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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현 Jan 04. 2023

그리스도인의 인격 03 비전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지는 해석     


며칠 전 이런 뉴스가 있었다. 경상남도의 한 바닷가에 케이블카가 설치되었단다. 케이블카가 바닷가에서 산까지 이어지는데, 마침 그 케이블카가 지나가는 아래에 불교사찰이 하나 있었다. 케이블카의 공사과정과 운행과정에서, 사찰과 당국의 마찰이 꽤나 심했던 것 같다. 법정 다툼까지 갔는데, 결국 사찰이 패소하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 그 사찰 위로 케이블카가 지나다니고 있다. 그런데 케이블카를 타고 가다 보면, 그 사찰 지붕에 커다란 현수막이 하나 보인다.

“부처님 위로 케이블카 타는 자는 평생 재수 없다.”라고 적혀 있다. 특히 “평생 재수 없다.”라는 글귀는 정말 커다랗게 적혀 있다. 인터뷰를 보니 케이블카 타는 사람들이 그 글귀를 보고 마음이 매우 불쾌하다고 한다. 운영하는 사람도 ‘마음이 불쾌해지는 현수막을 보고 케이블카 손님이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했다는데, 반전이 있었다. 놀랍게도 요즘에 케이블카를 타러 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단다. 고3 수험생들이 케이블카를 타러 많이 온다는 것이다. “평생 재수 없다!”라는 말을 다르게 해석한 것이다. 수험생들이 재수 안 하려고 케이블카를 타러 온다는 것이다. 뉴스를 보면서 정말 크게 웃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을 예로부터 풍자와 해학의 민족이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듯싶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주제는 ‘비전’인데, 나는 이 뉴스가 신앙인의 비전과 딱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똑같은 사실에서 그 이면의 진실을 볼 수 있는 것. 그것이 비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불가에서도 불상이 부처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나무나 쇠, 돌로 만들어진 불상 위를 지나갔다고 평생 재수 없을 일은 아니다. 또한 누군가 평생 재수 없다고 말했다 해서 그 말을 들은 사람이 평생 재수 없는 일도 아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해석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오히려 사람 오지 말라고 붙인 글귀에 사람이 더 모이는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비전은 구호가 아니다     


사실 교회에서 ‘비전’이라는 말은, 이제 하도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을 것 같은 단어가 되었다. 이 말을 들으면 나는 왠지 울렁거리기까지 한다. ‘비전’이라는 단어와 함께 “높이 바라보고 멀리 바라보고 크게 생각하라!”와 같은 구호들이 생각난다. ‘비전’이라는 말을 교회에서 들으면 “일만 성도, 일천 선교사, 일백 교회!” 뭐 이런 것들과 흔히 연결이 되어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정말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정말 이런 구호가 비전이 될 수 있을까? 모든 자녀는 세계적으로 위대한 인물이 되는 것을 꿈꿔야 하고, 모든 교회는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가 되어야 하고, 모든 목사는 교회를 수십 개 개척하는 목사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정말 그런 일들이 진짜 비전일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정말 그런 일들을 바라실까?     

이런 질문을 던지면 반대로 질문할 수도 있다. “예수님은 분명히 제자 삼으라는 지상명령을 우리에게 주셨지 않는가?” 그렇다. 분명히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상명령을 통해 제자가 되고 제자를 삼으라고 말씀하셨다. 온 세상이 구원받을 때까지 우리에게 그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비전은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지, 몇 명이 모이는 교회를 세우고, 결산이 얼마가 나는 재정을 만들라는 게 아니다. 이런 것들은 주님보다는 사람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는 일들이다. 아무리 좋게 꾸미려고 해도 어쩐지 욕망의 냄새가 나는 일들이다. 사람이 기뻐할 일들이다.     


넓은 세상을 두루 돌아봐야 시야가 넓어진다. 조금 더 높은 목표를 두어야 작은 목표를 둔 것보다 더 성취할 수 있다. 크고 넉넉한 인품이어야 더 여유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비전의 핵심이 될 수는 없다. 물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상명령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사명이다. 그러나 제자 삼으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이, 한 울타리 안에 더 많은 사람이 모여야 한다거나, 한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를 독점적으로 많이 이루어야 한다거나, 한 교회가 세상에 더 많은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지상명령은 그저 포기하지 말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얼마의 일을 맡길 것인가, 어떤 교회에 얼마 큼의 사람을 맡길 것인가는 하나님께서 정하실 일이다. 사람이 그 목표를 정하는 순간 오히려 교회는 월권을 행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면 우리가 가져야 할 진짜 비전은 무엇일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지어주시는 장면을 통해 조금 더 신앙적인 비전의 개념에 근접할 수 있다.          



비전은 현실을 올바로 보는 눈이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실 때, 어떤 사건이 먼저 일어났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몰려와 예수님께 표적을 요구한 것이다. 정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을 시험해서 올무에 빠뜨리려고 세운 계략이었다. 아주 노골적으로 예수님을 비판하고 비난하기 위해 계략을 세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더욱이 당대에 서로 원수였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함께 몰려와 예수님을 시험했다는 것은 정말 예의주시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은 잠시 사역을 쉬고 피신하셔서 반대자들의 동태를 살펴야 하는 때가 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처음부터 그러셨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피신하려고 하셨다. 헤롯에게 세례요한이 죽임을 당한 사실을 들으시고는 호수를 건너 한적한 빈 들에 은둔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셨다. 하지만 사람들은 호숫가를 빙 돌아 달려와 예수님을 찾았다. 예수님은 찾아온 그들을 보시고 은둔하셨던 곳에서 나오셔서 그들을 고치시고 먹이시고 가르치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은 숨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속 일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일하시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아시고 계속해서 해야 할 일들을 하셨다. 반대 세력의 견제와 비난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예수님 자신도 기뻐하시며 감당하셨다. 그런 예수님의 사역에 사람들의 평가가 이어지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먹이시고, 병든 사람들을 많이 고치시고,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은혜로운 교훈들로 가르치시자, 많은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 좋게 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평가가 좋아질수록 예수님의 반대자들은 더욱 날뛰며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찾고 있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셨다. 시몬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시몬의 대답은 정답이었다. 모두가 현실을 오해하고 있었지만 시몬은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잘 못 생각하면 시몬의 대답이 예수님께 잘 보이기 위한 아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성취에 도취되어 감정적인 고백을 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고백은 현실을 올바로 판단한 고백이었다. 예수님께서 그 사실을 직접 증언해 주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진정한 비전은 바로 이런 것이다. 현실을 올바로 보는 것. 사람의 입장에서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입장에서 현실을 보는 것이 비전이다. 예수님도 그래서 계속 일하셨고, 베드로도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다.     


목양이라는 것이 어떤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지켜보는 일이다. 그렇게 사람들의 삶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문제에 붙들려 옴짝달싹 못 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런 이들은 대부분 그 입술에 비판과 비약과 비난을 달고 산다. 분노가 가득하고 삶이 행복하지 못하다. 결국은 비판만 하다가, 비약을 하다가, 타인을 비난하고, 책임을 서로 돌리고, 자기 연민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점점 더 문제의 수렁에 빠져든다.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럴 때 현실을 직시하는 눈이 필요하다. 사람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야말로 현실을 올바로 보는 눈이고, 이것이 신앙적인 비전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비전을 그리스도인의 인격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하나님의 관점에서 현실을 올바로 보는 비전이 없으면 그저 대안 없는 비판이나 자기 비하에 빠질 뿐이다. 대안 없는 비판과 자기 비하는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사탄의 일이다. 문제라는 판단이 섰으면 그 문제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고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현실을 제대로 보는 사람들은 해결하기 어려운 일일수록 사람을 향해서는 입을 닫고 하늘을 향해 입을 연다. 왜 그럴까?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 19:26)

우리 앞에 어떤 문제가 있더라도, 얼마나 큰 문제가 있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 문제보다 크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큰일 났다고 떠들면서 여기저기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기보다 하나님께 먼저 입을 여는 것이다. 비전의 사람은 문제가 아무리 크고 형편이 아무리 좋지 않아도, 그 문제의 위력 앞에 꽁꽁 묶여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어떤 문제보다도 크신 분임을 알기에, 하나님께서 그 어떤 문제라도 해결하실 것을 믿고 해결의 방법을 찾아 나서는 사람이다.     


전에 목회하던 교회에서 한 여자 권사님이 나를 찾아왔다. 남편이 직업군인이었는데 얼마나 고집이 세고 완고한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게다가 남편이 신앙생활을 하고는 있는데 항상 교회에 비판적이었고, 걸핏하면 교인들이나 목사에게 시험이 들었다며 예배에 나오지 않았다. 그때도 교회에 뭔가 시험에 들어서 “이제는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라고 선언하고 주일에 교회에 나오지 않은 것이었다.     

상담을 하면서 나는 그 권사님께, 권사님의 문제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고 얘기했다. 하나님께서 마음만 한 번 바꿔주시면 되는 일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남편을 바꾸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이 뭐가 있을지를 고민해보자고 했다. 내가 먼저 두 가지를 제안했다. 하나는 권사님이 할 일이고 또 하나는 내가 할 일이었다.

그런데 나의 대답을 들은 권사님의 표정이 매우 못마땅했다. 내가 그저 “권사님 참 힘드시겠네요. 남편이 그런 분이라 정말 얼마나 힘드셨어요?” 하고 말해 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별로 대단한 문제가 아니니 함께 해결해 보자고 하니까 기분이 언짢았던 모양이다. 자기에게는 이 문제가 너무나 큰 문제라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남편’이라는 문제가 얼마나 큰지 그 문제에 꽁꽁 사로잡혀있었다. 자녀들이 잘 자라고 경제적으로도 큰 문제가 없고, 몸도 건강하고 교회도 가까이 있어서 예배, 성경 공부, 양육과 훈련, 심지어 매일 새벽기도까지 나오고 있으면서도 자기 인생이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더 확신 있게 말했다. 권사님은 가난하지도 않고, 자녀들도 다 잘 되고 있고, 몸도 건강하고, 신앙생활도 잘하고 있으니 행복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 남편 하나가 문제인데, 그것 하나 빼고는 다 잘 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이다. 남편 문제는 하나님께서 해결하실 것이니 믿고 우리가 해야 할 일만 하자고 했다. 내가 자신 있게 말하니까 권사님은 할 수 없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갔다. 결론적으로는, 그러고 나서 한 달이 채 지나기 전에 권사님 남편은 다시 교회에 나왔고,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할지 모른다.

“목사님이 이런 일을 당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요. 이 일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에요. 제가 이 일 때문에 얼마나 고통당하고 있는데요. 그렇게 해결하기 쉬운 일이라면 제가 벌써 해결했을 거예요.”     

또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목사님이 이 일에 전문가가 아니라서 잘 모르실 텐데요. 제가 전문가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이건 대단히 큰 문제입니다. 전문가인 저도 해결하기 어려운데 목사님은 어림도 없습니다.”     

그렇다. 다 맞는 말이다. 나는 모든 사람들의 사정과 형편을 다 경험한 사람이 아니다. 또 나는 목회 이외에 다른 일에는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별로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히 믿고, 알고 있는 것이 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내가 해결할 수 없다고 해서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 인생에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여러 번 있었지만 나는 한 번도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그리고 대부분 해결되었고,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분명히 앞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혜를 구할 때 결코 꾸짖지 않으시고 후히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기에(약 1:5)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실 지혜를 구한다. 좋은 친구들을 찾아가 조언을 구하고, 주변에 좋은 신앙인들을 찾아가 해결방법을 묻는다. 물론, 힘들고 어려운 것에 대해 동정해주는 사람들을 만나면 잠깐의 위로는 받을 수도 있지만, ‘이것 봐. 저 사람들도 이건 힘든 일이라잖아!’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결국 내 앞의 문제만 더 커질 뿐 궁극적인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해결하실 것을 믿고 작은 일부터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조언해 주는 사람을 만나면 문제의 무게는 줄어들고 조금씩 무언가를 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현실을 올바로 보는 눈, 바로 이것이 비전이다.          



비전은 사람을 올바로 보는 눈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일하셨을 때, 시몬은 여러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직시했다. 사람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현실을 바라보니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예수님이 시몬을 바라보시는 관점도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이라는 사람의 진짜 모습을 보셨다. 예수님께서 보신 시몬의 진짜 모습은 과거와 현재의 모습만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시몬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도 보셨다. 이제 잠시 후면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막아서는 사탄이 된다. 예수님은 시몬을 향해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소리치신다. 예수님은 시몬이 이전에 어떤 사람인지 아셨고, 그가 꿈꾸는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이 이루실 그 나라와 다른 것도 아셨다. 그래서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막아설 것도 아셨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을 ‘반석’이라는 뜻의 ‘베드로’로 바꿔주시고 그 위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해 주셨다.     


비전은 사람을 올바로 보는 눈이다. 사람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의 앞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뒷면도 본다. 과거와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도 본다. 시몬 베드로가 가진 이면의 모습을 주님은 다 보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인격, 바로 비전이다. 우리가 자주 실수하는 부분이 바로 여기다. 우리는 문제 때문에도 절망하지만 사람 때문에도 많이 절망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비전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문제를 보듯,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람도 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일어날 일들에 대해 비전을 가지듯 우리가 관계 맺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비전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가 아무리 크더라도 우리는 그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의 관계들이 아무리 복잡하게 꼬여 있어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관계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룰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모든 문제를, 그리고 모든 사람을 하나님께 맡겨드린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사람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들을 하나씩 해 나갈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인격이자, 우리가 가져야 할 그리스도인의 인격, 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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