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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하 Jan 18. 2020

망각하지 않을 의지

표류 중입니다.

Photo by Simone Viani on Unsplash


며칠 전 김현 작가의 산문집 '어른이라는 뜻밖의 일'을 읽다가 눈에 들어오는 문장을 마주했습니다. "기억이란 행동성과 능동성을 요구하는 행위"이며 "희생된 이름으로써 역사는 추상적인 과거가 아니라 실제적인 사건이 된다"라는 허은실 시인의 낭독 글이었습니다. 작가님이 4.3을 추념하는 전시에서 보았던 '김순금'이라는 이름을 세월호 희생자 명단에서 다시 발견하고서 역사적인, 우주적인 차원의 ‘우연의 일치’에 대한 소회를 남겼습니다. 여기에서 주목한 것은 '기억이란 행동성과 능동성을 요구하는 행위'라는 문장이었습니다.


2020년 4월이 오면 세월호 참사의 아픈 시간을 보낸 지 어느덧 6년이 됩니다. 차츰 기억 저편으로 멀어져 가는 듯하면서도 '세월호’라는 단어를 보면 충격적인 사고 장면과 합동 분향소에서 느꼈던 감정이 되살아나 그날로 돌아가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세월호 참사’에 대하여 반복되는 정치권의 지리멸렬한 이념 투쟁과 아직도 뚜렷하게 구명되지 않은 진실로 인해 추모하는 마음이 점차 퇴색되고 지쳐갑니다. 6년이라는 기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세월호라는 단어를 꺼내거나 가방에 달린 노란색 리본만 보아도 혹자는 왜 자꾸 힘들고 피곤하게 만드냐며 이쯤 되면 그만 이야기할 때도 되었다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급급한 세상 일에 지쳐 관심사에서 잊은 지 오래입니다. 저 또한 그날의 다짐이 무색하게도 점점 무심해져 가는 스스로를 마주하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사실 인간이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 중의 하나는 망각하는 데 있습니다. 시련과 고통의 과정을 잊어버릴 수 있어야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가장 인간다운 삶의 방식이겠지요. 망각은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잊지 않는 것은 어떨까요? 그것 또한 잊는 것만큼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을 만지면 뜨겁고, 날카로운 것은 위험하다 등은 잊지 말아야 나중에 위협을 피하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요. 살아가는 데 있어 필수적인 인간의 행동 체계입니다. 어쩌면 생존을 위해서는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한 부분일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두 가지 행동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망각하는 것은 의지가 없다면 쉽게 일어납니다. 힘을 들이지 않아도 시간 안에서 사그라듭니다. 눈치 채지 못하게 서서히 일어나기 때문에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기억하는 것이 질서라면 망각하는 것은 무질서의 세계입니다. 물질계에서는 우주의 규칙을 따라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 질서에서 무질서의 방향으로 흘러가니 망각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의 순리 안에 놓여있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망각하지 않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무질서를 다시 질서의 세계로 견인하기 위해 힘을 써야 하기 때문이죠. 물고기가 살아남기 위해 강의 흐름을 힘차게 거슬러 올라가듯, 바다 깊숙이 가라앉은 배를 들어 올리기 위해 수많은 인력과 기술이 동원되듯이 그야말로 거대한 행동 에너지가 소비됩니다.


그렇다면 '세월호 참사'에 대하여 에너지를 소진함에도 불구하고 망각하지 않을 의지를 왜 우리는 가져야 할까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누군가는 힘드니깐 세월호 사고를 빨리 털어내고 잊어버리자고 합니다. 잊어버리면 여러모로 편안합니다.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의견과 생각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망각이 발현되는 과정은 너무도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야기를 하고 싶은 부분은 사건과 사고는 누군가를 특정해서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돈이 많거나 권력이 있다고 피해 가지 않습니다. 피해를 막을 다양한 보호막을 돈과 권력으로 산다면 남들보다 가능성이 줄어들 여지는 있지만 발생할 수 있다는 대전제는 결코 바뀌지 않습니다. 결국 안전한 상태에서 생존 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해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망각하지 않을 에너지만 가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냐고 물어본다면 하나 더 추가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바로 '상상력'입니다.


언젠가 영화 ‘부산행’을 보다가 좀비에게 쫓기던 사람들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 뒤늦게 도망치던 다른 사람들이 피하지 못하게 문을 막는 장면을 가지고 지인과 이야기를 나눈 적 있습니다. 도망치던 사람을 받아주다가 안에 있는 다수의 사람이 피해를 볼 수 있는 상황인데 당연히 문을 닫아야 한다고 의견을 말하였습니다. 다수의 사람을 살리는 방향은 합리적인 결정입니다. 다수를 위해 소수의 희생을 감수하는 방식이겠지요. 저는 반대 의견을 내었습니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쫓기던 사람들을 향해 문을 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두 의견에 정답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재미있는 것은 전자의 답변을 한 친구들 중 아무도 자신을 위험에 처하는 상황에 먼저 놓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인 상황에 자신을 두고 싶은 보편적인 심리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부분에서 상상력의 부재를 꼽습니다. 부족한 상상력으로 인하여 심리적 안정과 자기중심적 사고의 틀을 깨지 못한 것입니다. 합리적 주장 전에 본인이나 가족 또는 사랑하는 사람이 쫓기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봤어야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똑같은 가치 판단이 가능할 것인지 질문을 해야 합니다. 물론 잔인한 물음일 수 있지만 실제 쫓기는 쪽의 주인공이 된다고 상상하면 선뜻 답을 내리기 힘들고 고민은 더 깊어질 것입니다.


나아가 좀비에 쫓기는 상황이 반복된다면 도망치던 사람을 버리고 살아남은 자들은 결국 서로를 신뢰하지 못할 것입니다. 언젠가 바로 곁에 있는 사람도 위험에 직면했을 때 나를 좀비 떼 속으로 밀어버릴 수 있다는 의심이 마음속에 깊은 곳에 자리 잡을 게 분명합니다.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구성원들이 있는 불신의 사회는 안전과 행복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는 안전한 다수보다 소수의 약자를 우선 배려해야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소수의 약자가 배려받는 사회의 모습을 보며 언젠가 위험에 처하게 될지도 모를 상황에서 자신의 안전도 보장받으리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망각하지 않을 의지의 이유는 나, 우리 가족, 나아가 사회 구성원이 위험에 빠지지 않기 위함입니다. 망각하는 것은 위험을 잊을 순 있지만 피하지는 못합니다. 위험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다음에는 대비하거나 피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잊지 않는다는 것은 지치기 쉽고 힘든 과정이기 때문에 노력이 필요합니다. 행동성과 능동성을 발휘 해야 합니다. 피해자들 마음에도 공감을 해야 합니다. 공감은 상상력을 통해 발현됩니다. 신뢰 또한  공감의 에너지에서 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처해진 상황과 그때의 감정들에 대하여 상상해 봄으로써 상대방을 이해하고 공감을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안전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위험을 망각하지 않을 의지와 나에게 일어나지 않은 일에 공감할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문으로 달려오고 있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고, 희생된 이들을 기억하고, 왜 비참하고 끔찍한 일이 일어났는지 망각하지 않으며 그들이 처한 상황과 마음을 상상하는 우리의 능동적인 행동을 통해 우리가 서로를 지키는 안전하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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