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살에 지금까지 모은 돈으로 중고차 한 대를 샀었습니다. 친구 아버지가 중고차 판매를 하신 덕분에 좋은 매물을 싸게샀죠.
차 키를 인계받으며 느꼈던 감정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가고 싶을 때, 번거로운 대중교통을 타지 않고 원하는 곳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사실은, 무한한 자유를 얻은 느낌이었습니다.
얼마지나지 않아 여자친구가 생겼었습니다. 우린 600만원도 안하는 중고차로 전국 팔도를 열심히 돌아다녔습니다.
그리고 어느 연인들이 다 그렇듯, 끝이 찾아왔습니다.
서로 남아있는 기억과 감정을 털어내던 중, 그녀는 충격적인 말을 전해왔습니다.
"저 차도 지긋지긋했어."
좋은 이별이란 없을테고, 감정적으로 내뱉었을 심산도 있었겠지만 그 말을 듣고 많이 놀랐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저의 자동차는 행복한 순간들로 데려다주던 고마운 존재였는데.
그녀에게 있어서, 남 보여주기 부끄러운 흉물에 불과했던 셈입니다.
같은 시간을 보냈음에도, 그 시간을 완전 다른 형태로 기억하게 된 것입니다.
애드문트 후설은 내재적 시간의식이라는 개념으로 이를 설명합니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구성하는 현상. 즉, 시간 경험은 개인의 ‘지향성’에 의해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의 말 처럼 시간은 주어지지 않고, 개개인에 의해 구성됩니다. 그러니 물리적으로 겪는 시간은 동일하지만, 결국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같은 시공간을 살고 있지만, '동일한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은 없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서로의 시간이 다르게 기억된 경험은, 비단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고민의 출발은 이렇습니다.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구성하는지에 따라 체감이 달라질 수 있다면, 인위적으로 시간 감각을 늘릴 수 있지 않을까요?
인간의 뇌는 착각을 잘 하는 기관입니다. Daniel Kahneman는 연구를 통해, 사람들은 어떤 경험 떠올릴 때 전체가 아니라 가장 강렬한 순간(peak)과 마무리(end)만으로 “전체 시간”을 기억하고 평가한다는 걸 밝혔습니다.
Block & Reed는 시간의 체감은 기억된 사건의 수·강도에 의해 변화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더 많은 사건의 수와 강도를 경험하면 상대적으로 더 긴 시간을 보냈다고 느낀다는 것이죠.
이 모든 이유는 Eichenbaum는 해마의 ‘시간 세포(time cells)’연구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시간세포는 기억과 시간을 연결하는 메커니즘을 담당하고 있어서 기억 구조 자체가 시간성을 만들어낸다고 합니다. 즉 잘 기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만으로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이를 활용한 사례들이 있습니다.
철학자 칼 융은 하루 중 일정 시간을 멍때리기, 산책하기 등과 같은 '비생산적인 고독 시간'을 위해 남겨둡니다. 그리고 그는 그 시간을 이용해 기억, 이미지, 상징들을 기억하고 편집합니다. 누군가가 볼때 그의 행동은 시간을 버리는 일이지만, 사실은 체감적 시간을 확장하는 중인 셈이죠.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단서를 '몰입'에서 찾았습니다. 진심으로 몰입하는 순간 체감 속도가 달라지고, 기억의 밀도가 높아지는 점에 주목한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몰입 경험을 의도적으로 설계해 예술,스포츠,연구 등 다양한 분야에 고성과자들을 양산해냈습니다.
시간은 기억되는 만큼만 존재합니다. 이를 활용해 기억을 통해 더 많은 체감 시간을 얻어 내는 것도, 아무 기억도 남기지 못한 채 영원히 상실된 시간으로 만드는 것도 온전히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