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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Feb 09. 2024

[굿 라이어] 뛰는 자 위에 나는 자

거짓말을 속이는 또 다른 거짓말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곤 한다. 제아무리 거짓말을 지양하는 이라 할지라도 단 한 번도 거짓말을 입에 담지 않았을 리 없다. 직장 상사나 마음에 드는 상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눈앞에 닥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조금 더 멀리 가자면 누군가에게서 원하는 것을 빼앗기 위해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때로는 본인의 심리적 안정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속이기도 한다. 정직이 미덕이며, 조금 괴롭고 힘들더라도 진실을 마주하고 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나 역시도 가끔 거짓말을 한다.


미리 변명을 해보자면 나의 거짓말은 대부분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지 않기 위해 하는 것들이다. 예를 하나 들어 보겠다. 예전에 회사를 다니던 시절, 동료가 막 화장실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도 들어가려는 데 심상치 않은 냄새가 풍겨 왔다. 차마 들어갈 수 없었지만 내가 그대로 화장실에서 뒤돌아 선다면 그 동료의 기분은 어떻겠는가. 그래서 나는 나름의 기지를 발휘하며 이렇게 말했다. “맞다, 생리대 안 가져왔다.” 놀랍지 않을지 모르지만 여기에도 아주 약간의 각색, 혹은 거짓말이 섞여 있다.


사람들은 왜 거짓말을 하는 걸까? 그 어떤 이유를 가져다 대든 거짓말의 목적은 누군가를 속이는 데 있다.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가 거짓말 발화자 본인의 이득이든, 아니면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든 결론은 동일하다. 모든 거짓말은 상대의 생각을 진실이 아닌 다른 쪽으로 유도하고 이를 믿게 만들기 위해 시작된다. 이렇게 적고 보니 거짓말이란 참으로 부도덕하고 부정한 일인 것 같지만, 개인적으로는 맥락을 고려해 줌직한 거짓말도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불행을 안겨다 준 이에게 복수하기 위한 거짓말 같은 것 말이다.



• 베티, 마치 한 송이 백합 같던 그 여자


영국에서 거주 중인 노년의 신사 로이. 실은 그는 독일 출신으로 본명은 한스이다. 젊은 시절 전범을 체포하기 위해 독일에 찾아온 영국 요원 로이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고, 그의 통역 일을 돕던 한스는 그대로 로이의 신분을 훔쳐 영국에서 살기 시작했다. 새로운 신분과 함께 정직하고 바르게 살아가면 좋았겠지만, 거짓 신분으로 로이의 부모님의 재산을 물려받은 것을 시작으로 그는 노년 시기까지 부유한 투자자들을 꾀어내어 투자금을 가로채는 식으로 사기를 벌이며 살아간다. 그런 그의 눈에 띈 이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노년의 숙녀 베티. 그는 옥스퍼드 교수 출신으로 상당한 재산을 보유하고 있음은 물론, 평생 공부만 해 세상물정을 모르는지 순진하기 짝이 없다. 로이는 그런 베티를 대상으로 사기를 쳐 재산을 가로챌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다정한 연인인 척, 사별한 남편의 빈자리를 채워줄 동반자인 척 베티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애쓴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베티와 로이


결국 두 사람은 동거하기에 이르지만, 베티의 손자인 스티븐이 계속해서 훼방을 놓는다. 그러던 어느 날 로이에 대한 의심의 끈을 놓지 않고 뒷조사를 해오던 스티븐은 베티에게 로이의 진짜 정체를 폭로한다.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려는 찰나, 순진한 것도 모자라 로이에게 푹 빠져 버린 베티는 오히려 로이의 편을 들며 그와 공동 계좌를 계설 하겠다는 약속까지 한다. 그렇게 순조롭게 베티의 재산을 가로채고, 아들을 만나러 간다는 거짓말과 함께 집에서 빠져나온 로이. 이제 50억 원 가까이 되는 베티의 재산으로 여유로운 말년을 보내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건만, 로이는 그들의 공동 계좌에서 돈을 출금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키패드가 사라진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키패드를 찾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간 로이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게다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베티를 발견한다. 그리고 완전히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과 베티의 진짜 정체를 마주하게 된다.


베티와 공동 계좌를 개설한 후, 아들을 만나겠다는 거짓말로 떠나려는 로이




• 거짓말의 맥락


영화 ‘굿 라이어’는 제목에서부터 관객들이 무엇을 가장 많이 듣게 될지 힌트를 주고 있다. 바로 거짓말이다. 나 또한 영화를 보는 내내 이 힌트를 의식했다. 하지만 이야기의 후반부에야 깨달은 사실은 이 영화가 단순히 거짓말을 다루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로 시작해서 거짓말로 끝난다는 이었다. 이는 영화 제목을 검색하면 나오는 ‘잘못된’ 시놉시스 덕분이기도 하다. 온라인상에 나온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러하다. - 천부적인 노년의 사기꾼 로이는 데이트 사이트에서 만난 부유한 미망인 베티에게 접근하고, 둘의 관계는 빠르게 진전된다. 로이를 철석같이 믿은 베티는 로이의 제안대로 공동 계좌를 계설 하고, 두 사람은 베를린으로 여행을 떠나지만, 베티는 그곳에서 로이의 정체를 알게 되고 로이에게 복수를 감행한다.


영화 속 베티


누가 이런 줄거리를 흘렸는지 모르겠다. 실제 영화의 이야기와 순서도 다르고, 내용마저 틀렸다. 거짓말에 관한 이야기인 만큼 담당자도 영화에 대해 거짓말을 한 것일까? 설령 그랬다 하더라도 원망하지 않는다. 덕분에 영화의 재미가 배가 되었으니까. 결론적으로 영화의 시놉시스처럼 베티가 로이에게 복수를 하는 것은 맞지만, 단순히 그의 사기 행각에 대한 복수는 아니었다. 얼핏 클리셰에 충실한 듯 느껴지는 와중에도 베티의 복수는 분명 통쾌하고, 심지어는 처절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베티의 복수를 온몸으로 받아낸 로이에게는 일말의 동정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제법 잔인한 복수 방식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앞서 언급한 거짓말의 ‘맥락’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영화 속 로이


비록 영화가 거짓말로 시작해서 거짓말로 끝나지만, 궁극적으로는 거짓말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 영화의 주제를 구구절절 표현하자면 ‘남의 눈에 눈물 내면 제 눈에는 피눈물이 난다’이고,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업보’라고 할 수 있다. 나 혼자만의 착각일까. 누군가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잘못을 저지르고도 유유히 빠져나가거나 도리어 떵떵거리며 사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이런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나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럴 때면 이 세상에 정의가 있기는 한 건가 싶어 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음속 한편으로는 간절히 믿고 있다. 남을 불행에 빠뜨린 이들이 죽는 그 순간까지 당당하고 행복할 수는 없다고. 그들에게 있어 베티와 같은 존재가 언젠가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라고. 그리고 다짐하게 된다. 적어도 나는 누군가의 로이만은 되지 말아야겠다고 말이다.






사진 출처 : IMDB

https://m.imdb.com/title/tt556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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