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습관처럼 하는 말들이 있다. ‘인생은 살아가는 것 자체로 난이도가 높다’ 그리고 ‘인생은 원래 재미없다’가 그것이다. 먹고 자고 싸고, 본능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와중에 돈을 벌기 위해 일하고 상사의 비위를 맞추고, 잊을만하면 인간관계에서 크고 작은 갈등이 발생한다. 한때 유행하던 표현을 빌려 보자면 승용차에서 명품백을 붙들고 우느냐, 대중교통 안에서 에코백을 끌어안고 우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사람 사는 모습의 큰 틀 자체는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반복적이고 지난한 매일매일을 버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은 이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일들을, 스스로를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는 일들로 일상을 채운다. 나의 경우 일과 수면 사이를 책과 영화, 헬스, 글과 그림으로 채우고 있다. 사실 이 틈을 메우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기 때문에 마음 같아선 쇼트슬리퍼로 다시 태어나고 싶지만 내 몸은 12시가 다가오면 잠을 요구한다. 앞선 예시들로 시간을 보낸다면, 나의 돈은 약간의 투자와 맛있는 것, 그리고 귀여운 물건 등에 흘러간다. 이처럼 시간과 금전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나면 그래도 살만 하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똑같은 시간과 금전을 갖추고 있다고 해서 심적인 여유도 동일하란 법은 없다. 나의 경우 출퇴근 때 어떻게든 짬을 내서 책을 읽고 있지만, 비슷한 시간에 출퇴근을 하는 누군가는 독서에 마음이 동하기 힘들 수 있다. 쥐어짜 내자면 책 읽을 시간 5분을 못 내는 것은 아니지만 독서라고 하면 왠지 작정을 하고 해야 하는 일처럼 느껴져 부담스러워지는 것이다. 내가 트레드밀 위에서 달릴 때나, 머리 말리는 시간을 책임지는 ott 영화 보기 또한 누군가에게는 독서만큼이나 부담스러울 수 있다.
기나긴 하루 끝에 소박하다 못해 보잘것없이 남아 있는 여유 시간, 덕분에 더욱 부족해지는 심적인 여유. 이는 현대인의 고질적인 문제이다. 특히나 한국은 OECD 국가 중 평균을 훨씬 웃도는 근무 시간을 자랑하기에 이러한 부작용을 더욱 처절히 겪는다. 그뿐이랴. 이렇게 여유가 부족한 와중에 인생에서 깨야 할 퀘스트는, 만족시켜야 할 기준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면 이렇게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빠듯한 이들은 결국 어디로 빠져들게 될까.
• 손을 내어준 순간 시작된 공포
엄마의 사망 이후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미아. 그러던 어느 날 미아와 친구 제이드는 함께 파티에 가고, 그 파티에서 실제 손을 박제해 심령이 깃든 손 조각상을 보게 된다. 그 손을 잡은 채 나에게 얘기하라고, 내 안으로 들어오라고 (Talk to me. I let you in) 얘기하면 심령에 빙의된다. 주의할 점은 빙의 시간은 90초를 넘기지 말 것. 만약 90초가 넘어가면 영혼이 떠나지 않고 몸에 남게 된다. 그동안 우울증 때문에 자존감이 낮아졌던 미아는 자신이 먼저 해보겠다고 나서고, 영혼의 방해로 결국 결국 제한 시간 90초를 넘긴다. 하지만 간신히 손을 놓았을 때 그는 평소 상태로 돌아온 듯 보인다.
조각상의 손을 잡고 심령에 빙의가 된 미아
이후 제이드의 집에서 또 한 번 파티가 열리고, 친구들은 이번에도 손 조각상을 꺼내 마치 놀이처럼 빙의 의식을 이어 간다. 이를 지켜보던 제이드의 동생 라일리는 자신도 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지만, 라일리는 극구 반대한다. 제이드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결국 미아를 설득해 빙의를 하게 된 라일리. 이윽고 빙의된 라일리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은 미아는 다름 아닌 엄마의 영혼이 라일리에게 들어갔다고 믿는다. 그립던 엄마와 재회했다는 생각에 미아는 친구들의 만류에도 라일리에게 매달린다. 다행히 라일리는 90초를 넘기 전에 빙의에서 벗어나지만 그날 이후 상태가 점점 나빠지더니 급기야 병원에 입원한다. 이로 인해 미아는 제이드를 비롯한 그의 가족들의 비난을 받게 되고, 더욱 외로움과 우울함에 빠져든다. 설상가상으로 어느 순간부터 불길한 환영까지 보기 시작한다.
빙의가 시작된 라일리
• 챙깁시다, 정신 건강
영화 ‘톡 투 미’에서 십 대들이 끊임없이 영혼에 빙의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리기란 어렵지 않다. 바로 마약이다. 마약을 해 본 적도, 주변에 해 본 사람도 없지만 마약을 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손 조각을 잡은 이후 이성을 잃고, 감정이 극대화되며, 또다시 찾는 모습이나 또래 친구들에게 쿨해 보이고 싶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세 보이고 싶어서 하겠다고 나서는 장면, 그리고 무엇보다 빙의가 시작되고 눈이 풀리는 모습 등이 마약을 하는 십 대들의 모습과 자연스레 겹친다. 이후 주인공 미아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만 엔딩 또한 그렇다.
분명 마약은 강력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겠)지만, 비교적 덜 심각한 것들 중에서도 중독을 유발하는 것들이 많다. SNS나 영상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현재, 가장 먼저 떠올릴만한 것은 바로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나 짧은 길이의 영상인 쇼츠, 릴스 등일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기획 단계부터 사람들을 가능한 한 오래 붙잡아 두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SNS의 경우 화면을 새로고침 할 때마다 새로운 게시글들을 보여 준다. 쇼츠나 릴스의 경우 일단 한 영상을 클릭하고 나면 굳이 새롭게 검색을 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다음 영상을 재생한다. 그리고 이러한 플랫폼들의 제일가는 특기는 알고리즘이다. 어느 서비스를 이용하든 우리는 이내 비슷한 다른 콘텐츠를 추천받게 된다.
빙의 이후 환영에 시달리는 미아
안 그래도 살기 팍팍한 세상, 최소한의 시간과 노력으로 최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뭐 그리 나쁘겠는가. 하지만 모든 일이 그러하듯 정도의 문제이다. 알고리즘의 생리와 이용자들의 패턴을 파악한 창작자들 더 많은 관심을 끌기 위해 경쟁적으로 더욱 자극적인 콘텐츠를 생산해 내기 시작했고, 이용자들은 더욱더 이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들어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도파민’에 중독되고, 자연스레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찾게 된다. 덕분에 사람들은 텍스트는 물론 일정 재생 시간 이상의 영상물조차 견디기 힘들어지며, 깊은 사유나 여유 있는 독서와는 멀어진다. 그렇게 악순환은 이어진다.
그렇다고 SNS나 쇼츠의 이용자들이 죄책감이나 자괴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진정한 문제는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설계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노동 강도나 업무 시간은 만만치 않은 와중에, 지쳐 있는 이들이 빠져들기 쉬운 SNS와 쇼츠라는 수단을 통해 소비를 부추겨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해 깊이 탐구할 수 있는 심적 시간적 여유를 모두 빼앗는다. 물론 일시적이고 짜릿한 즐거움을 누리지 말란 법은 없다. 하지만 이러한 즐거움은 핸드폰 화면을 끄는 동시에 끝난다. 강렬한 자극에서 일상으로 돌아온 순간 더 큰 갈증이 찾아올 것은 자명하다. 6분의 독서만으로 스트레스 68%가 감소한다고 한다. 그러니 비록 큰 맘을 먹어야 할지라도 한 번쯤 인스타나 유튜브 대신 책을 펼쳐 보면 어떨까. 결코 중독될 일이 없는 것은 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