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인 Sep 22. 2023

[그녀의 조각들] 상실 앞에 주저앉다

그리고 다시 일어서다






나로서는 나를 비롯한 (도덕과 윤리적인 기준에서) 평범한 그 누구도 상처를 입거나 비극을 겪지 않기를 바라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나의 바람일 뿐이다. 본인 스스로가 아무리 노력해도 심장이 뜯기는 듯한 경험은 그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겪게 다. 이는 상대방과의 다툼 때문일 수도 있고, 갑작스러운 불의의 사고일지도 모르며, 자연의 섭리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이별일 수도 있다. 그 종류가 무엇이건 간에 개인의 의지로 피하거나 지연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처럼 가슴 아프거나 분노케 하는 사건의 인과관계라도 분명하다면 차라리 다행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손쉽게 포기하고 잊어버리거나, 썩 긍정적인 방식은 아니지만 원인이 된 상대방을 원망이라도 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 법을 통해 심판하거나, 자신의 비극에 공감하는 이들과 함께 모여 목소리를 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당시의 비극을 애초에 없던 일로 만들어주진 못하지만 적어도 감정적 해소에는 도움이 다. 그러나 이미 비극적인 상황이 더욱 비극적이게도, 이마저도 불가능한 경우도 존재한다. 직접적인 원인도, 원망할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 불행. 이런 상황에서 의연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의 잘못아니에


딸의 탄생을 기다리는 부부 마사와 숀. 마사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품에 안고 싶다는 소망으로 가정 분만을 계획했다. 양수가 터지고 출산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 그러나 마사가 원했던 조산사는 다른 산모의 출산을 도와야 하기에 또 다른 조산사 에바가 대신 찾아온다. 세 사람은 안전한 출산을 위해 노력하지만, 에바는 진통 막바지에 태아의 심박수가 원하는 만큼 올라가지 않는 것을 알아챈다. 이에 에바는 병원에 가야 한다고 말하지만 마사는 집에 남겠다고 한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에바는 최대한 출산을 서두르는 한편, 숀에게는 119를 부를 것을 지시한다. 우여곡절 끝에 아기가 태어나고, 마사가 품에 안은 채 첫 가족사진을 찍은 것도 잠시. 짧은 울음을 끝으로 아기는 숨을 멈춘다. 아기를 잃었음에도 마사의 몸은 출산 이후의 신체 반응들을 그대로 겪는다. 마침내 병원에 의뢰한 아기의 사인을 들으러 가지만, 뚜렷한 원인이 없다는 대답만 돌아온다.


가정 분만을 시도하는 마사, 남편 숀, 그리고 조산사 에바


가족들은 어떻게든 우울의 늪에 빠진 마사를 본인들 나름의 방식으로 돌보려 하지만 그에게서 돌아오는 건 모진 말들 뿐이다. 덕분에 마사와 가족들 사이에 균열이 생기는 와중, 어머니는 마사의 사촌이자 변호사인 수잰의 도움으로 에바를 기소하고, 숀은 외도 끝에 마사의 곁을 떠난다. 결국 다가온 재판일. 증인으로 선 마사는 에바 측 변호사의 반대 심문 끝에 판사에게 휴식을 요청한다. 그 사이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갓 태어난 딸의 모습이 담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가족사진을 인화한다. 아기와 함께 찍은 사진을 확인하며 눈물을 쏟은 끝에 마사는 법정에 돌아와 모두의 앞에서 얘기한다. 에바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그리고 자신의 고통을 다른 이에게 전가할 수는 없다고.



진정한 치유회복관하


준비하던 과제나 프로젝트가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고 해보자. 아마 대부분 그 원인부터 찾으려 할 것이다. 혼자 진행하던 일이라면 앞으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 여럿이 해오던 것이라면 가장 큰 잘못을 저지른 이를 질책하기 위해서일 확률이 높다. 이 과정에서 부정적인 감정이 뒤따를지 모르지만, 적어도 원치 않는 결과에 대한 일종의 마무리는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보다 조금 더 심각하고 큰 사건이라도 마찬가지이다.  이후 고칠 건 고치고, 탓할 사람은 탓한다. 경우에 따라서 처벌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마침내는 실패나 좌절에 따른 감정을 해소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유감스럽게도 모든 결과의 원인이 뚜렷하진 않다. 마치 ‘그녀의 조각들’에서 마사가 겪어야 했던 비극처럼. 마사는 처음에 한때 술과 담배를 즐겼던 숀을 탓하는 한편, 병원에는 아기의 사인을 조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가족들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냉담하게 굴었고, 남들이 별 뜻 없이 던진 말에도 날카롭게 반응했다. 어머니가 사촌 수잰에게 부탁해 에바를 기소했을 때도 말리지 않았다. 딸을 품에 안자마자 은 데 대한 슬픔이 곧 분노로 변했지만 그 분노는 갈 길을 잃고 말았다. 갈 길을 잃은 그의 감정은 그런 식으로 한동안 방황했다.


마사와 어머니


영화 ‘그녀의 조각들’에 대한 평가 중, 마사가 아기를 잃은 후 가족들을 대하는 방식을 비난하는 내용들도 제법 보였다. 개인적으로는 공감하기 힘들다. 마사의 상실감과 고통이 어떠했을지 과연 누가 진정으로 알 수 있을까. 한 개인의 슬픔의 크기와 이에 대처하는 올바른 태도는 타인이 판단할 영역이 아니다. 어머니와 남편 숀 역시 비극을 함께 겪어야 했으며 그들 나름대로 마사의 회복을 도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가장 큰 좌절을 겪은 이는 결국 마사 본인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선 어머니와 숀을 비롯한 나머지 가족들은 마사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자기 자신의 회복을 먼저 신경 썼을 뿐이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서 시작된 수치심 때문이든, 슬픔에 빠져 상대를 돌보지 못하는 배우자로 인한 외로움 때문이든.


'그녀의 조각들' 중 한 장면


경이롭게도 마사는 마침내 자신의 비극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에 이른다. 별다른 원인도 모르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비극을 그 자체로서 받아들인다. 그 이후 망가져 버린 일상들까지도 포용한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회복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바로 이것이 상실을 대하는 가장 이상적이고도 성숙한 태도가 아닐까 싶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마사가 소화해야 했을 감정의 무게가 어떠했을지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문제의 원인과 원망의 대상을 찾아내는 일은, 운이 좋다면 손쉽고 빠른 해결로 이끌어 줄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뚜렷한 답을 찾지 못할 때, 그럼에도 계속 곱씹게 될 때, 더 큰 비극을 마주하게 될지 모른다. 이처럼 유혹적인 방황의 길을 우아하고도 단호하게 비껴간 영화 속 마사의 선택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사진 출처 : IMDB

https://m.imdb.com/title/tt11161474/?ref_=nv_sr_srsg_3

작가의 이전글 [브루스 올마이티] 뻔하지만 중요한 한 가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