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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Jun 16. 2021

[가타카] 극복할 수 있을까?

모든 차별이 사라진 세상에서 우리는



정확히 언제였는지, 어떤 영화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대략 일이 년 전쯤, 극장에서 혼자 차별을 비판하는 영화를 관람 중이었고, 그 차별이 여성 차별이나 인종 차별 같은 생득 조건에 기반한 차별이었다는 사실만 또렷하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당시 이 차별이라는 놈 때문에 안 그래도 부족했던 인류애가 점점 더 바닥을 드러내고 있던 참이었다. 차별이 차별인 줄도 모르고 아무 생각 없이 폭력적인 말들을 본인들의 뇌만큼이나 가볍게 떠드는 사람들을 보며 신물이 났다.


그때의 나는 관객도 얼마 없는, 스크린을 제외하고는 깜깜하기만 한 상영관에서 혼자 심각한 상상에 빠져들었다. 과연 지금 차별의 기제로서 작동하는 모든 조건과 변수들을 제거한다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까?


인간이 자웅동체가 되고, 피부색은 하나뿐이며, 모든 이들의 사회 경제적 지위 등이 동일 해지는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성별과 인종, 그리고 직업 등 한 사람을 구성하며 바꾸기 불가능하거나 어려운 요소들에 덧씌워진 편견과 고정관념들이 완전히 사라진 세상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물을 사랑하는 만큼 인간을 사랑하지 못한 나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분명 그동안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있던 요소들을 끄집어내 어떻게든 차별적 구조를 유지하고 말 것이라고. 인간은 자신의 발 밑에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감각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싶어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그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어떤 면에선 꽤 낙천적인 기질이 있는 나이기에 곧 이런 희망적인 생각이 뒤따랐다. 지금의 현실에서도 평등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존재하듯, 또 다른 차별이 찾아온 세상에서도 정의로운 이들은 분명 기꺼이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말이다.



• 우월한 유전자만을 위한 세상


‘가타카’에서 보여주는 세상이 내가 상상했던 ‘또 다른 차별이 찾아온 세상’에 딱 맞아떨어진다고 볼 수는 없지만 과거의 상상을 다시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가타카’에서 묘사하는 미래 사회에는 크게 두 계급이 존재한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우성인자만 지니고 태어난 ‘엘리트’ 집단과 지금의 우리처럼 순전히 랜덤으로 유전자를 부여받고 태어난 ‘신의 아이’가 그것이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영화상 각 인물들이 신원 조회를 할 때, 유전자 조작을 태어난 계급은 ‘적격자(valid)’, 자연적인 방식으로 태어난 집단은 ‘부적격자(invalid)’로 표기된다는 사실이다. 나름 덜 발전된 과거에 대한 낭만화의 여지는 남겨 두려는 목적인지 산모의 임신과 출산으로 탄생한 이들에게 ‘fate-birth’ 혹은 ‘God child’라고 부르는 한편, 공식적인 서류상의 표기가 ‘invalid’로 되어 있는 영화 속 현실은 각 단어들의 의미가 지닌 간극만큼이나 참담하다.


왼쪽 적격자(valid) / 오른쪽 부적격자 (invalid)


당연하게도 에단 호크가 연기한 주인공 빈센트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잉태되어 태어난 ‘신의 아이’이다. 그러나 그가 타고난 조건들은 처참하기 그지없다. (심지어 예상 수명이 30.2세이다.) 빈센트의 부모님은 유전자 조작을 통한 우성 유전자만을 지니고 태어나는 아이들이 늘어가는 상황에서, 혹은 첫째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둘째 아이는 발전된 기술을 통해 탄생시키기로 결정한다.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고 했던가.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에 대해서 만큼은 이 말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분명 꽤 있을 것이다. 빈센트의 부모가 대놓고 자식 차별을 했다고 볼 순 없지만, 차이가 극명한 두 아이를 두고 공평한 사랑을 주는 것 역시 성공하진 못한 듯하다. 하지만 그들을 탓할 수만도 없다.


동생 안톤으로 말할 것 같으면 외모를 포함한 모든 조건이 형인 빈센트보다 훨씬 우수하다. 조금은 설정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안 좋은 조건들만 타고난 첫째 빈센트와, 좋은 자질들을 모두 갖춘 막내 안톤. 하물며 짐승도 생존 능력이 떨어지는 새끼는 버리고 가는 법이다. 냉정하지만 이 둘을 두고 똑같은 사랑을 베풀 부모가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러나 부모의 은은한 차별이 유일한 문제는 아니다. 각 개인의 유전적 우월성이나 열등함에 따라 취업 문의 폭 마저 달라진다. 그리고 비극적 이게도 우주 덕후인 주인공 빈센트는 오직 엘리트 계급만이 입사할 수 있는 우주항공사 ‘가타가’에서 일하기를 간절히 꿈꾼다.


다른 좋은 조건은 하나도 갖추지 못했으면서도 열정과 학습 능력만큼은 빼어난 우리의 빈센트는 계급 사회의 냉대와 무시 속에서도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기 위해 부단히 애쓴다. 이러한 과정에서 엘리트 계급의 신분을 돈을 주고 사는 ‘빌린 사다리’라 불리는 불법적인 일까지도 벌인다.


신분을 빌린 엘리트 계급 제롬의 신체 조건에 맞추기 위해 키를 늘리는 수술을 받은 빈센트


신분 세탁을 위한 모든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마치고, 마침내 가타카에 입성한 빈센트. 열등한 유전자를 보유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수한 능력을 인정받아 그는 곧 토성의 위성인 타이탄으로의 비행을 떠날 예정이다. 그러나 우주로의 출발이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 ‘가타카’ 내부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그 현장에는 열성인자, 즉 부적격자(invlaid)의 흔적이 발견된다.



• 극복할 수 있을까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에서 등장인물들은 적격(valid)과 부적격(invalid)을 기준으로 온갖 차별적이고 편견 어린 언행들을 일삼는다. 그런 폭력적인 모습들이 타고난 조건을 가지고 제한하고 재단하는 우리의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동물들도 더 약한 개체를 괴롭히고 공격하기 마련이라지만, 짐승과는 다르다며 일정 선을 긋곤 하던 인간이 상대적 강자와 약자를 구분하는데 목매는 모습이 썩 아름답지만은 않다.


영화 ‘가타카의 결말은 나름 해피 엔딩에 가까워 보인다. 영화를 감상하는 내내 주인공 빈센트를 응원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씁쓸해졌다. 꼭 저렇게까지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싶어서.



‘공평’이나 ‘공정’이라는 단어를 언급할 때, 많은 사람들이 단순하게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개인의 타고난 생득 조건이나 그로 인한 삶의 맥락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똑같은 출발선, 그거면 되지 않느냐고 묻는 것이다. 충분히 노력하면, 네가 능력만 있다면 불가능할 것은 없다면서 말이다.


‘가타카’의 배경은 디스토피아적 일지 모르나 그 전개 자체는 무척이나 희망적이고 고무적이다. 결국 극복하지 못할 건 아무것도 없다는 메시지가 영화 전체를 아우른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개인이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면 된다는 이 가슴 뭉클한 메시지는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기엔 어쩐지 부족한 느낌이다.


모두에게 공평한 듯 보이는 하루 24시간 마저 실제론 같지 않다. 그 24시간을 성인인 내가 오로지 내 한 몸 건사하는 데만 집중하고 있을 때, 아직은 보살핌이 필요한 어떤 청소년은 원치 않는 가장의 삶을 살며 자기 스스로는 전혀 돌보지 못하고 있을지 모른다.


누군가는 의식조차 않고 오르는 계단도 어떤 이에게는 일상의 도전이며, 누군가는 있는 그대로 인정을 받을 때, 어떤 이들은 성별이나 인종으로 인해 당연한 기회마저 제한당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쉽게도 이야기한다. 노력해서 안 될 건 없다고. 여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잔인하기 짝이 없다.


애초에 출발선이 똑같아도 될까 말까이다. 그러나 이제는 동일한 출발선마저도 점점 더 보기 힘들어지고 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배려 차원으로 만들어진 몇 안 되는 제도들 마저 없애 버리고, 오로지 ‘능력’으로만 경쟁하자는 목소리도 심심찮게 들린다. 그것이 지금의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영화 ‘가타카’가 남긴 메시지를 긍정한다. 간절히 원해서 그에 합당한 노력을 들인다면 극복하지 못할 건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개인이 각자의 욕구에 따라 필요한, 그러나 타고난 조건에 따라 그 양과 질에 차등이 발생하는 노력을 들이라고 등 떠밀기 전에 한 번쯤은 생각해 볼 일이다. 못 넘을 산은 없다며 허울 좋은 말을 방패 삼아 개인의 역량과 노력만 탓하는 건 결국 또 다른 좌절만을 안겨 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극복해야 할 대상은 결국 차별 그 자체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지극히 이상적인 이야기이다. 하지만 인류애도 없는 주제에 낙천적인 나는 간절히 믿고 싶다. 결국 정의로운 사람들이 승리할 것이며, 언젠가는 진정한 평등에 좀 더 가까워진 세상이 우리에게 찾아올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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