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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고래 PD Aug 03. 2020

80년 5월 목포 경찰서
이준규 서장 유가족

이준규와 안병하 vs 박처원과 전두환, 진짜 애국의 길?

5.18 당시 안병하 국장과 뜻을
함께한 전남 경찰들은
무더기로 징계를 받았다.

신군부는 자체 진상규명을 통해
치안 책임자인 경찰 및 공무원의
직무유기를 5.18 발발 원인의
일부로 평가했다.

아울러 사회정화 명목으로
대규모 공직자 숙정 및 민간인을
대상으로 삼청교육대를 운영하면서
군사정권의 기반을 공고화했다.

반면, 진입 작전 실패,
오인 총격전으로 인한 자체 피해 등
군의 과오에 대한 언급은 전무했다.
경찰 등에 책임전가를
시도한 것이다.

당시 조사 결과에 따라
안병하 국장 및 참모, 경찰서장 등
지휘부 13명을 
직위해제 및 의원면직시켰고,

총 64명의 일반직원에게
감봉(16), 견책(5), 계고(31),
전배(12) 등의 징계를 내렸다. 

이 중 유일하게 '파면'에
처해진 사람이 있다.
목포 경찰서 이준규 서장이다.

당시 외곽 저지선 보호 및
자위권 행사 소홀 등 혐의로
계엄사에서 구속, 파면당했다.
 
- 5.18 민주화운동 과정
전남경찰의 역할 72P - 74P,
전남지방경찰청, 2017년 10월 - 

고 이준규 서장이
본격적으로 재조명된 것은

2018년 5월, sbs 궁금한 이야기
Y에 방영된 이후다.

다큐 취재 과정에서
이미 이준규 서장 가족과의 인터뷰
계획을 세우고 있던 제작진은
 
'처음'을 놓친 게 못내 아쉬웠지만
전국 방송을 통해 널리 알려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5월 25일,
경기도 용인시 한 아파트에서
유가족을 만났다. 
만나러 가는 걸음이 무거웠다.

이준규 서장의 삶이 너무나
비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전남 장성 출신으로,
스무 살에 경찰이 된
이준규 서장은  

6.25 전쟁 때
북한군에 의해 부모님과
세 동생을 잃었다.

단지 경찰 가족이란
이유였다.

그런 그가 5.18 당시
신군부에 의해 파면당하고
고문 후유증으로 투병 중
5년 후 암으로 숨졌으니
얼마나 원통할 일인가.

5.18 관련자들에 대한
명예회복이 마무리된 듯 
인식되는 오늘날까지

가족들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길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유가족을 대표해
큰딸 이향진씨와 아들
용재씨가 인터뷰에 응했다.  

PD  현충원에 계셔야 하는 거잖아요

지금은 어떻습니까?

딸 저희가 94년도에 5.18 관련자로 

지정받았는데, 그 이후에는

파면 취소도 안 된 상황이더라고요 


저희는 그동안 가슴에 묻고 

가족끼리만 삭이고 있었는데, 


이번에 안병하 국장님 얘기가 

많이 기사화되었잖아요.

 

저희 아버지가 사실 더 많은

고난을 당하셨어요. 

90일간 구금돼 계셨었고요.

 

그분들은 다 직위해제지만 

저희 아버지는 파면당하셨어요 


이제는 아버지 명예 회복을 

위해서 뭘 좀 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PD 94년도에 5.18 관련자로 

지정된 건 어떻게 가능했나요?

딸 그때 5.18 희생자들 보상 

문제가 있어서 신청했었어요. 


그때는 이런 얘기 자체가 

괴로우니까 자세히 안 봤는데 

이번에 그 서류를 떼 봤어요. 


그랬더니 보상금이 아버지 

구금된 기간만큼만 산정돼서 

위로금 형태로  나왔어요. 


파면에 대한 것은 전혀 고려가 

안된 거죠. 아직은 아버지의 

명예회복이 안 되신 상태죠.     


PD 5.18 당시 상황을 말씀해줄 수 

있으시겠어요?

딸 그때 당시 경찰이라는 게 발령이

잦아서, 2년에 한 번이 보통이고 

빠를 때는 6개월에 한 번씩 나니까


저희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요. 어머니, 아버지 두 분만 

임지에 늘 같이 다니셨어요. 


5.18 당시에 시민들이 트럭에 타고 

목포까지 진입을 한 것 같아요. 


근데 아버지는 본인 가족이 학살당한 

아픈 기억도 있고, 경찰 책임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무력 대응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경찰서에 있던 무기 방아쇠 

뭉치를 다 빼서 경찰서 중요한 서류를 

들고 고하도로 먼저 가셨어요. 


그 섬에서 

10시간 조금 넘게 계셨던 것 

같아요. 경찰들을 다 소집하셨고.


이후 다시 목포로 나오셔서  

여러 경로로 시민들을 접촉했죠. 

설득도 하시고, 대책회의도 많이 했고요


그래서 경찰이 질서를 유지하고

시민들에겐 평화시위를 보장했어요. 

그래서 목포는 인명피해 거의 없이 

사태가 마무리됐어요. 

〈목포시사〉의
‘목포관내 사태보고’에
기록된

5·18 전 기간
목포에서 일어난
인명 피해는
사망 1명, 부상자 11명이었다.
- 시사인, 2019. 11.14. - 


그래서 아버지가 굉장히 뿌듯해했다는 

말을 어머니한테 들었어요. 

정말 뿌듯하다고. 


그런데 5월 31일인가? 

직위해제를 당하셨어요.

 

그리고 서울로 올라오셨는데

6월 11일에 갑자기 사람들이 와서

아버지를 그냥 체포해갔어요. 

느닷없이. 


이후 한참 지난 뒤에 

연락이 왔죠.


혐의가 아버지가 직무유기를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직무를 제대로 한다는 게 

시민들과 무력 충돌을 해서

진압을 해야 된다는 얘기인데

진압하면 되겠습니까?


목포가 다 들고 일어날 텐데요. 

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현장 분위기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 

현장 지휘관이다. 자꾸 강경대응을 

하라는 건 현지 정서를 모르는 얘기다." 


6월 12일쯤 체포하셨다가 

한 달쯤 있다 파면을 당하셨어요. 

이후 석 달쯤 있다가 나오셨죠. 

90일간.


PD 아버지가 나오셨을 땐 어땠습니까?

딸  저희한테는 표현을 안 하셨는데 

많이 수척해지셨죠. 저희 아버지가 

건장하신 분이에요. 키도 크시고. 


그 뒤로 이제 소화도 잘 못 시키시고 

수척해지는 상황이 이어졌는데. 

그런 일들을 삭히지 못해서 

그런가 보다 생각한 거죠. 


그때 아마 스트레스와 분노 때문에 

위암이 왔었던 것 같아요. 

85년에 11월에 돌아가셨어요.

     

 PD  85년까지 많이 힘드셨겠어요?

딸 동생들이 어리다 보니까 아버지가 

가장으로서 역할을 하셔야겠다고 

생각을 하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몸이 많이 아프셔서 

여의치 않았습니다.


일단은 아버지가 파면 사실을 

받아들이는 걸 굉장히 힘들어하셨어요.


일처리를 잘하셨다고 생각했는데, 

반대로 모욕을 받았잖아요.


'경찰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케이스'로 신문에 나고. 


아버지 명예가 바닥이었죠. 

그래서 더 힘들어하셨던 것 같아요. 

평생.   


85년도에 제가 외국에 잠깐 

있었을 때 저한테 보낸 편지를 보니까.

정치 상황이 조금 변화가 있는 듯해서 

신문기사를 동봉한다고 쓰셨더라고요.


아버지 편지를 갖고 있는 게 

몇 통 있는데. 그런 기사를 스크랩해서 

보내신 걸 보니까 굉장히 

열망하셨던 게 아닌가. 

  

 PD 그런 말씀들을 잘 안 하셨죠?

딸 네. 저희한테는 거의 말씀 안 하셨죠

아버지가 말할 수 없는 수모를 겪었다. 

모욕을 당했다고 말씀하셨는데, 


저희는 그렇게까지 아버지가

힘들게 고문당하신 것을 몰랐죠. 


너무 가슴이 아픈 거죠. 저희로서는. 

제가 안 울려고 했는데 

사실 아버지 돌아가시고 한동안은 

참 힘들었어요. 다들. 


(울먹이며)

그러다가 

아버지 기일에도 울지 않게 된 게 

꽤 됐거든요 저희도. 

돌아가신 지 33년이 되다 보니까.


그런데 다시 그때 일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눈물을 많이 흘릴지 

몰랐어요. 


결국 상처가 치유가 안 되고 

저희가 덮어놨던 것 같아요

우리 안에 상처가 깊었나 봐요. 


이준규 서장은 32년을
경찰관으로 복무했지만
파면을 당해 퇴직금도
받지 못했다.
 
약대를 나온 큰딸이
가장 노릇을 했다.
 
남편의 고초와 사망 충격에
이 서장의 아내도
병을 얻었다.
 
아버지의 명예를 짓밟는
경찰 주변의 비난과
수군거림에
자녀들은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았다.
 -시사인, 2019.11.14. - 



PD 억울하고 이해 안 되는 부분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아들 뭐 여러 가지죠. 

처음 구제를 받기 위해 애쓴 시기는 

신군부 집권기니까. 


돌아가신 뒤에도 저희가 전혀 

노력을 안 한 건 아니에요. 


근데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벽에 대고 얘기하는 

느낌? 


피해자 입장에서 보면 

너희도 가해자 아니냐,

무슨 세세한 걸 따지느냐. 


이런 식의 주변의 반응도 

있었고요.     


 PD 가해자라니?

아들 그러니까 시민들 입장에서는 

군경이 결국 같은 개념이었던 거죠.

 

딸 대척점에 있다고 생각을 많이 

하셨잖아요. 시민들 입장에서는. 

군인들하고 경찰을 같이 보시니까. 

대척점에 서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데 그때 당시에 전남 경찰 분들이 

거의 다 지역 분들이시잖아요. 

왜 같은 정서를 나누지 않았겠어요?


어떻게 본인하고 같은 시민들이고 

같은 친인척들에게 총을 겨눌 수가 

있었겠어요. 


그래서 경찰에서는 발포를 

안 했던 걸로 저는 알고 있고. 


또 아버지는 홀로 

결정을 내려야 했잖아요. 


목포는 더욱더 독립적이었고. 


제가 이제 와서 생각하는 건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5월에 

구속이 되었더라고요. 


그리고 9월에 내란 음모죄로 

사형 선고를 받으셨잖아요. 


그런데 목포가 김대중 대통령 

당시 지역구였었단 말이죠. 


목포에서 선동이 돼야 

논리적으로 맞는 말인데 

조용히 끝났고. 


광주만 놓고 하자니까 

뭔가 맞지 않았을 거 아니에요. 


그러다 보니까 아버지 방침이 

나중에 정해진 거 아닌가.

 

왜냐면 처음엔 직위해제였는데 

저희 아버지만 파면되었거든요.

   

전두환 신군부는 왜 이 서장을
처벌하고 파면하는
무리수를 두었을까.
 
이향진씨는
“아버지는 풀려나온 뒤

가족에게
‘김대중씨와 내통했다는
관계를 대라고
죽도록 고문을 당했다’고
털어놓으셨다”라고
회고했다.

신군부는 이 서장이
시위대 지도부와 평화 시위 및
무기 회수 협상을 벌인
행위를 불순하게 보았다.

신군부는 그를 어떻게든지
사상범으로 몰아가려고 했다.

이 서장은 비운의 가족사까지
들어가며 반박했다.
그때마다 고문을 당했다.

 “6·25 때 경찰관이라서
부모님과 동생 3명이
인민군 쪽에 학살당했다.

매우 보수적인 분이었는데도
김대중씨와 엮어
용공 색깔을 씌우려고 했다.”
- 시사인, 2019.11.14. - 
당시 이준규 서장이
최고 중징계를 받은 데에는
전두환에게 밉보인 게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관련 일화가 있는데, 
5월 27일 안병하 국장
후임으로 송동섭 국장이
초도 순시를 할 때, 

"학생 소요사태가 악화되면
자위권을 행사할 것인지
물었는데,

이준규 서장이 
답변을 하지 못해 힐책했다"

"이 사실이 전두환에게까지
보고됐고 전두환은 친필로
조치를 지시했다"

(전남대학교 5.18 연구소
김희송 교수,
'직무유기 경찰관 보고' )

당시 안병하 국장도
무조건 사표를 내고 목숨을
부지하라-

이준규 서장을 설득했지만,

이준규 서장은 잘못한 게 없어
사표를 쓰지 못하겠다고 거절했다.

목포 시민들이 탄원서까지
제출했지만

7월 7일, 계엄 보통 군법회의는 
그를 파면하고 징역 1년
선고유예 처분을 내렸다.

PD 그동안 한이 많으셨겠네요?

딸 제가 이번에 목포에 갔었는데. 

5.18 표지석에 23일에 총기를 

탈취했다고 돼있더라고요. 

옛 목포 경찰서 자리에.

 

근데 아버지가 이미 총기를 쓸 수 없게 

방아쇠 뭉치를 다 빼서 

고하도 파출소에 보관을 하셨는데. 


총기를 탈취당했다고 쓰여 있으니까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양쪽에서 다 인정을 받지 못하는 

어정쩡한 위치잖아요.     


PD 정말 모두가 무심한 것 같네요. 

경찰청에선 연락 없나요?  


딸 올해 5월에 연락이 왔어요.

 

아들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이고 

그걸 기리기 위해서 경찰 내부에서 

위인으로 부를 수 있는 분을 

조사를 하고 있다고요.

 

딸 사건별로 조사를 하다 보니까 

아버지 기록이 나온 것 같아요. 

이분은 왜 파면을 당하셨나. 


그래서 그분들이 조사를 했는데 

38년이 지나다 보니까 기록들을 

많이 못 찾으신 것 같아요. 


그리고 남아있는 기록들도 

저희가 낸 기록은 하나도 없고. 

이런 이유로 기소를 해서 판결을 한다. 

이런 식으로만 나와 있으니까.  

저희를 찾기도 힘들었다고 해요.


아들 경찰 자신들의 자존심을 높이고 

명예를 스스로 찾아줘야 하는데 

거의 40년이 돼서야..


PD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딸 시대가 그랬잖아요. 

아직 광주에서 있었던 일도 

제대로 밝혀진 게 없잖아요. 


그런데 경찰까지 내려오기엔 

좀 무리가 있었던 게 아닐까요. 


이런 것들이 다 밝혀지고 

당시 경찰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저희 아버님이 어떻게 하셨는지 

그래서 목포가 어떻게 됐는지. 


이런 것에 대한 평가가 이뤄져야 

된다고 저희는 생각해요.     

  

그나마 다행인 건,
취재 후인 '18년 7월, 국가보훈처는
이준규 서장을 5.18 유공자로
선정했다.

또, 2019년 10월,
광주지법 목포지원은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했고,

경찰청은 이준규 서장을 비롯한
당시 경찰 간부 21명에 대한 징계를
직권 취소했다.

앞으로, 이준규 서장을 
순직 유공자로 신청하고
국립묘지 이장을
추진할 예정이다.


PD 아버지를 떠올리면 먼저 

어떤 생각이 드세요?


아버지는 1928년생이신데. 

일제 강점기를 겪으셨고, 


해방, 6.25, 군부독재 

광주항쟁이 있기까지 그 일을 

거의 다 겪으셨잖아요. 


격변의 현대사를

너무 심하게 거치셨죠. 


아버지가 58세에 돌아가셨어요. 

53세에 광주 일이 있었고 

인생이 너무 안 되신 거죠. 


한 인간으로 부모님, 동생들이 

본인 때문에 학살당했다는 

부담을 평생 안고 사셨을 거 

아니에요. 


아버지는. 그런데 부담 끝에 

본인이 신념을 갖고 지켜온 

경찰직을 오명을 쓰고 마감을 

하시게 되셨으니까 얼마나 

힘드셨을까-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그래도 저희가 아버지를 생각하면 

행복했던 시절도 있었을 테고 

자식들을 굉장히 사랑하셨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 5남매한테 아버지는 항상 

80년에서 85년 사이 그 기억밖에 

없던 거예요. 


아버지를 생각하면 

항상 가슴이 아프고, 

그래서 눈물 나오고, 묻어두고 싶고...

 

아버지를 여기에서 

해방시켜드려야 할 것 같아요. 


80년도 이전에 

그래도 행복하셨던 아버지. 

우리랑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던 

아버지로 기억하고 싶어요. 


그러려면 아버지가 명예회복이 

일단 되셔야 할 것 같고. 

저희 가슴속에 응어리가 좀 

풀려야 되겠죠.    

 

PD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자식으로서 어떻게 말씀드릴 것 

같으세요?


딸 제가 한번 상상을 해봤어요. 

그때 아버지가 강경대응을 해서 

유혈사태가 일어났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을 해봤는데 

상상도 할 수가 없었어요.


아버지 결정으로 인해서 정말 목포 

시민들이 죽고 다치고 유혈사태 

일어나서 광주와 같은 일이 

발생할 것을 생각하면 


그건 더 견디기 어려울 것 

같더라고요. 


아버지가 잘 처리를 하셔서

그런 일 없이 잘 끝났고. 


저희가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고 

한이 맺혀있지만 


아버지가 만약 그때 당시에 

다른 선택을 하셨더라면 

그건 더 힘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PD 가슴속에 아버지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있는 거네요?

 

딸 그동안 그런 이야기를 밖으로 

못 꺼낸데 대한 응어리는 있지만 


저희는 아버지를 부끄럽게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거든요. 


아버지가 그때 상부 지시를 따라서 

강경대응을 하고 거기서 유혈사태가 

일어났었더라면

 

저희가 평생 마음이 편치 않고 

부담을 안고 살았을 것 같아요. 


광주 민주화 운동이 얘기가 나올 때도

역설적이게도 목포에서 아무런 

피해가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 이름이 거론이 안 되는 거죠. 


너무 잘 해결을 하셨기 때문에 

거론이 안 되는 게 너무 역설적인 

상황이긴 하죠. 


광주에 모든 초점이 맞춰지고. 

역설적인 것 같아요 그런 일들은.  


영화 1987을 보면,
북한군에게서 온 가족을 잃은
박처원은 자기 안의 들끓는 공포와
혐오,복수심을 독재정권을 향한
절대 충성으로 변질시킨다.

또 민주화 운동 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과 고문을 자행해
출세를 도모한다.

반면,
같은 비극을 겪은 이준규 서장의 
태도는 완전히 달랐다.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경찰의 본분을 다했다.

6.25 전쟁 당시 최전선에서 나라를
구한 안병하 국장은 또 어떠한가? 

박 처원과 이준규!
전 두환과 안병하!

누구의 행동이 진짜 애국이자, 
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길일까?
답은 명확하다.

어쩌면 독재정권의 하수인들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반공이란 이념은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한낱 허울이나수단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또한 "아무 잘못이 없어 사표를
쓰지 못하겠다"는

이준규 서장의 씩씩하고
굳은 절개를 보며

진짜 보수의 면모를
확인하게 된다.

안병하 국장도 마찬가지다.

당시 신군부는
안병하 국장 개인의 잘못을
캐내기 위해 부정축제 사실을
샅샅이 조사했지만

혐의를 발견하지 못했고,
직무상 비리도 찾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직무유기 여부를 조사했으나
동 피의 사실을 발견할 수
없어 지휘책임을 물어
면직시킨 사건"으로,

전남도경국장
직무유기 피의 사건을
마무리하고 말았다.

오늘날 보수, 반공을
자처하는 인물들과는
무척 대조적인 모습이다.

보수를 자처하는 이들에게
다시 묻고 싶다.

박처원, 전두환의 길과  
이준규, 안병하의 길 중
어느 길을 따를 것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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