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황홀했던 파리의 첫인상

프랑스 파리, 가르니에 극장

by 김태희
유럽에서 극장을 경험한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일이다. 그 나라의 예술을 온전히 체득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이니까. 미국이나 영국에 가면 뮤지컬을, 유럽에선 오페라를 봐야 한다는 배낭여행족의 불문율(!)은 사실 공연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극장에 간다는 것, 그곳의 극장문화를 체험한다는 것 자체가 색다르고 특별한 경험으로 남을 테니 말이다.
르와시 버스 티켓. 샤를 드 골 공항에서 오페라까지 연결된다.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시내까지 직통으로 들어갈 수 있는 르와시 버스에 올랐다. 샤를 드 골 공항의 다른 터미널을 거쳐온 터라 버스의 짐칸은 이미 가득 찬 상태. 타긴 탔는데, 앉긴 앉아야겠는데 내 키의 반쯤 되는 캐리어는 또 어떻게 한담… 고민하는 사이 현지인인 듯한 남자가 말도 없이 짐칸 가득 널브러진 캐리어를 차곡차곡 쌓더니 내 것을 가장 위에 올려주었다. '파리'라는 도시에 대한 인상이 '친절함'으로 물드는 순간, (부리나케 고등학교 때 배운 짧은 프랑스어를 떠올려냈다) 미소에 고마움을 가득 담아 "메흐씨(mercy)!"하고 외쳤다.


공항 터미널을 빠져나온 버스가 시내를 가로질러 마지막 정거장인 오페라(Opéra)에 도착했다. 극장에서부터 센 강까지 주욱 이어지는 대로를 중심으로 한 구역을 '오페라'라고 부르는데, 이름만으로도 프랑스 사람들이 극장과 예술에 얼마나 자부심을 느끼는지가 엿보인다. 아이로니컬 하게도 예술적 낭만으로 가득한 이곳은 집시의 공격이 난무하는 지역이라 그 공기를 흠뻑 느끼기도 전에 가방을 꼬옥 붙잡고 이동할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IMG_3757.JPG 가르니에 극장(Opéra Garnier/Palais Garmier) 전경. 대로 차가 씽씽달려 완벽한 극장의 모습을 담기가 쉽지 않다.


파리에 도착한 첫날. 14시간 비행의 고단함을 뒤로 한 채 추레한 얼굴을 단장하고 원피스와 구두를 갖추곤 가르니에 극장으로 향했다. 공연을 위해 수없는 연습을 하며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이 예술가의 자세라면, 극장의 격식에 맞는 옷차림과 관극에 최적화한 컨디션은 훌륭한 관객의 자질일 터. 사진으로만 봤던 극장을 실제로 보면 어떨지, 샤갈의 천장화는 얼마나 아름다울지, 황금궁이라는 말처럼 그토록 화려할지 궁금함과 설렘에 걸음이 바빠졌다.


단연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극장'이라 할 수 있는 가르니에 극장은 파리(국립)오페라(Opéra National de Paris)의 주요 무대로, 파리오페라(오페라단과 합창단, 발레단을 총칭)와 아틀리에 리릭, 발레학교가 속해있다. 어느 단체라도 대관만 하면 사용할 수 있는 우리나라 대표 극장 '예술의전당'과는 완전히 다르다. 뮤지컬·소설·영화 등 다양한 장르로 오래오래 사랑받고 있는 '오페라의 유령'의 배경이 바로 이곳이다.


IMG_3399.JPG
IMG_3440.JPG
IMG_3410.JPG


공연 시작 1시간 전,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오늘 공연의 티켓을 보여주고 극장으로 들어서니 위쪽으로 계단이 펼쳐진다. 영화 <오페라의 유령>에 등장하는 가면 무도회가 바로 이곳에서 열렸으리라. 객석 입구로 향하지 않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극장의 기념품숍으로 향해본다. 서적과 영상물 등 이곳에서 판매하는 자료는 도서관을 방불케 할 만큼 다양한데, 오페라 글라스나 발레용품, 액세서리도 눈을 뗄 수 없는 아이템이다.


계단을 올라가니 곳곳에 담소를 나누거나 와인을 즐기는 관객들이 가득하다. 유럽의 극장에선 공연 전과 인터미션 사이사이에 마카롱, 초콜릿 같은 디저트와 와인, 아이스크림을 판매하는데, 이를 즐기는 것이 극장문화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공연을 보기 전엔 졸릴까 봐 술 대신 커피를 마시는 나도 이곳의 분위기에 취해 샴페인을 들었다.


IMG_3462.JPG
IMG_3467.JPG


객석으로 입장하기 위해 로비 곳곳에 서있는 극장 안내원에게 말을 걸었다. 1층과 꼭대기층 객석 외에는 '박스석'이 있는 것이 이곳의 특징인데, 각각의 박스는 독립된 방처럼 구성되어 있다. 티켓을 보여주니 수십 개쯤 되는 박스 중 한 곳의 문을 열어준다. 막상 들어서려니 감옥 같은 느낌이 들긴 했지만 나만의 공간에서 작품을 감상한다는 생각에 설렘이 스쳤다.


과거엔 부유한 귀족이나 재력가들이 하나의 박스석을 통째로 구입해서 공연을 즐겼다고 한다. 실제로 박스석에 들어가 보니 코트를 걸어둘 수 있는 공간과 거울, 자그마한 소파까지 마련되어 꽤 넉넉한, 그야말로 하나의 방이 따로 없었다. 내가 예매한 좌석이 있는 박스엔 이미 한 커플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미국에서 프랑스로 여행을 왔고 이 공연을 보기 위해 세 달전에 예매를 했다고 한다. 꼬옥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에서 행복이 느껴졌다.


IMG_3448.JPG
IMG_3465.JPG 가르니에 극장의 샹들리에와 마르크 샤갈의 천장화


가르니에 극장은 곳곳이 예술로 장식되어 있다. 바로크 양식 등 건축적인 요소는 물론, 아름다운 천장화가 가득해 마치 작은 미술관에 들어온 기분이랄까. 그중 백미는 바로 객석에서 올려다 보는 샤갈의 천장화다. 모차르트 오페라 <마술피리>, 스트라빈스키 <불새> 등 공연 모습과 함께 파리를 상징하는 가르니에 극장, 에펠탑이 그려져 있다.


IMG_3391.JPG
IMG_3476.JPG


황홀했던 극장 구경을 마치고 자리에 앉아 초콜릿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공연을 보러 갈 때면 그곳이 어디든 내 방식대로 집중모드를 가동하는데, 핵심은 바로 초콜릿이다. 오늘 공연은 파리오페라발레단, 존 노이마이어 안무 <카멜리아 레이디>. 우리나라 관객들에겐 슈투트가르트발레단과 강수진의 내한으로 친숙한 작품이기도 하다.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와 왈츠를 곡으로 노이마이어의 안무 감각이 최대로 발휘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드라마 발레다. 공연 저작권을 보유한 단체가 많지 않아 작품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다. 공연 스케줄에 <카멜리아 레이디>가 있는 걸 보고 파리를 첫 여행도시로 확정해버렸을 정도니 말이다.


IMG_3485.JPG


공연은 기대 이상으로 좋았고, 아름다웠고, 황홀했다. 14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가르니에 극장, 박스석에서의 관극경험은 여행의 시작부터 유럽과 사랑에 빠지기에 충분했다.


*tip

공연을 관람하지 않더라도 극장을 살펴볼 수 있는 VISITEZ 티켓이 있다. 오후 5시까지만 입장 가능, 10유로. 극장 정문을 바라보고 왼쪽에 있는 관람객 입구/티켓 오피스로 들어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