를 향한 쥰의 그리움 같은 것이다. 윤희를 더 사랑하지 못 하고, 그 사랑을 지키지도 못 한 지난 날을 향한 후회 같은 것이다. 쥰은 눈이 펑펑 내리는 곳에서, 눈을 맞으며, 눈 위에서, 눈과 눈 사이를 걸으며 산다. 그리움과 후회, 윤희에 대한 사랑은 눈이 돼 지겹도록 내리고 고모의 말처럼 치워도 쌓이고, 치워도 쌓인다. 20년 전에, 짧지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진 그 눈 속에서 쥰은 참 오래 살았다. 눈만 자연이 아니고 누군가를 향해 자꾸만 쏠리는 내 마음도 '자연' 일테니 고모의 말처럼 이 자연스러운 감정 앞에 인간은 무력하다.
쥰처럼 20년을 버틴 사람이 또 있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에니스 델마(히스 레저). 델마는 브로크백에 양치기로 들어갔다가 같이 일을 하게 된 잭 트위스트(제이크 질렌할)를 만난다. 두 사람은 브로크백에서 단 둘이 남아 일을 하며 여름을 보내다가 일순간 상대를 향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게 된다. 가을이 오고 델마와 트위스트는 산에서 내려왔지만, 그 여름은 서로의 가슴에 똑같이 남는다. 다만 시대가 그 마음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들은 각자 결혼한다.
"때론 네가 너무 보고싶어서 견딜 수 없어." 트위스트가 델마에게 말한다. 트위스트의 엽서로 브로크백 이후 4년 만에 재회한 두 사람은 이후 20년 동안 1년에 두어번 만나며 평생 서로를 그리워한다. 그들은 만날 때마다 '그때 그 여름'이 있는 브로크백으로 간다. 두 사람은 아마도 깊은 산 속에서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었던 그 계절을 평생 그리워했을 게다. "그래도 우린 견딜 수밖에 없겠지." 델마가 답한다. 그들에게 브로크백 외의 삶은 오직 견디는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쥰이 그러한 것처럼 델마도 스치듯 지나간 그 여름의 짧은 시간으로 평생을 버틴다. 쥰처럼 델마에게도 도저히 떨칠 수 없는 마음이 있다. "자연 앞에선 무력해지는 수밖에 없다"는 마사코 고모의 말처럼 자꾸만 트위스트를 떠올리게 되는 이 사랑 앞에 무력한 건 델마도 마찬가지다. 그 상징이 쥰에겐 눈이고, 델마에겐 브로크백이다. 그 거대한 산 속에 델마와 트위스트가 있었다. 대자연처럼 그저 마음이 가는대로 사랑했고, 떡하니 놓인 큰 산처럼 상대와 함께할 수 없는 애끓는 마음도 고스란히 남았다.
'지구 최후의 밤'은 쥰과 델마에게 있었던 짧았으나 오래 남은 사랑을 폭죽과 시계에 비유한다. 오래 전 뤄홍우(황쥐에)는 친구를 죽인 살인자를 찾아나섰다가 살인자의 애인 완치원(탕웨이)을 붙잡았는데,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사랑했으나 완치원은 어느 순간 사라졌고, 뤄홍우는 그날 이후 그녀를 잊지 못 한 채 아주 긴 시간을 완치원이 나오는 꿈을 꾸며 살았다. 그러다가 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에 온 뤄홍우는 완치원을 만났던 그곳에서 그녀를 떠올리고 행방을 쫓기 시작한다.
뤄홍우가 완치원을 찾았는지는 알 수 없다. 대신 그는 또 꿈을 꾼다. 그 꿈엔 완치원처럼 생긴 여자가 나온다. 그리고 뤄홍우는 그녀에게 고장나서 멈춘 시계를 선물한다. "시계는 함부로 주는 게 아니에요. 영원을 뜻하니까요." 이렇게 말한 뒤 그녀는 뤄홍우에게 폭죽을 선물한다. "폭죽은 함부로 선물하는 게 아니에요. 찰나를 뜻하니까요." 그러니까 뤄홍우는 영원을 주고 찰나를 받았다. 완치원은 찰나를 주고 영원을 받았다. 뤄홍우의 시간은 완치원과의 함께 보냈던 순간에서 멈췄다. 그는 찰나로 영원을 산다. 완치원은 뤄홍우에게 찰나를 허락하고 영원히 그의 기억 속에 산다.
윤희도 델마와 뤄홍우처럼 살았다. 윤희는 쥰에게 보낸 답장에 이렇게 썼다. "너와 만났던 시절에 나는 진정한 행복을 느꼈어. 그렇게 충만했던 시절은 또 오지 못 할 거야." 쥰과 헤어진 윤희는 억지로 결혼했고 그녀의 삶은 행복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녀의 겨울은 차고 메말라 있다. 윤희가 할 수 있는 건 찬바람을 맞으며 담배를 피우는 것 뿐이다. 이 혹독한 겨울은 델마가 말했던 견디는 삶이고, 뤄홍우의 멈춰버린 시계다. "나는 나한테 주어진 여분의 삶이 벌이라고 생각했어. 스스로에게 벌을 주면서 살았어."
딸의 도움으로 일본에 가서 쥰을 만난 윤희는 새로운 삶을 준비한다. 윤희가 쥰을 만난 건 이번에도 아주 잠깐이다. 그들은 그저 서로를 마주보고 웃고, 잠시 함께 걷는다. 짧은 시간이라도 재회했기에 이제 이 기억으로 윤희와 쥰은 또 한 번 살아갈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윤희는 쥰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쓸 수 있다. "너는 네가 부끄럽지 않다고 했지. 나도 더이상 내가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 우리는 잘못한 게 없으니까." 그렇게 그녀는 메마른 기억만 남은 고향을 떠나 새로운 도시로 떠난다.
윤희와 함께 일본에 온 딸 새봄(김소혜)은 엄마와 쥰의 만남을 도우면서 이 여행에 몰래 따라온 남자친구 경수(성유빈)와 추억을 쌓느라 바쁘다. 새봄과 경수의 사랑은 물론 아름답지만 오래 가지 못 할 것이다. 새봄은 서울로 대학교를 갔고, 경수는 고향에 남았으니 두 청춘의 관계도 이제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다만 두 사람이 함께 보낸 지금 이 겨울이 그들에겐 평생을 추억하게 될 봄과 같은 시절이 되리란 건 분명하다. 미래에 새봄과 경수는 그 봄으로 삶을 지탱해내며 살지도 모른다. 쥰과 윤희, 델마와 트위스트, 뤄홍우처럼.
(글) 손정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