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이 정해져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
한 치의 양심의 가책 없이 하는 말이지만 인생을 제법 열심히 사는 편이라고 자부한다. 가능한 한 삼시 세끼를 챙기려 하고, 평일 근무가 끝나고 나면 제법 늦은 시간이지만 꼬박꼬박 헬스장에서 50분가량 운동을 한다. 매일매일 하지는 못 하더라도 틈 날 때마다 짧게나마 영어 공부와 글쓰기도 하려고 노력한다. 취미 생활 역시 빠뜨릴 수 없다. 영화관은 적어도 한 달에 두 번은 가고, 남들은 볼 것 없어서 화면만 올렸다 내렸다 하는 ott도 일주일에 두 시간 이상은 본다. 도저히 집에 붙박여서 볼 시간이 안 나면 헬스장의 트레드밀 위에서 시청한다. 내게 있어 영화보다 중요한 독서도 잊어선 안 된다. 책은 하루 평균 이삼십 분 정도 읽는데, 평일에 주로 독서를 하는 장소는 대중교통 안이다. 물론 이는 나의 출퇴근 평균과는 차이가 있어 지옥철을 피할 수 있는 덕분이다. 그리고 잠들기 직전과 주말 오전에 좀 더 밀도 있는 독서가 이루어진다.
그렇다고 이 모든 것을 하기 위해 인간관계가 박살 난 건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누군가를 만나려고 한다. 대신 귀가 시간은 밤 10시를 넘기는 법이 거의 없다. 꽤나 빽빽하게 생활을 하고 있는 편인 만큼 포기해야 하는 것들도 생긴다. 주말 낮잠이라든가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며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시간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렇다고 핸드폰과 함께 노닥거리는 시간이 결코 적은 건 아니다. 집중력이 아주 좋진 못해 공부하거나 책을 읽다가 몇 번씩, 그리고 직장에서 짬이 날 때마다 인터넷을 들락날락거리고, 머리를 말리고 로션을 바를 때면 유튜브를 시청하기도 한다. 대단하고 거대한 목표를 위해 달리는 건 아니자만 어쨌든 남들이 보기에 여유로운 생활 패턴은 아닐 것 같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태어난 것이 못내 억울해서, 그렇기 때문에 어차피 살아가야만 하는 인생에 최선을 다 하기 위해서라고 하겠다. 하지만 이런 마음이다가도 문득 회의감이 몰려온다. 그래 봤자 어차피 언젠가는 죽을 운명이기 때문이다.
졸업을 앞두고 다 함께 파리 여행을 떠나게 된, 에이브러햄 고등학교의 학생들. 알렉스 역시 친구들과의 기념 여행에 들뜬 채로 비행기에 오르지만 그런 기분도 잠시, 이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체의 결함으로 인해 비행기가 폭발하고 승객과 승무원 전원이 사망한다. 아니, 그런 줄 알고 정신을 차린 그는 아직 비행기가 이륙 전임을 깨닫는다.
방금 본 장면들이 단순한 꿈이 아님을 직감한 알렉스는 비행기가 폭발해 모두 죽을 것이라며 당장 내려야 한다고 외치며 난동을 피우고, 그 과정에서 그와 실랑이를 벌이거나 걱정했던 친구들, 그리고 루튼 교사는 결국 비행기에서 내린다. 그리고 비행기가 이륙하고 얼마 뒤 정말로 그가 말했던 것처럼 폭발 사고가 발생하고, 기내에 있던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한다.
그날 이후 알렉스가 모두를 살리지 못한 데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와중에 그를 따라 내려 목숨을 건진 이들은 마치 그가 죽음을 불러오기라도 한 듯 그를 피해 다닌다. 심지어 FBI는 알렉스가 테러를 일으켰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그를 감시한다. 여기서 비극이 끝났다면 차라리 다행이었을 것을. 비행기에서 내려 사로를 면한 이들은 얼마 뒤 알렉스의 환영 속에서 죽은 순서대로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기 시작하고, 곧 그의 차례가 다가온다.
개인적으로 호러물의 팬이다. 어렸을 적 굉장한 쫄보였던 데다 상상력이 기가 막혔던 탓에 공포 영화의 포스터를 보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을 온갖 무서운 이미지로 가득 채워 스스로를 고문하곤 했다. 그러나 나 못지않게 겁쟁이였던 남동생이 각성(?)을 해 공포 영화의 마나아가 된 이후 경쟁심이 생겨 따라서 공포 영화를 보기 시작하다 마찬가지로 호러물의 팬이 되었다. 아직까지 나 자신도 내가 왜 이렇게까지 공포 영화를 좋아하는지 모른다. 굳이 말하자면 스릴러 영화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긴장감에 대한 욕구를 진하게 충족시켜 주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다 보니 내가 느끼기에 평균보다는 자주 공포 영화를 보게 됐고, 덕분에 공포를 자아내는 요소가 귀신이든, 살인마이든, 악마이든 하위 장르와 상관없이 어느 정도 내성이 생겨 웬만해서는 큰 감흥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 만큼 예전 언젠가 한 영화 채널에서 아주 잠깐 보다가 겁이 나서 채널을 돌리게 만들었던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시리즈 역시 이제는 충분히 볼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렇게 ott에 새로 올라온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1’을 감상하기 시작했고, 대략 절반쯤 보았을 때 감상을 포기해야 하나 고민했다. ‘컨저링’ 시리즈도, ‘스크림’이나 ‘할로윈’ 시리즈도 모두 괜찮았던 나였다. 잔인함의 정도로 따지자면 ‘파이널 데스티네이션’이 ‘쏘우’나 드라마 ‘한니발’보다 딱히 더 심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시청을 멈추고 싶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그동안 보아온 공포 영화들과 달리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시리즈가 다루는 공포는 나와 분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시리즈가 다루는 공포란 다름 아닌 죽음 그 자체이다.
돈이 많은 사람도, 권력을 움켜쥔 사람도, 신체적으로 건강하고 육체적 힘이 넘치는 사람도 언젠간 죽는다. 인간뿐 아니라 다른 모든 유기체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고, 이를 뛰어넘으려 시도했던 모두가 예외 없이 실패했다. 아무리 긍정적인 사람일지라도 하다 못해 질풍노도의 사춘기 때라도 언젠간 죽는다는 사실에 한 번쯤 두려움을 느껴 봤을 것이다. 타고나길 생각이 많고 철학적인 사람들은 이 정해진 운명으로 인해 더 자주 염세주의적인 감상에 빠져든다. 나 또한 다르지 않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 때문에 ‘파이널 데스티네이션’이 유독 더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처럼 끔찍한 방식은 아닐지라도 나 또한 언젠간 나의 소멸을 맞이하게 될 테니까.
사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선 이미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시리즈의 1편은 물론 2, 3편을 지나 이제 4편의 중간 정도 시청을 마친 상태이다. 그동안 생긴 공포 영화에 대한 내성이 결국 제 힘을 발휘한 것이다. 게다가 애초에 내가 겁먹게 했던 죽음에 대한 철학적인 메시지는 시리지의 숫자가 커질수록 자극적인 연출을 통한 원초적인 공포에 주객전도 되어 힘을 잃고 피로감만 남는다. 지금과는 많이 다른 2000년대 초의 여성혐오적인 요소들이 주는 찝찝함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개인적으로는 내 삶에 최대한 열과 성을 다하고 싶은 사람이기에,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무기력한 운명론적 메시지에 반감이 들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영화가 주는 공포가 빛을 잃었다. 아마 어디 가서 공포 마니아라고 떠들고 다니고 싶은 마음만 아니었다면 시리즈 전 편을 모두 보겠다는,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의무감 따위 들지 않았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시리즈 중 1편만 추천한다. 1편만으로는 아무래도 아쉽다면 딱 2편까지만 보시길.)
‘파이널 데스티네이션’이라는 영화가 주는 공포를 극복했다고 해서, 나 또한 이 세상을 떠난 모든 이들처럼 언젠간 죽는다는 공포까지는 극복하진 못했고, 앞으로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저 가능한 한 오래 시간 이 사실을 망각하고, 다른 생각들로 죽음의 존재를 지워야 할 뿐이다. 중요한 건 어쨌든 지금 나는 살아 있고, 여전히 허락된 이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는 사실이다. 대단한 일을 하지는 않더라도 내게 있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나 자신이 좋아하는 일들로 하루하루를 채워나갈 것이다. 부디 내게 허락된 시간이 적어도 남들만큼만 길기를 바라면서.
사진 출처 : IMDB
https://m.imdb.com/title/tt0195714/?ref_=tt_mv_des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