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엄태형 Sep 19. 2017

기술 습득의 덫

대한민국 개발자로 산다는 것

인생의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다.
- 신영복


개발자의 책상 위를 본 적이 있는가?

 가장 눈에 잘 띄는 상석에 놓여진 모니터. 한 대가 외로울까봐 2대를 나란히 진열한다. 그리고 컴퓨터와 대화하는 키보드. 요즘 많이 사용하되는 기계식 키보드는 키가 눌리는 키감에 따라 흑, 청, 갈, 적축으로 나뉘는데 '따따따딱'하는 소리와 눌리는 손맛에 매료되어 컴퓨터를 사면 딸려 오는 심심한 키보드를 대체한다. 마우스는 되도록 자유로운 유영이 가능한 무선으로 고집하고, 집중도를 높이기 위한 이어폰까지 꽂고 나면 얼추 일을 시작할 기본적인 세팅은 마무리한 셈이다.


책상의 다른 한켠을 본다. 하루가 다르게 켜켜이 쌓여 가는 전문서적들.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습득을 목적으로 사놓은 책들이 책상 한쪽을 가득 메우고 있다. 유독  기술의 부침이 심한 IT 업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개발자들은 새로 익혀야 할 것들이 많다.  어떻게 보면  학습은 개발자들의 직업 생명주기가 끝나는 날까지 따라오는 숙명과도 같은 존재다.


나도 기회가 되면 콘퍼런스나 교육에 참석한다. 얼마 전에도 최신 IT기술을 소개하고  새로운 프로그래밍 언어들의 장점과 활용사례 등을 발표하는 콘퍼런스에 다녀왔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참석했는지, 꽤 큰 강당에는 좌석에 앉지 못하고 서서 듣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오후 1시에 시작된 콘퍼런스가 저녁 7시까지 진행되었으니, 어지간한의 열의가 아니라면 오랜 시간을 할애해가며 오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콘퍼런스를 다녀오고 한동안은 정말로 유익한 시간을 보내고  왔다는 뿌듯한 마음으로 가득 찼던 것 같다. 마치 내가 남들보다 앞서가는 것 같고, 개발자로서 최신 트렌드를 따라가며 뒤처지지 않고 있다는 마음의 위안을 받았다. 그리고 한편으론 남들보다 발 빠르게 움직여야만 개발자로서 인정받고 이 바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믿음이 더욱 굳어졌다. 결국, 그 마음이 나를 다급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나는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바쁜 회사생활 중에도 시간을 쪼개가며 끊임없이 책을 보며 독학하고 인터넷을 통해 새로운 기술을 익혔다. 개발자로서 성공하고 싶다는 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지속해서 배움에 매달린 것이다. 그 당시 나에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자체가 불안이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슴 한편은 여전히 허전했다. 살아가면서 너무 단편적인 것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구심이 들기도 했고, 뚜렷한 목적 없이 무작정 배우기만 하는 내 행동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 보니 삶의 만족도 역시 떨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배워야 할 것들은 너무나 많고 새로운 기술은 또 나올 텐데 모든 것을 소화해낼 자신감도 없어졌다. 나는 그렇게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실제 주위를 둘러보면 왜 배우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다른 사람을 따라 하기 바쁘고,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IT 기술을 무작정 쫓아가며 뒤처질까 불안해하는 개발자들이 의외로 많다. 이들은 배움을 마치 유행처럼 따르며,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배우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다.


책상 한면을 가득 채운 프로그래밍 책들은
배워야 한다는 다급한 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더는 실력이 늘지 않아 정체돼 버린 어학공부, 정작 자기는 소외되고 없는 자기계발, 최신 트렌드만 좇는 IT 기술 습득, 막상 부자가 되어서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재테크. 책상 한쪽 켠 만 가득 채운 프로그래밍 책들은 배워야 한다는 다급한 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모습은 배움이라는 강박에 시달리는  개발자들의 슬픈 단면을 보고 있는 것 같아 가슴 한쪽이 짠해지기도 하다. 특히나  배워야 할 게 너무 많은 세상을 살아가는 개발자들에게  배운다는 것이 단지 무언가 배웠다는 자기만족으로만 그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배움이 단지 심리적 위안을 얻거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목적에 한정돼서는 안 될 테니 말이다.


배움 강박증에 시달리는 현재 모습이 학창시절과 유사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는 학창시절부터 빠진 배움의 늪에서 아직까지  허우적대고 있는 건  아닐까? 실제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심한 압박감에 시달렸고, 마음이  편하지 않다. 이러한 심리 상태를 《굿바이 게으름》의 저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문요한 씨는 "불안에 대한 가장 흔한 증상은 과잉행동"이라고  진단한다. 즉, 현대의  바쁘고 부지런한 게으름뱅이들은 쉬는 것과 멈추는 것을 극도로 기피하며 끊임없이 계획을 세우고 행동한다. 그들은 반드시 뭐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린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을 돌보지 않고 힘든 상황으로 지속해서 몰고 간다면  결국엔 순간적으로 배터리가 방전하는 소진 상태, 급격한 무기력 상태인 번아웃 증후군이 찾아올 수 있음을 경고한다.  또한 이 상태를 계속해서 돌보지 않고 무시할 경우 결국에는 오도가도 못하는 삶의 교착상태(deadlock)로 치닫게 되는 원인이 될 수 있음에 유념해야 한다.


실제 맹목적으로 성적을 올리기 위해 맹목적으로 공부해서 쌓아놓은 머릿속 지식들은 졸업과 함께 대부분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그때의 일을 잊어버렸는지 나는 지금도 똑같은 과정을 답습하고 있었다. 이것만 배우면 모든 게 잘 풀릴 것 같고, 이 자격증만 따놓으면 모든 게 나아질 것 같지만 변하지 않는 현실을 보면서 어쩌면 우린 머리만 가득 채우면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거란 착각 속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는 근본적인 문제를 회피해가며 외적인 활동에만 연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지속해서 해야 할 일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생각해보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괴로운 건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아프기 때문이고, 돈이 아무리 많아도 가슴이 허전하다면 행복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지식이 부족하다고 자살하는 사람은 없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기 때문에 죽고 싶은 것이다.


개발들은 언제나 빠듯한 일정에 맞추기 위해 기술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는 기술적 부채에 시달리지만 정작 개인에게 중요한 것은 마음의 부채다. 두 가지 모두 빚을 지고 있다는 점에서 마음이 불편하고 상황을 어렵게 만들지만, 기술적 부채는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다른 후임 개발자가 처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마음의 부채는 자신이 직접 갚지 않으면 평생을 쫓아온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결국, 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겠지만 지금 당장 마음의 빚부터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장기 상환채무에 시달리지 않고 하루빨리 벗어나는 길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배움이 필요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프로그래머는 꾸준히 기술을 익히고 실력을 키워야 하는 직업이 맞다. 다만 가슴 떨리는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면 괜스레 시간만 허비할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 주위에 개발이 즐거워 코딩하는 사람들은 난해한 문제를 해결하면서 희열을 느끼고 야근에도 크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그들은 진심으로 그 시간을 즐기는 것이다. 그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배우고 행복하게 코딩한다. 반면에 연신 자기는 코딩에 자신이 없다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왜 자신의 코딩 실력이 늘지 않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들 역시 책을 보고 인터넷을 통해 공부하지만, 이들에게 프로그래밍은 중노동에 불과할 뿐이다.



순수한 마음의 차이가 기술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다.

결국 기술력이 뛰어난 개발자가 무조건  코딩의 신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코딩에 무한한 애정을 가진 개발자는 보통 기술력이 뛰어나고 실력도 출중하다. 그들에겐 기술에 뒤처진다는 불안감 따위도 없다. 그들은 마음이 이끌리면 언제든 기술은 익히면 된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새로운 기술은 개발자들을 열광시키지만, 기술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실제 마음의 헛헛함은 지식을 익히는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으며, 개발자들이 흔히 겪는 사람 사이에서 오는 문제도 머릿속 계산된 결과보다 서로에 대한 진실함이 더해질 때 관계의 개선이 이뤄진다. 이는 고개를 숙이면 닿을 듯 말듯한 거리에 있지만, 머리와 가슴은 엄연히 구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들 잘하기는 하는데 머리만 치고 있어.

가슴을 쳐야지. 가슴을!”






재밌게 봤던 드라마 <미생>에서 오차장이 인턴사원들에게 했던 말이다. 이처럼 머리로 면밀하게 분석하고 이해했다고는 하지만 마음으로 절실히  다가서지 못한다면 본질을 겉도는 것일 수 있다. 가슴과 머리는 가까워 보여도 어떤 이들에겐 평생 도달하지 못할 먼 거리이기도 하다.


비단 고객의 감성을 자극하는 일을 넘어서 정작 위대한 일은 자신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이다. 머리가 시키는 일이 아닌 가슴이 시키는 일을 따르고, 다른 이들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공감할 수 있었으면 한다. 그러고 나서 머리를 채운다면 진정으로 습득하고 싶은 것들이 생겨난다. 항상  도전적으로 자기발전을 추구하는 많은 개발자의 마음속 열정도 이 과정을 통해 피어날 것이라 본다.


빠른 변화의 시대에 새로운 것을 배워야 하는 요구는 끊임없이 이어지겠지만, 명확한 자기 주관 없이는 뒤처질까 불안해하는 마음을 해소하는 수단밖에 안 된다. 남들이 하니까 무작정 따라 하기보다는 기술이 전해줄 긍정적인 효과를 생각하며, 배움에 희열을 느꼈던 순순한 모습을 되찾길 희망한다.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걸 공부하면서 느끼는 감동,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 부디 선후행 관계가 뒤바뀌지 않길 바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