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페이버릿:여왕의 여자'를 보고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더 페이버릿:여왕의 여자'(2018)와 그가 이 작품을 내놓기 직전에 만든 두 영화 '킬링 디어'(2017) '더 랍스터'(2015)의 가장 큰 차이는 연기다. 앞선 두 작품에서 배우의 행동 반경을 최대한 제한해 그들이 흡사 기계 혹은 인형처럼 보이는 지점까지 밀어붙였던 란티모스 감독은 '더 페이버릿'에서 언제 그랬냐는 듯 연기자들을 방목해 그들이 가진 능력을 마음껏 즐긴다. 올리비아 콜먼, 에마 스톤, 레이철 와이즈 세 주인공이 제91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모두 연기상 후보에 올라 여우주연상(콜먼)을 가져온 게 그 근거다.
'더 페이버릿'이 욕망에 관한 영화라는 건 쉽게 알 수 있다. '더 랍스터'에서 일정 시간 안에 커플이 되지 못 하면 동물로 변하는 낯선 이야기를, '킬링 디어'에서 아가멤논 부녀의 신화를 비틀어 관객을 혼란에 빠트렸던 란티모스는 '더 페이버릿'에 이르러 달라진다. 각자의 욕망을 향해 한 걸음씩 전진하는 세 여자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온갖 감정이 고스란히 담긴 배우들의 얼굴은 이 에둘러가지 않는 화법과 일맥상통한다. 주체할 수 없이 내달리는 마음들을 보편적인 방식으로 드러내보이겠다는 목표가 더 인간다운 연기 안에 녹아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욕망은 영화의 최대 주제다. 요컨대 이런 식이다. 다양한 경로로 욕망이 태어나고, 그 욕망은 스스로 점점 커지다가 본색을 드러낸다.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몸집이 커져버린 이 욕망은 결국 폭발해 한 인간을 몰락시킨다. 그렇게 붕괴된 인간은 죽어버리거나 허망함에 몸부림치거나 다른 욕망을 또 다시 찾아 헤맨다. '스카페이스'(1983)의 토니 몬타나(알 파치노)가 그랬고, '리플리'(1999)의 리플리(맷 데이먼)가 그랬다. 마틴 스코세이지 영화의 건달들이 그렇게 사라지고, 우디 앨런 작품의 사랑들이 그렇게 무너져내리곤 했다.
의문스러운 건 이것이다. 왜 란티모스는 '더 페이버릿'을 이런 영화로 만들었는가. 다시 묻자면 란티모스는 왜 갑자기 평범해졌는가. 관객을 예상하지 못 한 장소로 순식간에 이동시킨 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천역덕스럽게 어디서도 들은 적 없는 자기 이야기를 풀어내던 예술가가 18세기 영국 왕실에 실재했던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가져와 욕망에 관해 이야기하는 건 어딘가 어색하다(란티모스는 '킬링 디어'와 '더 랍스터'의 각본을 썼고, '더 페이버릿'은 쓰지 않았다). 이 의문에 답하기 위해 이 작품의 시작과 끝을 다시 한 번 훑어야 한다.
'더 페이버릿'을 소략하면, 몰락한 귀족인 애비게일(에마 스톤)이 앤(올리비아 콜먼) 여왕의 최측근이자 실세이고 사촌인 사라(레이철 와이즈)를 발판 삼아 권력에 접근해가는 이야기다. 조금 더 보태면 앤과 사라가 은밀한 관계라는 걸 알게 된 애비게일이 사라를 밀어내고 앤의 총애를 얻어 신분 상승에 도전하는 이야기다. 사랑과 권력과 신분과 진실과 거짓과 욕망이 뒤섞이는 서사, 이건 '욕망 클래식'으로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전형적이다. 그런데 란티모스는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를 완결되지 않은 시점에서 갑작스럽게 끝내며 클래식이 되기를 거부한다.
란티모스는 욕망의 '탄생'과 '팽창'이라는 두 가지 단계를 거치고서도 '폭발'이라는 마지막 단계로 가지 않는다. 앤 여왕은 17명의 자식을 잃은 뒤 17마리의 토끼를 대신 키우며 우울증에 시달린다. 지독한 통풍에 시달리는 건 덤이다. 상실은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게 만들었다. 앤이 진심에 가깝지만 베일듯 날카로운 진실도 말할 줄 아는 사라의 사랑 대신 거짓에 가까운 달콤한 말만 속삭이는 애비게일의 사랑을 택한 건 점점 더 많은 양의 관심이 필요한 그의 욕망을 주체할 수 없어서다. 그래서 여왕은 "사랑엔 한계가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원래는 귀족이었던 애비게일 집안은 아버지의 도박빚 때문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아버지는 죽었고 애비게일은 "뚱뚱하고 성기가 작은 독일인"에게 팔려갔다. 이 추락으로 인해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 어떻게든 다시 귀족 지위를 쟁취하는 것만이 애비게일의 목표가 된 듯하다. 애비게일은 말한다. "현실에 맞서 싸우려면 부도덕한 일도 해야 된다. 매독 걸린 군인이나 상대하는 창녀로 전락해서 고지식했던 지난 날을 후회하며 살긴 싫다." 애비게일은 먼저 사라의 믿음을 산 뒤 결국 사라의 뒷통수를 치고 여왕의 사랑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제 욕망이 몰락할 시간이다. '더 페이버릿'이 '욕망 클래식'의 방식으로 진행된다면 동성애를 탐닉한 앤은 폐위될 수도 있고, 그런 왕을 이용해 권력을 좇고 신분을 끌어올린 애비게일은 다시 거리로 내쫓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란티모스는 이 두 사람을 추락시키지 않고 그대로 둔 채 극을 닫아버린다. 여왕의 절대권력에는 흔들림이 없고, 권력에 기생하는 애비게일의 위치에도 변함이 없다. 이제 질문 한 가지가 추가된다. 란티모스는 왜 욕망의 몰락을 생략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일단 이렇게 하고 싶다. 그는 이전에도 이런 적이 있다.
란티모스는 '더 랍스터'에서도 데이비드(콜린 퍼렐)의 결정적 선택을 보여주지 않았다. 데이비드는 정해진 시간 안에 커플이 되지 못 하면 동물이 돼야 하는 세계에서 뛰쳐나와 오직 혼자 살아가는 사람들만 모인 체제로 도피하지만, 그곳은 반대로 절대 커플이 돼서는 안 되는 질서를 갖고 있다. 하필이면 그는 싱글들의 세계에서 짝을 만나고 그 여인과 함께 도망친다. 이 여자는 데이비드를 사랑한 대가로 싱글 집단에 의해 눈을 잃었다. 이제 데이비드는 사랑하는 여인과 똑같이 되기 위해 칼을 들고 거울에 앞에 선다. 눈을 찌르려고.
데이비드를 기다리는 여자의 모습이 '더 랍스터'의 마지막 장면이다. 데이비드는 눈을 찔렀을까. 아니면 결국 하지 못 하고 여자를 놔둔 채 도망쳤을까.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게 하나 있다. 데이비드가 망설였다는 것. 그는 커플이 되려고 했다가 도망쳤고, 혼자 살려고 했다가 또 한 번 도주했다. 그렇게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살 수 있는 기회를 잡았는데, 그는 또 주저하고 있다. 데이비드가 원하는 게 뭔지 알 수 없으나 그가 뭔가를 끊임없이 원한다는 건 알 수 있다. 이런 행동을 반복할 게 뻔하니 이쯤에서 멈춰도 상관 없을 거라고 란티모스는 생각한 듯하다.
여왕과 애비게일 그리고 토끼가 한 데 겹치며 '더 페이버릿'은 끝난다. 토끼를 칭찬하며 여왕의 관심을 끌어냈던 애비게일은 이제 이 토끼를 여왕 몰래 짓밟으며 권력을 즐긴다. 이 모습을 목격한 여왕은 애비게일의 사랑이 진심이 아니라는 걸 확신했을 것이다. 여왕은 애비게일에게 다리를 주무르라고 명령한다. 아무리 애비게일에게 힘이 있다고 해도 앤의 절대권력 앞에서 그는 시녀에 불과하다. 여왕은 애비게일의 머리를 중심을 잡기 위한 지지대로 사용한다. 그렇게 여왕과 애비게일과 토끼가 한 화면에 담기며 영화는 끝난다.
이제 몰락은 필요 없다. 여왕은 그가 그토록 원하는 사랑이 애비게일로도 토끼로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래서 계속 아프다. 여전히 우울하고 통풍은 심해진다. 애비게일은 신분 상승에 성공했고 권력도 얻었으나 여전히 시녀라는 걸 알았다. 토끼는 밟을 수 있으나 여왕에겐 밟히는 존재, 애비게일은 언제라도 다른 누군가로 대체될 수 있다. 이들의 슬픈 표정에는 그들의 욕망이 절대 채워질 수 없다는 허무가 있다. 그러니 앤과 애비게일이 가진 모든 걸 빼앗는 식으로 이들을 추락시키지 않아도 된다. 두 사람의 마음은 이미 무너져내렸다.
아직 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바로 사라의 욕망. 탄생과 성장이 명확했던 앤과 애비게일의 욕망과 달리 사라의 그것은 출발과 과정 모두 불명확하다. 사라의 권력 의지는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게 아니라 진심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는 "내 애국심에는 한계가 없다"고 말하며,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남편을 전장에 보내는 일도 주저하지 않는다. 여왕을 두고 애비게일과 진흙탕 싸움을 벌이지만 여왕을 궁지로 내몰 수 있는 증거를 스스로 없애 결국 추방당한다(사라가 앤을 정말 사랑했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권력에 대한 사라의 욕망은 이를테면 공적인 것이다. 여왕에 대한 사라의 사랑은 진심에 더 가까웠으니 이건 욕망이 아니라 말 그대로 사랑이다. 그러니 여왕과 애비게일과 토끼가 뒤섞이는 마지막 장면에 사라는 없어야 한다. 탄생과 성장이 불분명하니 사라의 욕망에 몰락이 있을리도 없다. 그는 그저 영국을 떠날 뿐이다. 이제 정리하자. 란티모스에게 욕망은 절대 채워질 수 없는 것이다. 욕망을 가졌다면 방황하거나('더 랍스터')나 고통스럽다('더 페이버릿'). 굳이 욕망의 인간들을 무너뜨릴 이유는 없다. 그들은 욕망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너무 아프다.
(글) 손정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