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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Dec 29. 2023

[더 메들러] 쉽게 정의할 수 없는 관계, 모녀

애증이라는 말로는 부족해






인터넷 서핑을 하던 중 아주 기가 막힌 표현을 발견했다. 엄마 없인 못 살지만 엄마랑은 못 살아요. 왜 이런 말이 나오게 됐는지 충분히 이해 가능하다. 아마 평균적인 (정상적인 X) 모녀 관계에 속한 딸들이라면 비슷한 마음일 것이다. 분명 평균값에 들어가는 딸들은 본인의 몸을 찢어 나를 낳아준 엄마를 사랑한다. 그리고 이런 딸들에게 있어 평균값에 해당하는 엄마라는 존재보다 더 무조건적으로 베풀어 주기만 하는 존재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의 무한하다시피 아낌없이 퍼주는 딱 그만큼, 엄마들은 자신의 위대한 창조물 중 하나인 본인의 아이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기분 탓일까. 이러한 경향은 딸에게 좀 더 강하게 나타난다. 같은 여자이기에 편해서일 수도 있고, 딸이 여자로서 엄마인 자신의 과거와 비슷한 상황을 통과하는 것처럼 느껴져서일 수도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한때는 엄마가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따르곤 하던 어린 딸들은 어느새 머리가 크고 이러한 엄마를 성가셔 하기 시작한다. 아마 본인의 엄마에게 ‘내가 알아서 할게’라는 말을 안 해 본 딸이 드물 것이다. 딸 입장에선 나도 다 생각이 있는데 엄마는 왜 이리 간섭을 못 해 안달일까 싶고, 엄마 입장에선 딸이 본인과 같은 실수를 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엄마 때문에 숨이 막혀오는 딸, 점점 멀어져 가는 딸에게 서운한 엄마. 어떤 면에선 지독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이런 모녀 관계는 세대 차이라는 강력한 방해 요소로 인해 거리를 좁히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뭐든 좋은 것만 보여주고, 옳은 답만 알려주고 싶은 엄마의 바람과 다짐은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딸에게는 과거의 유물이나 다름없을지 모른다. 덕분에 감정의 골은 쉴 새 없이 깊어지고, 두 번 다시 안 볼 사이처럼 다투다 몇 날 며칠 동안 대화가 중단되기도 한다. 그러다 다시 정신을 차리면 모녀는 자신들도 모르는 새 N극과 S극처럼 서로에게 착 달라붙어 있다.



참견쟁(메들러 meddler) 


남편과의 사별 이후, 딸 로리가 사는 LA로 이사를 온 마니. 그런 마니는 남편의 빈자리로 인한 외로움과 넘치는 시간에서 오는 무료함 때문에 수시로 로리에게 전화를 하고, 음성 메시지를 남기고, 말도 없이 직에 들이닥치기 일쑤이다. 게다가 마니는 눈치도 없이 방송 작가이자 얼마 전 남자 친구와 헤어지기까지 한 로리에게 민감한 주제들을 쏟아낸다. 결국 인내심에 한계를 느낀 로리는 마니에게 선을 지켜 달라고 요구한다.


식사 중인 마니와 로리


말로는 알겠다고 하고 로리의 집을 뛰쳐나왔건만. 마니는 딸 없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좋을지 알 수 없다. 게다가 로리는 드라마 촬영을 위해 멀리 떠난 상황. 마니는 병원에 봉사활동을 다니는 한편, 따뜻한 마음씨와 얼마간의 참견쟁이 기질로 로리의 친구 질리언의 결혼식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고, 애플 스토어 직원 프레디의 대학 생활까지 돕는다. 심지어는 우연히 영화 세트장에 끼어들었다가 촬영에 참여하기에 이른다.


지퍼(왼쪽)와 프레디(오른쪽)


이후 마니는 은퇴한 경찰관 지퍼와 썸을 타기 시작하고, 남편의 기일을 맞이해 그의 형제들도 만난다. 로리 없이 어떻게 시간을 보내나 우려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마니의 하루하루는 정신없이 흐른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항상 자신을 애타게만 했던 로리에게서 음성 메시지가 무려 세 통이나 와 있던 것. 로리의 메시지를 하나하나 들으며 마니는 미소 짓는다.



세상에 존재하단어로도 부족


엄마라는 이름에 순식간에 마음이 애틋해짐과 동시에 눈을 질끈 감아 버리고 싶은 기분이 동시에 드는 것은 왜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녀 관계를 제외한 모자, 부녀, 부자 관계를 떠올리면 이런 느낌이 아니다. 이는 사회적 맥락을 무시할 수 없다. 전통적으로 어머니들은 자식을 돌보는 것은 본인들의 의무라고 배워 왔다. 시대가 변하면서 더 이상 어머니들이 가정에만 남지 않게 됐지만 육아란 엄마의 몫이란 인식은 변할 기미가 안 보인다. 물론 본인이 생산해 낸 아이이기에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아버지들은 육아에서 자유롭다. 물론 그동안 가장이라는 짐을 짊어졌기 때문이지만, 어머니들 역시 경제 활동에 뛰어들고 커리어를 유지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마니와 로리


그나마도 딸에 대한 어머니의 입장은 아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에 비해 어딘지 오묘한 위치에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같은 여자이기에 상대적으로 편하다는 것도 가지 이유이다. 어쩐지 아들에게 꺼내기 어려운 말들도 딸에게는 마치 학창 시절 친구와 그랬던 것처럼 미주알고주알 늘어놓기 좋다. 비교적 애교가 많고 애정 표현을 잘하는 아들들에게 ‘딸 같은’ 아들이라고 하는 걸 보아, 어머니의 말을 귀 기울여 주는 것 역시 평균적으론 아들보다는 딸들이 한 수 위가 아닐까 추측한다. 이런 이유로 그 속사정은 어떨지 다 모를지언정 친구 같은 모녀 사이는 보통 긍정적으로 인식된다. 아마 영화 ‘더 메들러’에서 사별한 남편의 빈자리를 매우기 위해 애쓰던 마니가 딸 로리에게 기대했던 관계가 이런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이런 기대가 지나치게 커지면 마찬가지로 영화 속 마니와 로리처럼 딸 쪽에서 기겁하는 사태가 발생할지 모른다.


딸에 대한 어머니의 감정은 모순적이다. 그 모순을 간단히 묘사하면 이러하다. 내 딸이 잘 살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와 너무 다르지는 않은 방식으로. 보통의 어머니들이 이왕이면 자신의 딸이 좋은 대학과 직장에 가서 좋은 남자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자신에게 손주를 안겨주기를 바란다. 이만하면 어머니로서 내가 딸을 잘 키웠구나 싶을 시나리오다. 문제는 딸들 나름대로는 노력을 한다고 하는데 어머니가 기대한 방식에서 어긋날 경우이다. 이 케이스에서 나 또한 자유롭지 못하다. 아마 요즘에는 나와 사정이 비슷한 딸들이 많지 않을까 싶다. 시대 흐름에 따라 각 세대의 지배적인 가치관 역시 차이가 발생한다. 변화의 종류와 그 속도가 엄청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에는 더욱 필연적인 현상이다. 그래서 딸들은 말한다. 엄머처럼 살기 싫다고.


영화 '더 메들러' 속 한 장면


어머니에게 있어 딸은 본인이 못 다 이룬 꿈을 대신 이루어주고, 자신이 누리지 못한 것을 누려야 마땅할 존재인 동시에 질투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딸들에게 있어 어머니는 같은 여자이면서도 자신을 이해해 주지 못해 원망스럽다가도, 가장 힘들 땐 더할 나위 없는 안식처이다. 그동안의 데이터 베이스를 바탕으로 모녀 관계를 표현할 가장 적확한 단어를 꼽으라면 ‘애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충분하지 않다. 모녀 관계는 마치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와 같다. 그리고 실의 가닥 하나하나는 서로 다른 색으로 서로 다른 감정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 모든 실타래가 뒤얽혀 있는 모습을 몇 걸음쯤 떨어져 살펴봤을 때 얼핏 '애증'처럼 보일 뿐이다. 가끔은 모녀 관계가 좀 더 단순했으면 싶지만 어쩌겠는가. 있는 그대로 미워하고 그만큼 또 사랑하는 수밖에.






사진 출처 : IMDB

https://m.imdb.com/title/tt4501454/mediaind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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