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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에서 마음을 나누다

독일 함부르크, 함부르크 슈타츠오퍼

by 김태희
유럽에서 극장을 경험한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일이다. 그 나라의 예술을 온전히 체득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이니까. 미국이나 영국에 가면 뮤지컬을, 유럽에선 오페라를 봐야 한다는 배낭여행족의 불문율(!)은 사실 공연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극장에 간다는 것, 그곳의 극장문화를 체험한다는 것 자체가 색다르고 특별한 경험으로 남을 테니 말이다.


화려하지도 않고, 볼거리가 많은 것도 아니지만 독일이라는 나라를 참 좋아한다. 가장 처음 가본 유럽이 베를린이기도 했고, 그곳에서 좋은 추억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독일은 참으로 인간적인 도시다. 이번 방문에도 뮌헨, 베를린, 함부르크 총 3개 도시에 들렀다. 그럼에도 친구가 손짓하는 만하임, 꼭 가보고 싶었지만 거리상 어려웠던 슈투트가르트, 피나 바우쉬의 부퍼탈 등 여전히 들르고 싶은 도시가 많다. 주마다 도시의 성격이, 풍경이, 냄새가 각각 다른 것이 독일의 가장 큰 매력이니 말이다.


이토록 매력적인 나라에서 참으로 볼 것이 없는 함부르크에 가겠다고 마음 먹은 건, 온전히 함부르크 발레단 때문이다. '존 노이마이어의 발레단'으로도 일컬어지는 이 단체의 춤이 보고 싶었다. 내한한다는 카더라가 몇 번 흘러가긴 했으나 여전히 한국에 올 기미가 보이질 않는 무용단체 중 하나이니, 결국은 내가 갔다.


함부르크 시청사


독일에 꽤 오래 지냈던 한 언니는, 함부르크의 매력은 '햄버거'와 '발레'라고 했다. 함부르크(Hamburg)가 햄버거(Hamburger)의 시발점이라는 건 많은 이들이 아는 이야기지만, '발레'는 좀 생소할 수도 있겠다. 이 작고 부유한 항구도시에 굳건하게 자리 잡은 함부르크 발레단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어쩌면 이 둘은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함부르크에선 최고의 햄버거와 최고의 발레를 지척의 거리에서 만나볼 수 있으니 말이다.


베를린에서 버스를 타고 3시간을 달려 함부르크 중앙역에 도착했다. 조금 습한 공기와 물 냄새가 이곳이 항구도시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몇 안 되는 관광지-지붕색이 인상적인 시청사, 알스터 호수-를 후룩 둘러보곤 저녁 공연의 티켓을 찾으러 향했다. 예약 확인증을 보여주고 두 장의 티켓을 받았다. 동행한 언니는 유겐트 카르트(Jugend Card)를 제시하곤 시야가 훌륭한 1층 좌석을 15유로에 손에 넣었다.


유겐트 카르트(Jugend Card)


*tip

함부르크에 거주하는 청년이라면 유겐트 카르트(Jugend Card)를 활용해보자. 가입비 15유로를 내면 발급받을 수 있다. 공연 당일 카드를 제시하면 잔여좌석에 한해 (원래 티켓 가격이 얼마든 상관없이) 15유로에 구입할 수 있다.



공연을 보려면 먼저 배가 든든해야 하는 법. 극장 바로 옆에 자리한 함부르크의 햄버거 명물 짐 블록(Jim Block)으로 들어갔다. 축축한 소스와 풀이 죽은 채소로 메워진 우리나라 패스트푸드점 햄버거와는 뭔가 달랐다. 잘 구워진 빵과 패티, 신선한 토마토와 채소, 소금만 뿌려진 감자튀김이 전부인데, 정말 맛있었다. 과연 함부르크의 명물이라 할 법하다! 함부르크에 들른다면 하루에 한 끼는 짐 블록 햄버거를 먹어줘야 할 것 같다.


함부르크 슈타츠오퍼(Hamburg Staatsoper)


함부르크 슈타츠오퍼(Hamburg Staatsoper)는 앞서 소개했던 빈 슈타츠오퍼나 파리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예술단체와 극장이 함께 있는 형태다. 이 극장 외벽에는 구스타프 말러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인데, 당시 함부르크 슈타츠오퍼(舊 함부르크 시립 가극장)의 지휘자였던 말러는 몇 년간 이곳에서 거주하며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이 극장의 첫 인상은 가르니에 극장이나 빈 슈타츠오퍼와는 다르게 굉장히 깔끔하고 최신 건물의 이미지였다. 주변 건물과 이질적이지 않고, 마치 서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극장의 하나라고 할까. 사실 함부르크 슈타츠오퍼는 그리 크지 않다. 내부도 마찬가지여서 곳곳에 서서 혹은 앉아서 쉴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가 여럿 마련되어 있었다. 그래서일까, 관객의 옷차림도 다른 극장보다 가벼웠고, '공연을 보러왔다'는 느낌보다는 일상의 한 부분을 즐기러 들른 모습이었다.



극장 안으로 들어섰다. 예매 당시 이미 좋은 좌석이 다 동나버린 상황이어서 3층 자리를 간신히 구했는데, 그 덕에(?) 위에서 객석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부채꼴 모양의 형태가 인상적인, 작지만 꽤 알찬 좌석배열이 눈에 들어왔다. 1층 좌석은 한 열 전체가 간격 없이 쭈욱 붙어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마치 바그너 축제 극장처럼. 덕분에(?) 중간에 앉은 관객은 공연 도중에 나가지도 못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2층부터 4층까지는 양 사이드에 날개처럼 발코니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마치 8명씩 탑승한 놀이기구를 보는 것 같았다.


젊은 관객으로 가득한 우리나라와 달리, 유럽의 주요 관객층은 60대 노년층이다. 그래서 해외 단체들이 내한하면 젊은 관객들로 가득찬 객석을 보고 놀라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나 역시 이곳의 풍경이 참 생경했다. 할아버지, 할머니쯤 되시는 분들이 자리를 채우고 계시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극장에 젊은 사람들이 오면, 예술을 즐기는 보기 드문 청년이라며 반기곤 한다.


이날 관람한 공연은 '브누아 드 라 당스' 2관왕에 빛나는 노이마이어의 최근작 <릴리옴>이었다. 3층 사이드에 앉았기에 객석이 1/3쯤 보이질 않았다. 어쩐지 아쉬움에 중앙객석을 살펴보니 서너개의 좌석이 비어있는 것이 아닌가. 인터미션을 틈타 몰래 자리를 옮겼다. 그곳 객석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내가 좌석을 옮겨왔다는 걸 눈치챘나 보다. 2막 시작 직전, 조명이 점점 어두워지자, 옆에 앉은 할아버지가 툭툭 치더니 본인 옆 좌석으로 오라며 자리를 내준다. 게다가 그 앞줄에 앉아있던 할머니는 자기가 그리 가겠다며 자신의 좌석에 앉으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덕분에 예매한 곳보다 좋은 좌석에서 공연을 만끽할 수 있었다. 함부르크에 떨어진 동양인 소녀는 잊지 못할 경험을 선물 받았다고….


2015년 10월, 함부르크 슈타츠오퍼의 모습(출처_Hamburg Ballett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