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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늑한 극장, 짙은 감동

오스트리아 빈, 빈 슈타츠오퍼

by 김태희
유럽에서 극장을 경험한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일이다. 그 나라의 예술을 온전히 체득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이니까. 미국이나 영국에 가면 뮤지컬을, 유럽에선 오페라를 봐야 한다는 배낭여행족의 불문율(!)은 사실 공연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극장에 간다는 것, 그곳의 극장문화를 체험한다는 것 자체가 색다르고 특별한 경험으로 남을 테니 말이다.


이탈리아를 떠나 오스트리아로 가는 야간열차에서 만난 할머니는 날씨가 흐릴 거라고 했다. 자주 그렇다고 했다. 담요를 두 겹이나 덮고 덜컹거리는 기차에서 자는 경험도 나쁘지 않았다. 국경을 넘어가는 동안 맡겨두었던 여권을 돌려주면서 아침을 챙겨주는 승무원 아저씨 덕분에 꽤 일찍 잠에서 깼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이 기차 안에 스며드는 쌀쌀한 새벽 공기를 견딜 수 있게 해줬다.


IMG_3995.JPG 트램부터 우반까지 무엇이든 탈 수 있는 48시간 교통권


빈 서역에 내려 호스텔에 짐을 맡겨두고 바로 시내로 나왔다. 교통권을 끊어 능숙하게 오늘 날짜를 스탬핑 했다. 슈테판 성당을 비롯해 시내를 둘러보고 다시 들어올 계획이었다. 우반에서 내리자마자 게른트너 거리가 펼쳐졌다. 세월의 때가 탄 옛 건물과 과거의 건축양식을 살려 새로 지은 건물이 공존하는 거리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고즈넉함이 음악도시 빈의 첫인상이었다.


슈테판 성당 주변에는 모차르트 분장을 한 여럿이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호객행위가 한창이었데, 대화를 나눠보니 놀랍게도 이곳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구직을 위해 남부유럽에 왔다고 하는데, 오스트리아 정부의 승인 아래 이곳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분장이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음악가 모차르트의 모습이라는 데서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마치 경복궁 수문장 교대식을 맡고 있는 외국인을 본 느낌이랄까?


IMG_4022.JPG 슈테판 성당. 반쪽은 공사 중.


게른트너 거리의 중심, 슈테판 성당으로 들어섰다. 파리에서 보았던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가 장식된 성당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관광지가 아니라 삶 가운데 들어선 종교의 현장을 목격하는 기분이라 좋았다. 나는 종교가 없지만 짧게 기도를 드리고 움직였다. 이곳까지 무사히, 아무 사고 없이 여행하게 도와주셔서 고맙다는 의미에서….


시내를 쭈욱 돌아보고는 숙소로 돌아왔다. 야간열차의 피로를 쪽잠으로 달래곤 기분 좋게 샤워를 하고, 옷도 갖춰입었다. 미리 수령해온 티켓도 챙겨서 극장으로 향했다. 오늘은 빈 슈타츠오퍼에서 <마농>을 볼 예정! 빈 슈타츠오퍼(Wiener Staatsoper, Vienna State Oprea)는 우리식으로 하면 '빈 국립 오페라극장'이자 '빈 국립오페라단'이라고 할 수 있다. 파리오페라가 상주하는 가르니에 극장처럼, 빈 슈타츠오퍼 극장에도 오페라단과 발레단이 함께 있다. (발레단은 빈 슈타츠발레(Wiener Staatsballett)라고도 한다.)


IMG_4063.JPG 빈 슈타츠오퍼(Wiener Staatsoper, Vienna State Op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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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화가에 자리한 빈 슈타츠오퍼는 1918년에 건설되었음에도 말끔하고 세련된 외관을 자랑하는데, 특히 정면에서 볼 때 꼭대기에 하늘색 별 모양과 흡사한 가판을 세워둔 것이 특징이다. 가르니에 극장처럼 바로 앞에 도로가 위치해 있어-트램이 지나다닌다-꼭대기까지 한눈에 보기가 참 어렵지만, 한 번 보고 나면 극장 입구를 잊지 못하게 될 것이다.


IMG_4121.JPG 빈 슈타츠오퍼, 무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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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여느 극장과 다름없이 입구로 들어서면 로비로 통하는 계단이 펼쳐진다. 객석이 많지 않고 극장 자체도 크지는 않지만 내부가 고즈넉하고 아름답게 꾸려져 있다. 으리으리한 두 개의 극장(가르니에, 라 페니체)을 보고 온 터라 어쩐지 화려함보다는 아늑한 극장의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1층 객석을 제하고는 역시 박스석으로 구성돼 있었다. 특히 다른 극장보다 일본인 관객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는데, 아마도 클래식 음악 연주를 들으러 빈에 온 김에 발레도 보는 것이 아닐까 '혼자' 생각해봤다. (일본인의 클래식 음악 사랑, 일본에서 펼쳐지는 클래식 음악과 발레 공연은 어마어마하다.)


IMG_4056.JPG 캐네스 맥밀런 <마농> 캐스팅 보드


오늘 관람하는 케네스 맥밀런의 <마농>은 파리에서 관람했던 <카멜리아 레이디>와 마찬가지로 저작권 때문에 국내에서 볼 수 없는 작품이자... 향후 몇 년 안에도 만나보기는 어려울 작품이다. 아베 프레보의 동명소설 '마농 레스코'를 원작으로 하며, 오페라도 있다.(푸치니의 <마농 레스코>)


맥밀런 경의 드라마 발레로는 <로미오와 줄리엣>과 함께 <마농>이 명작으로 손꼽힌다. 그 특유의 테크니컬한 안무와 함께 감정선이 절절하게 흐르는 것이 특징인데, 실제로 관람한 <마농>은 롬줄과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동작 하나하나가 인상적이었다. 극적인 장면 묘사에서 안무가 정확하게 음악과 맞아 떨어지는 것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가장 아름다웠던 장면은 1막 2장의 마농과 데 그리외가 추는 파드되. 쥘 마스네의 음악, 특히 바이올린 선율에 맞춰서 데 그리외가 그리는 신체 라인이 정말 아름다웠다. 최고의 데 그리외로 손꼽히는 앤서니 도웰이나 마누엘 르그리의 아라베스크에 버금가는 무용수였다. 빈 슈타츠오퍼의 무용수들은 대체적으로 러시아의 무용수들처럼 장신인 덕분에 아래로 축축 처지는 튀튀를 완벽에 가깝게 소화해냈다. 적은 수의 무용수로도 무대가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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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농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결말로 다다르더니 막이 내렸다. 어쩐지 슬픈 마음이었는데 기립박수를 보내는 수많은 관객들 덕에 정신을 차리고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극장의 규모와 크기가 공연의 감동과 늘 비례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작고 아름다운 극장에서 진하게 응축된 감동을 선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