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느 가족'에 관하여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어느 가족'(2018)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어떤 것이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주인공 '시바타 노부요'(타나베 요코이기도 한)가 경찰 신문 도중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는 바로 그 순간을 꼽을 것이다. 그녀의 울음은 흔히 말하는 오열과는 거리가 멀다. 배우 안도 사쿠라는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마치 땀을 닦아내듯 손으로 몇 차례 눈물을 훔칠 뿐인데, 소란스럽지 않은 이 행위가 유난히 마음을 괴롭히고 미어지게 한다.
안도는 시바타 노부요라는 사람을 온전히 이해한 것 같았고, 고레에다 감독이 이 영화에 담고자 했던 것들을 체화(體化)한 것처럼 보였다. 이번엔 이렇게 울어보겠다고 선택한 게 아니라 이렇게 울 수밖에 없다고 느끼는 것, 그러니까 안도의 눈물은 '정확했다'고 해야 한다.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으로서 '어느 가족'을 본 뒤에 "앞으로 우리가 찍을 영화에 눈물 흘리는 장면이 있다면, 그건 안도의 연기를 따라한 거라고 보면 된다"고 했던 케이트 블란쳇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안도의 눈물에는 '어느 가족'이 압축돼 있어서 이 2분의 시퀀스를 위해 영화의 나머지 시간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블란쳇이 안도의 연기를 따라할 거라고 말한 건 이 압축을 이야기한 거라고 추측한다. 말로는 풀어내기 어려운 긴 사연을 순간에 담아내는 일을 '어느 가족'이, 그리고 안도가 해냈다는 의미다. 그러면 이제 궁금증이 생긴다. 안도가 연기한 시바타 노부요는 왜 우는가. 이것에 답할 수 있으면 '어느 가족'을 알게 됐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시바타 노부요, 진짜 이름은 타나베 요코인 이 여자는 지금 유괴 등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는 중이다. 타나베는 경찰에 붙잡히기 전까지만 해도 한 가족의 일원이었다. 그 가족이 여느 가족과 다른 게 있다면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라는 점이다. 구체적인 경로는 알 수 없으나 '시바타 하츠에'라는 할머니의 집에 타나베를 비롯해 성인 몇몇과 초등학생 남자아이 한 명이 모여 살게 됐고, 그들이 '시바타'라는 성(姓)을 임의로 공유하며 가족의 형태를 띄게 됐다.
그러던 중 '쥬리'라는 여자아이가 새 가족이 된다. 이 이상한 가족은 부모에게 학대받는 아이를 차마 집으로 돌려보내지 못하고, 쥬리도 집에 가기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타나베는 그런 쥬리를 딸처럼 돌본다. 가족에게 버림받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과 새롭게 만든 이 가족에게는 문제가 없어 보이고, 언뜻 행복해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이들의 정체가 세상에 드러나고, 쥬리 유괴 건으로 경찰 조사가 진행되기에 이른다.
요약하자면 '어느 가족'은 가족에게서 버려졌거나 떨어져 나온 사람들이 우연찮게 가족과 유사한 공동체를 이뤘다가 다시 해체되는 이야기다. 극중 언론은 "가족인 척을 했던 자들이 무슨 목적으로 모여 살았는지 밝혀지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관객은 그들 사이에 연대와 유대, 위로가 있었다는 걸 안다. 쥬리도 마찬가지다. 유괴의 형태이긴하나 안을 들여다보면 쥬리는 '시바타' 가족에게 구조됐다. 때리는 친모 대신 다정한 엄마와 아빠와 오빠가 생겼고, 할머니와 이모도 가졌다.
문제는 이것이다. 관객이 알고 있는 것을 경찰 혹은 사회는 전혀 알지 못 한다는 것. 인간 사이의 유대는 눈에 보이는 게 아니기에 이 가족이 사회 최소 단위로써 기능을 하지 못 한다는 사실만 존재한다는 의미다. 말하자면 타나베와 쥬리 사이의 감정은 개인적이어서 밖으로 드러날 수 없지만 타나베가 쥬리의 보호자가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는 건 매우 객관적인, 명백한 사실이다. 경찰은 결코 훼방꾼이 아니다. 사회 시스템에 따라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사건을 처리할 뿐이다. 법을 어긴 사람은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고 가족인 척하며 모여있던 이들을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는다.
가족에게서 버려진 이들을 모아 유사 가족을 만든 뒤에 이것마저 산산조각 냈다면, 고레에다 감독은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가. 필모그래피 대부분을 가족에 관한 것들로 채웠다는 이유로 고레에다 감독은 흔히 따뜻한 영화를 만드는 예술가로 알려졌으나 이는 부정확한 정보다. 그는 매번 현실적이었고, 때로는 비관적이었다. 고레에다 감독의 가족영화는 대개 (혈연) 가족의 한계를 절감하는 쪽을 향했는데, '어느 가족'에 이르러서는 대안 가족조차 결코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게 한다.
이건 '감정의 교류만 있다면 가족이 되지 못 할 이유가 없다'는 식의 낭만적 결론에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다는 고레에다 감독의 고백이나 다름 없다. 경찰 조사 결과 이들 가족 구성원 간에 얽히고설킨 이해관계가 드러나는 건 이때문이다. 그러니 이 작품을 '가족의 의미를 탐구하는 작품'이라고 말하는 건 맞지 않다. 고레에다 감독의 세계에서 가족의 의미를 되내이는 건 새삼스럽다. 이건 가족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이자 관계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다.
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타나베는 항변하듯 경찰에게 묻는다. "낳았다고 엄마가 되는 겁니까." 경찰은 그녀의 물음에 이렇게 반박한다. "하지만 낳지 않으면 엄마가 될 수 없죠." 경찰은 한 마디를 더 보탠다. "쥬리가 당신을 뭐라고 불렀죠? 엄마? 아니면 어머니?" 그러고보니 쥬리가 요코를 부르는 장면이 이 영화에는 없다. 요코는 답하지 못 하고 운다. 타나베는 쥬리에게 명명되지 못하는 존재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에서 가족은 진작에 실패했고, 가족을 대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긴 어떤 것조차 불완전해서 실패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타나베의 눈물은 이 무력감을 대체한다. 그녀는 억울해하지도 서러워하지도 않고 그저 눈물을 떨군다. 그리고는 이건 마치 눈물도 뭣도 아니라는 듯 손으로 닦아내버린다. 일종의 항복 선언. "쥬리가 당신을 뭐라고 불렀냐"는 물음에 타나베는 "글쎄요"라고 말할 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전한 감정적 교류, 그러니까 사랑만으로 유지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세계 혹은 관계는 없다는 걸 그녀는 알았다. 그래서 타나베는 소리 없이 운다. 아무리 닦아내도 눈물을 막을 수 없다. 안도 사쿠라의 연기는 그렇게 너무 정확해서 괴롭고, 아름답다.
그러면 '어느 가족'은 조용히 절망하며 이대로 끝나버리는 걸까. 쥬리는 친모가 옷을 사주겠다며 가까이 오라고 하자 거부한다. 때릴 걸 알기 때문이다. 타나베를 알기 전에 쥬리는 엄마의 말을 순순히 들었다. 그러나 타나베를 알고난 후에는 엄마의 말을 듣지 않는다. "사랑하기 때문에 때린다는 건 거짓말"이라는 타나베의 말을 쥬리는 기억한다. 훗날 쥬리가 타나베를 잊더라도 타나베의 말은 쥬리의 마음 속에 남아 있지 않을까. 고레에다 감독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견한 희망은 딱 이정도다.
(글) 손정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