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부, 갑돌이와 갑순이, 르호보암
한국교회 선교는 마리아의 처녀 잉태에 비유되곤 한다. 1885년 한국 제물포항에 들어온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는 이미 조선 기독교인들에 의해 교회가 세워진 나라에(1883년 서상륜 서경조 형제가 소래교회를 세움) 조선 기독교인이 번역한 한글성경책(이수정이 1884년 번역한 마가복음)을 손에 들고서 선교를 시작했다. 우리는 기독 교회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고, 이후로도 없었던 놀라운 선교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의료와 교육으로 시작된 기독교 선교는 교회 선교로 발전하여 이 또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성장을 이루어놓았다. 그런 한국교회가 지금 세상의 뭇매를 맞고 있다. 교회의 명성이 세상에서 맛 잃은 소금처럼 밟히고 있다. 어떤 이들은 한국교회에 심폐소생이 필요하다고까지 주장한다. 과연 한국교회는 소망이 없는 것일까?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돌아보고 우리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흥부 유감', '갑돌이와 갑순이의 비극', '어리석은 르호보암'이라는 세 가지 메타포(Metaphor, 은유)를 사용하려고 한다.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한 이 제언에 함께 동감할 수 있다면 좋겠다.
흥부 유감(興夫遺憾)
아주 먼 옛날 놀부와 흥부 형제가 살았다. 흥부는 가난했지만 착한 사람이라 복을 받았고 놀부는 부자였지만 악한 사람이라 벌을 받았다. 물론 악인은 벌을 받고 의인은 복을 받는 것이 성경의 정신이자 하나님의 뜻이다. 그래서 그런지 어려서부터 내게 흥부는 착한 사람의 표상이요, 좋은 사람의 대표였다. 나는 흥부를 좋아하고 놀부를 싫어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목회를 하다 보니 흥부가 좋은 사람이라는 데 이의가 생기기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흥부는 착한 척하는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주변에 그런 흥부 같은 목회자들이 많다는 사실에 당혹스럽고, 교인들에게는 '광명의 천사'처럼 치장하지만 그 속에는 온갖 시커먼 것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에 더 놀라게 되었다.
그 면면을 살펴보면 흥부는 결코 의인이라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나는 흥부(興夫)에게 매우 유감(遺憾)이 있다. 흥부가 심성이 착해 작은 생명조차 함부로 대하지 않는 사람인 것은 알겠다. 하지만 우유부단한 데다가 염치조차 없는 사람이 아닐 수 없다. 변변한 벌이도 못하는 사람이 자식을 스물다섯이나 낳았으니 이렇게 대책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아이들과 아내는 집에서 굶어 비쩍 마르고 힘이 없어 밖에 나가 두들겨 맞기 일쑤다. 심지어 흥부 자신도 밥풀 몇 개 더 얻어먹으려고 따귀를 맞고 다닌다. 누가 그를 호인이라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가족들에게는 너무나 무능력한 가장이다. 자기 좋은 사람 되려고 여러 사람 괴롭히는, 자기 본분을 잊은 가장이다. 가장이 자기의 본분을 잊었으니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요즘은 한국교회에도 이런 본분을 잊은 목회자들이 많다. 수많은 목회자들이 자신들의 본분을 잊고 목회의 본질에서 떠나 있다. 목회는 말 그대로 목양을 하는 일인데, 우리 안의 양을 보살피고 잃어버린 양을 되찾는 일은 뒷전에 두고 목회자의 직분을 권력화 하여 이익과 명예를 얻으려는 사람들이 많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나는 목회 현장에 나와 ‘교회정치’라는 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목회자들이 목양을 하지 않고 정치를 하니 한국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 게다가 어떤 이들은 한 술 더 떠서 교회정치를 넘어 세상 정치에까지 참견하고 있다. 밥풀 몇 개 얻어먹겠다고 교회의 뺨을 들이대는 흥부들이 많아지니 교회가 세상에서 두들겨 맞기 일쑤다.
솔직하게 말해보자. 한국교회를 욕 먹이는 사람들이 교인들인가? 아니면 목사들인가? 대부분 목사들이다. 설령 욕먹는 교인들이 있다고 해도 그들을 그렇게 가르친 사람들은 또 누구인가? 그 역시 목사들 아닌가?
예를 들어, 정치에 대한 목회자들의 자세만 봐도 그렇다. 강단에서도 편향된 정치색을 대놓고 드러내는 목회자들, 아예 투표를 누구에게 해야 하는지 꼭 집어 알려주시는 족집게 과외 선생 같은 설교자들도 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일개 정당에 소속시켜 버리는 몰염치함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나온 발상일까?
목회자는 성도들을 온전하게 가르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다.(엡 4:11~12) 그러니 헛된 데 힘쓰지 말고 속히 교회로 돌아가 제 할 일을 해야 한다. 목회자는 세상이나 교단, 교파를 위해 있지 않고 교회의 양들을 위해 있다. 예수님께서도 "내 양을 먹이라."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그러니 목회자들은 교단 정치와 세상 정치를 떠나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 가서 예수님의 가족들을 먹여야 한다. 그래야 영적으로 갈급해 비쩍 마른 교회가 다시 힘을 얻어 세상에 얕보이지 않을 것이다.
흥부라는 이름의 한자를 보면 ‘흥하게 하는 지아비’라고 풀이할 수 있다. ‘부흥시키는 가장’이다. 흥부(興夫)는 가정을 세우고 가족을 먹여 살리는 가장이다. 앞서 말했듯 목회자는 세상이나 교단을 위해 있지 않다. 목회자는 세상과 교단의 흥부(興夫)가 아닌 교회와 교인들의 흥부(興夫)다. 그렇기에 목회자는 교회로 돌아가 열심히 연구하고 기도하며 목양을 해야 한다. 주님의 양인 교인들에게 양질의 말씀을 먹이고 양육하고 훈련하여 세상을 이길 사람들을 키워 내야 한다. 어린이와 청소년들, 청년들을 열심히 교육하여 다음 세대를 책임질 수 있도록 세워야 한다. 일천 명을 혼자 전도하는 것보다, 백 명 전도할 사람을 열 명 세우는 것이 목회자의 일이다. 자신이 정치인이 되어 세상을 구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 세상을 구할 정치인 하나를 세우는 사람이 목회자다. 혼자 세상을 다 구원할 것처럼 큰일을 하려고 하지 말고,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몫을 감당할 사람들을 한 사람씩 먹이고 입히고 양육하고 세우는 참 흥부(興夫) 목회자가 되어야만 미래교회에 희망이 있다.
목회자들이여! 제발 교회로 돌아가라!
그곳에만 당신들의 사명이 있고 소명의 이유가 있다.
세상에서 얻을 것을 기대하고 기웃거리다가는 비쩍 말라 비루해질 교회 밖에는, 주님의 이름을 땅바닥에 떨어뜨렸다는 오명 밖에는, 엉성한 밥풀떼기 몇 개를 위한 나무주걱의 따귀 밖에는 얻을 것이 없음을 잊지 말라!
갑(甲)돌이와 갑(甲)순이의 비극
갑돌이와 갑순이는 한 마을에 살았다. 둘이는 서로 사랑했다. 그런데 둘이는 마음만 그랬다. 겉으로는 안 그런 척했다. 바로 여기서 민족상잔의 비극, 막장드라마가 시작되었다. 결국 갑순이는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갔고 시집간 첫날밤에 갑돌이를 그리워하며 한없이 울었다. 갑돌이도 화가 나서 장가를 갔다. 그러나 역시 갑돌이도 장가간 그날 밤 갑순이를 그리며 달을 보고 울었다. 그렇게 서로 필요로 하면서도 겉으로는 또 "고까짓 것"하며 서로를 무시하고 반목했다. 만일 둘 중 누가 한 사람만이라도 사랑을 제대로 표현했더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이야기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극심한 소통의 문제를 겪고 있다. 교회와 교회가, 목회자와 목회자가, 목회자와 교인들이 서로 소통이 안 된다고 아우성이다. 서로가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마치 작은 점 하나를 양보하지 못하고 이단이 된 아리우스(이오타 논쟁,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의 기독론 논쟁)나, 서로 간에 교리의 타협을 보지 못하고 헤어졌던 동·서 교회처럼 다투고 있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정말 못 알아들어서 다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교회사에 있었던 논쟁들이 모두 서로 다른 정치세력의 충돌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던 것처럼, 한국교회의 논쟁들도 세력의 충돌로 인한 권력다툼에 다름없다. 그러니 소통의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소통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겪는 소통의 부재라 할 수 있다. 소통은 이해, Understand! 말 그대로 낮은 자세에서 시작되는데, 한국교회 안의 갑(甲)돌이와 갑(甲)순이가 서로 갑(甲)이 되려고 하니 소통이 될 리가 없다.
해법은 겸손한 동역에 있다. 뿌리에서부터 온전한 동역이 이루어진다면 결국 전체가 건강해지고 열매도 열릴 것이다. 뿌리는 개교회다. 각자 섬기는 교회 안에서 목회자와 목회자, 목회자와 교인, 교인과 교인, 부서와 부서가 서로 낮은 자세로 소통해야 한다. 무엇보다 경쟁심을 버려야 한다. 더 높아지려는 마음을 지니고서야 결코 소통할 수 없다. 교회는 부흥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사역자들을 경쟁시켜서는 안 된다. 목회자와 교인들은 서로 더 많은 권한을 갖기 위해 경쟁해서는 안 된다. 목회자들은 제왕적인 권위의식을 버리고 교인들에게 더욱 많은 권한을 위임해야 한다. 교인들은 교회를 좌지우지하려고 하지 말고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을 인정해야 한다. 지역의 교회들은 자신들의 교회가 더 큰 교회나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 경쟁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함께 동역하고 서로 도우며 세상이라는 바다에 함께 그물을 내려야 한다.
한국교회 안의 갑(甲)돌이와 갑(甲)순이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세를 낮추어 소통하기 시작하면 한국교회는 머지않아 동족상잔의 비극, 막장드라마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어리석은 르호보암(רְחַבְעָם)
솔로몬의 아들이었던 르호보암은 자신만만한 왕이었다. 그 이름에는 히브리어 르호봇(רְחֹבוֹת)과 암(עַם)이 더해진 '백성이 넓어졌다.'라는 좋은 뜻이 들어 있다. 그는 이름을 지어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백성을 널리 아우르는 리더여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이름값을 하지 못한 왕이 되고 말았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왕이 되었고, 그렇게 왕이 되고 보니 자기가 대단해서 왕이 된 것 같았다. 하나님의 은혜도 아니고,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공도 아니었다. 그러니 할아버지와 함께, 그리고 아버지를 도와 큰 나라를 세웠던 원로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자기가 가야 할 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일 뿐이었다.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또래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이 진리이고 선이며 기쁨이었다. 그러나 결국 연륜을 저버린 어리석은 르호보암은 큰 나라를 잘라먹고 만다.
우리는 흔히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한다. 교회는 자꾸만 새 교회, 새 사람, 새 일꾼을 부르짖는다. 부대가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혹시 그들은 '새 부대는 숙련된 노련한 기술자가 더 잘 만든다.'는 사실을 알까? 숙련된 사람이 새 부대를 만드는 것이다. 새 부대가 새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교회는 젊은이의 활력도 필요하다. 다음 세대에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교회가 연륜과 지혜를 얻는 것이다. 삶의 지혜는 삶의 과정에서 나온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지혜도 신앙의 과정에서 나온다. 그러니 신앙의 연륜을 무시하면 안 된다. 현대교회는 혁신을 말하면서 연륜을 저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거기서부터 교회의 위기가 온 것은 아닐까? 검증도 안 된 새것을 담느라 오랜 좋은 것까지 버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교회는 다음 세대와 기성세대를 위해 자리를 마련할 뿐 아니라 그 이전 세대들의 자리도 마련해야 한다. 젊은 세대들은 보지 못한 좋은 순종과 헌신의 유산을 되찾아 와야 한다. 그것이 한국교회의 부담스러운 현재를 헤치고 나가 부흥의 미래로 인도해 줄 지혜다.
청년사역을 하면서 청년들을 훈련시키려고 10명 정원의 제자훈련 강의를 개설했는데, 오해가 생겨 환갑이 훨씬 넘은 어른들이 4분이나 등록했다. 잔뜩 기대를 하고 오신 분들을 돌려보낼 수 없어 함께 시작했다. 결론적으로는 정말이지 환상적인 일이 일어났다. 청년들은 어른들과 함께 훈련받으며 자기 부모를 이해하고 용서하게 되었고, 어른들은 청년들의 아픔과 고민을 통해 자신의 자녀들과 화해하게 되었다. 세대와 세대가 만나는 곳에 새 은혜를 담을 새 부대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교회의 노령화가 위기가 아니냐고 묻는다. 나는 천만의 말씀이라고 대답한다. 교회가 비전을 가지고 준비하기만 하면, 온 세대가 어우러져 연륜이 젊음에게 전달되고 젊음이 시니어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줄 새로운 신앙의 시대가 올 것이다.
어리석은 르호보암은 이름값도 못하고 장로들을 무시하며 연륜을 저버렸지만, 지혜로운 아브라함은 자신의 늙은 종을 밧단아람으로 보내 다음 세대의 여주인을 구하게 했다. 르호보암은 아버지가 물려주신 큰 나라를 잃었지만, 아브라함은 이삭의 집을 족장들의 역사상 가장 큰 풍요로움으로 이끌어 준 며느리, 이스라엘의 어머니 리브가를 얻었다.
한국교회는 회복해야 할 것이 많다. 흥부(興夫)들이 본분을 되찾아야 하고, 갑(甲)돌이와 갑(甲)순이들이 자신을 낮추어 소통해야 한다. 르호보암들은 온 세대를 아우르는 자리를 만들어 '백성이 넓어졌다.'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해야 한다. 이 결단은 나로부터, 우리 교회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 교회가 큰일 났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교회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가 '나는 흥부가 아닌지, 갑돌이와 갑순이는 아닌지, 르호보암은 아닌지.' 돌아보기 시작하면 그것만으로도 한국교회에는 다시 큰 소망이 움트기 시작할 것이라 확신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