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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소리를 찾아서

오스트리아 빈, 무지크페라인

by 김태희
유럽에서 극장을 경험한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일이다. 그 나라의 예술을 온전히 체득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이니까. 미국이나 영국에 가면 뮤지컬을, 유럽에선 오페라를 봐야 한다는 배낭여행족의 불문율(!)은 사실 공연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극장에 간다는 것, 그곳의 극장문화를 체험한다는 것 자체가 색다르고 특별한 경험으로 남을 테니 말이다.


금빛에 취해서는 벨베데레 궁을 나섰다. 클림트의 <키스>를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암실 속에서 은은하고 고고하게 빛나던 그림, 그림 속 위에서 아래로 물 흐르듯 이어지던 남녀의 모습은 햇빛이 비추는 밖으로 나왔는데도 여전히 또렷했다.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뛰어난 안목은 없지만, 이건 훌륭한 작품이 틀림없다! 아쉬운 대로 기념품점에서 구입한 엽서(무려 금박이 들어가 있다)를 바라보며 경이로웠던 순간을 마음속에 새겼다.


무지크페라인 주변 바닥에는 음악가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무지크페라인(Musikverein)


음악도시 빈의 첫 번째 황금이 클림트의 <키스>였다면, 이제 두 번째 황금을 보러 가 보자. 트램에 올라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금세 칼스플라츠(Karlsplatz)에 도착했다. 여행 일정을 계획할 때부터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기대하던 극장, 매년 신년음악회로 클래식 음악팬들을 반기는 무지크페라인(Musikverein)이 오늘의 목적지!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무지크페라인은 빈 필하모닉이 상주하는 극장일 뿐 아니라, '최고의 음향'으로 손꼽는 곳이다. 애호가는 아니더라도 매년 신년음악회가 열리는 곳으로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빈 필 신년음악회는 KBS를 통해 매년 중계되어 한국에서도 볼 수 있다!) 나 역시 신년음악회는 아니더라도 연주회 하나쯤은 감상해보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내가 오스트리아에 있던 날짜에는 공연이 없었다. 꿩 대신 닭이라고, 극장 투어라도 하기로 마음먹고 이곳을 찾았다. 가이드 투어 프로그램은 다행이 독일어뿐 아니라 영어로도 마련돼 있었다. 그렇게 영상에서만 보던 황금홀에 입성할 수 있게 됐다.


극장 가이드 투어 티켓. 명성에 걸맞게(?) 티켓에도 금줄을 둘렀다.


설레는 마음으로 조금 일찍 도착해 티켓 오피스에 앉아 있었다. 가이드 투어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익숙한 우리말이 들려서 고개를 돌려보니 한국인 부부가 아닌가. 투어에 참여하는 건 아니고, 내일 이곳에서 공연을 관람하는데 티켓을 미리 받기 위해 들렀다고 했다. 그들처럼 중년의 부부가 되어 손 꼬옥 잡고 이곳에 공연을 보러 올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


무지크페라인 황금홀 전경


1870년 지어진 무지크페라인은 사실 극장 외관이나 로비는 평범한 극장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 내부의 속사정을 속속 들어보니 정말 '음악'만을 위해 지어진 곳이 아닌가. 먼저, 가장 유명한 황금홀을 보자. 마치 황금칠이라도 한 듯 내부 전체가 금빛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이곳은, 사실 이름과 다르게 전혀(!) 황금이 사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1700여 좌석과 300여 석의 스탠딩&발코니로 구성돼 있고, 우리가 흔히 경험했던 객석과 달리 단차가 없는 것도 특징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곳이 유명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꼽을 수 있는데, 첫째는 신년음악회, 둘째는 훌륭한 음향시설이다. 매년 열리는 빈 필 신년음악회의 티켓 가격은 최소 90유로부터 최대 990유로까지 달하는데, 돈만 있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라 추첨을 통해 당첨되어야 구입할 수 있다. 가장 좋은 좌석들은 초대를 위해 판매하지 않으며,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아마 90유로짜리 좌석을 구입한다면 2층 구석 저어어어어어어기쯤에 앉을 수 있을 거라 했다. 투어에 참여한 모두가 눈을 반짝이며 듣다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름다운 오르간


훌륭한 음향의 비법은 '텅 빈' 구조 덕분인데, 조각과 장식부터 바닥과 벽까지 모두 속이 텅 비어 있다. (실제로 바닥도 굴러보고 벽도 두드려보았는데, 정말이다!) 그것이 훌륭한 음향의 비결이라는 사실에 뭔가 허탈감이 들긴 했지만, 한편으론 과학적 원리를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오케스트라 피트 위에는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오르간이 자리하고 있었다. 위층 양쪽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흉상이 자리하고 있는데, 모두 음악가들의 얼굴을 새긴 것이라고 한다. 다만 모차르트와 브람스는 있지만 베르디와 리스트는 없는 것이 의아한데, 그들에 대한 평가가 당대와 지금 어떻게 달라졌는지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음악에 관한 조예가 깊다면 어떤 음악가들의 흉상이 자리하고 있는지 하나하나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하다.



무지크페라인에는 황금홀만 있는 줄 알았는데, 리사이틀을 위한 공간 '브람스잘'도 있었다. 브람스잘은 오래된 건물이라 방음이 잘 되지 않는데, 이 때문에 황금홀의 소리가 흘러들어오는 것을 막는 이중문을 설치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문이 너무 좁아서 피아노를 들일 때마다 세워서 들여와야 한다고. 그럼에도 리모델링을 하지 않고 피아노를 매번 조율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고 한다. 아참, 브람스잘 객석 가운데에는 브람스 흉상도 있다.



전통적 구조를 자랑하는 무지크페라인이지만, 리허설룸은 굉장히 세련되게 꾸며져 있는 것이 반전이었다. (리허설이 용이하도록) 황금홀과 동일한 사이즈의 무대로 설계된 이곳은 반사판을 설치해 연주자들이 자신의 연주를 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객석에서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보이는지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리허설룸은 리허설'만'을 위해 사용하기엔 너무도 좋은 공간이라 종종 작은 공연을 열리기도 한다고.


'최고의 음향'이라는 수식어 때문에 무척이나 화려할 줄 알았던 무지크페라인은 클래식 음악을 위해 아주 짜임새 있게 만들어진 콘서트홀이었다.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전통을 고수하는, 로비는 소박하지만 홀만은 최고의 연주자를 위해 최고로 꾸며진 곳. 우리집 마루에 앉아 티브이로 중계되는 내년 빈 필 신년 음악회를 보고 있으면 이곳에 서 있었던 순간을 상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공연을 못 본 아쉬움을 달래며, 자허 토르테와 아인슈페너


*tip

극장 가이드 투어는 오후 1시 즈음 시간대가 정해져 있으며, 영어와 독일어로 진행된다. 소요시간은 45분에서 50분 정도. 친절하고 유쾌한 가이드의 설명과 함께 인증샷(!)을 남길 시간도 넉넉하게 주어진다. 홈페이지에서 예약 가능하며, 6.5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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