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의 나의 꿈은 화가였다. 손가락에 색연필을 처음 잡고부터 줄곧 이어진 꿈이었으니 길진 않은 내 인생에서 가장 오랫동안 품은 꿈이라고 하겠다. 초등학생 시절 동안은 꾸준히 미술 학원에 다녔다. 반에서그림 잘 그리는 애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학생이었던지라 친구들이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를 그려 달라고 하거나, 본인들이 그리다 막힌 부분을 도와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다 무슨 바람이 들었던 것일까. 나는 부모님께 돌연 미술은 취미로만 하겠다고 선언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어린 나이였기에 거의 매일 다니던 학원 자체가 지겨웠던 것도 물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나는 초등학생이긴 했지만 나름 고학년이었기에 입시 준비용 그림을 주로 그렸다. 아마 여기서 재미가 반감 됐으리라. 그리고 또 한 가지. 내가 알고 있던 유명한 화가들 대부분이 죽기 전까지 가난한 생활을 했다는 사실이 나를 무섭게 했다. 그러다 결국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서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어 졌지만 순수미술 대신 디자인 계열에 지원하기로 결심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충분한 돈을 벌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이에 개의치 않을 자신 역시도.
• 요리의 신비가 사라진 건 너 같은 인간 때문이야
스타 셰프 슬로윅이 수석 주방장으로 있는 식당 ‘호손’. 배를 타야만 갈 수 있는 외딴섬에 자리한 이곳은 1,250 달러의 최상급 코스 요리와 서비스를 자랑하며, 하루에 오직 12명의 고객만 받는다. 저명한 음식 비평가, 한때는 잘 나갔지만 과거의 영광을 곱씹으며 사는 영화배우 등. 값비싼 식사비답게 초대된 손님들은 하나 같이 부르주아들이다. 자신의 위치를 뽐내고 허영심을 채우러 온 다른 손님들 사이에서 함께 식사를 하게 된 지극히 평범한 배경의 마고. 마고는 연인인 타일러가 전 여자 친구와 헤어진 이후 그의 부탁으로 호손을 함께 찾았다. 어디까지나. 마고의 기분 탓일까. 예기치 못한 손님인 그의 등장에, 직원인 엘사는 물론 셰프인 슬로윅 마저 언짢은 기색을 보인다.
호손의 수석 주방장 슬로윅(왼쪽)과 그의 계획에 없던 손님 마고
곧 시작된 코스. 슬로윅은 자신에게 명성을 안겨준 닭고기 타고를 내놓는데, 고기와 함께 서빙된 토르티야에는 각각의 손님들을 위한 레이저 이미지가 새겨져 있다. 음식 비평가에게는 그의 리뷰로 인해 폐업한 식당들, 노부부에게는 남편의 외도 장면 등. 마고는 이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만, 그런 그에게 슬로윅은 얘기한다. 당신은 여기 오면 안 됐다고.
그 밖의 슬로윅이 직접 초대한 손님들
다시 시작된 다음 코스는 부주방장이 준비한 요리 ‘난장판’. 슬로윅이 메뉴에 대한 설명을 마치기 무섭게 식당 안은 메뉴의 이름처럼 곧 난장판이 되고, 손님들은 모두 혼란에 빠진다. 다들이 모든 것이 코스 요리를 위한 연극이자 연출일 뿐이라고 애써 믿어 보지만 그들은 오래지 않아 깨닫는다. 오늘 밤 호손에 있는 모두가 죽게 되리라는 것을.
• 예술과 돈, 그 사이에 필수불가결한 한 가지
대상이 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활동 및 그 작품. 다름 아닌 예술의 정의이다. 이런 정의를 이를 업으로 삼는 예술가라는 직업은 여타 직업들과는 다르게 느껴진다. 의사, 교사, 사무직 직원 등. 대부분의 직업은 평균 연봉이 얼마쯤이고, 잘 벌거나 못 벌면 최고 및 최저 얼마까지 대략적인 계산이 나온다. 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이러한 계산에서 벗어날 일은 잘 없다. 하지만 예술가는 다르다. 예술하면 배고픈 직업이라는 소리부터 따라붙기도 한다. 생전에 크게 성공한 이들도 더러 있지만 소수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오죽하면 예술은 돈이 많은 이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자조적인 말까지 있을까. 수익 수준을 예측하기 불가능하고 천차만별이라는 점에서는 자영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자영업자는 대부분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먹고 사용하는 음식 및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러나 예술은 자영업자들이 판매하는 대상에 비해 꾸준한 수요가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예술은 어느 정도의 돈벌이를 예측 및 보장받지 못한다는 점 외에도 또 딜레마를 지니고 있다. 바로 주관성이다. 예술가가 작품을 통해 자신의 가치관과 철학을 담아내고 표현하는 일은 교사가 신념을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의사가 소명의식을 가지고 환자를 치료하는 것과 같지 않다. 사람마다 성격과 취향이 모두 다르듯, 예술가의 개성 역시 전부 다르다. 따라서 누군가의 작품은 대중적으로 사랑받을 수도 있지만, 또 누군가의 방식은 그의 사후에나 인정을 받거나 그마저도 운이 따르지 않는다면 영원히 외면받을 수 있다. 문제는 대부분의 다른 직업들과 마찬가지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소비를 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수입도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현대 사회에서는 천재 예술가가 영원히 익명으로 남은 채 빛을 보지 못할 확률은 줄어들었다. 여러 온라인 플랫폼이 발달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만큼 예술가들이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방법도 늘어났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더 발생한다.
여러 다양한 매체와 플랫폼이 개발된 지금, 그만큼 상업주의와 자본주의 또한 그 어느 때보다도 위상이 높아졌다. 예술 또한 여기서 자유롭기 힘들다. SNS의 등장으로 유능하지만 가난한 예술가의 작품이 운 좋게 고가에 팔리기도 하지만, 작품을 진정으로 음미하고 즐기기보다는 SNS에 자신의 안목이나 부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1880년대에 그려졌을 반 고흐의 작품들은 그의 의사와 관계없이 수많은 상품으로 복제되어 팔리고 있으며, 생전에 그가 겪었을 개인적인 비극은 이 과정에서 되레 낭만화되어 있다. 아무리 좋은 영화일지라도 제작사나 배급사에 따라 상대적으로 손쉬운 성공을 보장받을 수도, 그 존재를 알릴 기회조차 얻지 못하기도 한다.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 영화는 이후 블루레이 등 각종 상품을 쏟아내지만, 이러한 조건 속에서 돈이 되는 영화가 아닌 진지한 주제의 작품이나 익숙지 않은 연출 및 배경을 자랑하는 소자본 영화들은 설 자리를 잃는다. 그마저도 자본이 아닌 시간의 투자조차 허락받지 못한 작품들은 ‘쇼츠’ 영상이나 기념사진으로서만 소비되는 신세이다. 예술가 본인이 스스로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시작된 예술이, 돈의 흐름에 따라 공산품화 되어 가는 것이다. 이 모든 와중에서도 예술가의 의도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거나 존중받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슬로윅과 그의 요리들
이런 의미에서 영화 ‘더 메뉴’는 예술을 예술답지 못하게 하는 상업주의와 소비 방식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자영업자를 언급했지만, 슬로윅과 같은 주방장 또한 예술가라고 볼 수 있다. 요리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뽐내기 급급한 타일러, 그리고 자신의 경제력이나 명성을 과시할 수단으로 최고급 식당인 호손을 찾아온 여러 손님들. 슬로윅은 바로 이런 이들이 요리의 신비가 사라진 건 그들 같은 인간 때문이라고 비난한다. 모르긴 몰라도 호손에서의 사태가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면 이 또한 끔찍하지만 매혹적인 무언가로 상품화가 이어졌으리라. 그렇다면 요리의 순수를 울부짖던 슬로윅의 뜻은 죽어서도 이루지 못하는 모양새가 되었을 것이고.
‘요리’가 들어갈 자리에 좀 더 상위 개념인 ‘예술’을 넣더라도 충분히 의미는 통할 것이다. 예술과 예술가는 과연 상업주의에서 완벽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힘들 것이다. 예술가로 살아가기 위해선 자본과의 적극적인 타협이 필요하다. 혹은 예술가로서의 자유를 위해, 두 번째 직업을 갖는 식으로 또 다른 자유를 포기하든지. 이왕이면 모든 재능 있는 예술가들이 경제적인 문제에 시달리지 않으면서도 오직 본인들의 시선으로만 포착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기를, 그럼으로써 내가 미처 보지 못한 세상으로 나를 안내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는 내일 당장 로또 1등에 당첨되게 해 달라는 말처럼 지나치게 이상적인 이야기일지 모르겠다. 결국 영화 ‘더 메뉴’에서 살아남은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그는 유일하게 음식을 그 자체로서 즐길 수 있던 사람이었다. 부디 현실 세계에서는 내가 바로 그 생존자이길 바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