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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도시에서 발견한 보석

이탈리아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

by 김태희
유럽에서 극장을 경험한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일이다. 그 나라의 예술을 온전히 체득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이니까. 미국이나 영국에 가면 뮤지컬을, 유럽에선 오페라를 봐야 한다는 배낭여행족의 불문율(!)은 사실 공연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극장에 간다는 것, 그곳의 극장문화를 체험한다는 것 자체가 색다르고 특별한 경험으로 남을 테니 말이다.



베네치아에는 딱 하루만 머물기로 했다. 그것도 만 하루, 당일치기로. 많은 여행객들이 이탈리아의 매력에 대해 예찬하지만 나는 꿋꿋하게 피렌체에 이틀, 베네치아에 하루만 있기로 마음 먹었다. 이유는 두 가지인데, 일단 밀라노·피렌체·베네치아·로마를 비롯한 이탈리아 전 도시에 관광객이 너무 많다는 점과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읽으며 느낀 '베네치아=음울한 도시'라는 선입견 때문이다. 여하튼, 아침 일찍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에서 트랜이탈리아 기차에 몸을 싣고 비가 조금씩 흩뿌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베네치아로 향했다.


물의 도시로 가는 길은 꽤 멋졌다. 가방 속에 넣어 다니며 틈틈이 읽어온 이병률 작가의 책과 독서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훌륭한 좌석. 게다가 물 위에 얹어진 철도 위를 기차가 달리는 광경은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정작 산타 루치아역에 도착하고 보니 예상대로 '어쩐지 조금 음울하고 쌀쌀했다'. 어쨌든 발걸음을 뗐다. '죽음'과 '물'의 도시일거라 생각했지만 예상보다 맑고 아름다웠다.


산타 루치아 역에서 나오자마자 보이는 풍경


기차역 바로 앞에는 가이드북에서나 보던 수상버스가 있었다. 도시 곳곳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고 그 아래엔 물이 흘렀다. 말 그대로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베네치아 본섬에서 수상버스를 타고 무라노섬이나 리도섬에 가곤 하지만(이곳에 가면 블링블링한 '인생샷'을 남겨올 수 있다고 전해진다), 아주 소박하게도 나는 물이 찰랑찰랑한 산 마르코 광장과 '전설의 불사조' 라 페니체 극장, 아카데미아 미술관 정도가 보고 싶을 뿐이었다.


이탈리아어로 '불사조(la fenice)'를 뜻하는 라 페니체 극장(Teatro La Fenice)은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극장이자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극장 중 하나이다. 19세기 주요 오페라의 초연이 이곳에서 이루어졌으며, 특히 로시니·벨리나·도니제티·베르디와 같은 벨 칸토 작곡가들의 주요 무대가 되었다. 두 번의 화재로 외벽을 제외하고 극장 전체가 소실되었다가 각고의 노력 끝에 예전의 모습을 복원했고, 2004년 재개관했다. 마에스트로 정명훈이 자주 서는 무대이기도 하다.


빽빽이, 그리고 나란히 자리한 수많은 건물을 보고 짐작했겠지만 베네치아는 길 잃기 딱 좋은 도시다. 정확하게 내 위치를 잡고, 깨알 같은 지도를 펴고, 철저하게 가는 길을 계산했건만 목적지에 다다르는 것이 이토록 어려울 줄이야. 직진하고 싶어도 놓인 다리가 없어 길을 돌려야 했고, 꺾어야 하는 때엔 정작 길이 없었다. 마치 사람의 인생같다랄까…. 결국 아이폰을 들어 GPS를 켜고 구글 지도로 현재 위치를 잡아 간신히 라 페니체 극장에 도착했다. 아니 그런데 극장 입구가 이토록 좁고 작을 수 있나?


어느 부호의 자택일 것 같은 백색의 건물에 대여섯 개의 계단, 중앙에 걸린 불사조상과 'Gran Teatro La Fenice'라는 간판(!)이 전부였다. 베네치아에 오기 전 파리에서 가르니에 극장에 다녀온 터라 이 광경이 매우 당혹스러웠다. 일단 들어섰다.


라 페니체 극장 무대의 모습


황금빛과 백색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극장 내부의 온기가 살포시 감쌌다. 안 그래도 쉴 새 없이 부는 이곳의 바람에 추위를 느끼고 있던 차였는데, 따뜻한 공간에 들어서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입장권을 구입하고 오디오 가이드를 받았다. 무려 5개국의 언어가 제공되지만 (한국어는 없었고) 그나마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를 선택하곤 투어를 시작했다. 곳곳에 장소에 해당하는 번호가 붙어있어 듣기가 편했다. 공연이 없는 날인데도 극장을 보기 위해 찾은 사람들이 많았다.


거울과 샹들리에가 있는 로비를 지나 객석에 들어섰다. 온통 금빛으로 가득한 이곳에 들어서는 관객들마다 탄성을 질렀다. 영원히 빛을 잃지 않을 것 같은 황금 장식에 요리조리 멋을 부린 것이 눈에 띄었다. 게다가 뭔가 엄중하고 진지해야 할 것만 같은 극장에 민트색이라니, 골드와 민트의 조합만으로 라 페니체 극장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독보적인 공연장으로 등극했다. 별을 수놓은 듯한 무대의 커튼도 이에 한 몫 했다. 오래도록 바라볼 수밖에 없는 곳곳의 아름다운 그림도 고풍스러움을 더했다. 엊그제 본 가르니에 극장과는 또 다른 화려함이었다.


이토록 화려한 공간에서도 최고는 따로 있으니, 바로 박스석 정중앙에 위치한 로열석이다. 과거에는 황제와 교황을 위한 자리로, 현재는 대통령이나 고위층, 주요 인사를 위한 객석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얼른 한 층 올라가 로열석에 앉아봤다. 두 개층을 통으로 뚫어 배치해 천장이 높고, 무대도 아주 잘 보였다. 더욱이 황제가 앉던 자리라니 감회가 남달랐다.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극장엔 로열석이 없는데 대통령이 공연을 본다면 어디에 앉아야 할까? 하는 생뚱맞은 생각도 하면서….



로열석에 앉아 바라본 보석 같은 극장을 눈 안에 꼭꼭 담고 다른 공간으로 이동했다. 리사이틀이나 체임버, 작은 모임을 진행할 수 있는 룸이 하나 더 있었다. 순간 어디서 향긋한 커피내음이 풍겨와서 방향을 틀었더니 카페테리아가 나타났다. 극장 직원인 듯한 사람들이 커피와 간단한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지친 다리도 쉬게 할 겸 카푸치노와 초콜릿 브리오쉬를 주문하고 앉았다. 이곳의 이름은 '단테룸'이라고 했다. 「신곡」으로 우리에게도 유명한 이탈리아의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의 생일을 기리며 만들었다고 한다.


극장을 나섰다. 다음번엔 꼭 이곳에서 오페라 한 편 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리곤 베네치아의 중심(?) 산 마르코 광장으로 향했다. 주말이어서인지 (걱정했던 대로) 관광객이 정말 많았다. 꿈에 그리던 극장을 본 덕분에 마음은 아주 따뜻했지만, 베네치아의 무서운 해풍은 더욱 차가워져 있었다.


멀리서 보이는 산 마르코 광장의 모습


*tip

라 페니체 극장은 공연 관람 외에도 극장 투어가 가능하다. 입장료는 9유로, 학생 할인을 받으면 6.5유로. 오디오 가이드 대여비가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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