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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빚어낸 걸작

함부르크 발레단의 공연 두 편

by 김태희
극장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공연의 막이 오르면 더욱 빛이 난다. 극장만 보고, 미술관만 보고 그 나라의 예술을 알게 됐다고 할 수는 없는 법. 혼자 간직하기엔 아까운 공연의 감동을 전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마에스트로 정명훈이 너무 오래 서울시향을 맡았기 때문에 이 같은 폐단이 발생한 거라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함부르크 발레단과 존 노이마이어의 관계를 소개해주고 싶다. 만약 독일이 아니라 한국이었다면, 함부르크 발레단은 절대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련의 서울시향 사태처럼 이들의 관계를 ‘독점’이라 칭하며 깨뜨리려고 할 테니 말이다.


40주년을 맞이한 존 노이마이어와 함부르크 발레단


2012/2013 시즌 창단 40년을 맞이한 함부르크 발레단(Hamburg Ballett)은 규모 자체가 그리 크지 않지만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단체다. 설립부터 상임안무가 존 노이마이어(John Neumeier)와 함께 해온 것이 특징인데, 안무가이자 예술감독 한 사람과 43년을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 발레계에서 노이마이어의 위치를 생각해 볼 때, 함부르크 발레단의 오랜 투자(?)는 성공한 셈이다. 노이마이어는 거의 모든 신작은 함부르크 발레단을 통해 초연한다. 다작을 자랑하는 안무가인 덕분에 발레단의 무용수들은 새로운 작품을 계속 접할 기회가 생기게 되고, 동시에 발레단에서는 새로운 레퍼토리를 꾸준히 추가하고 있다.


연습실에서의 존 노이마이어 (c) DPA


함부르크 발레단은 창단 43년째인 현재 노이마이어의 작품 120편을 레퍼토리로 보유하고 있다. 상임안무가 존 노이마이어를 통한 해외교류도 활발한 편이어서 세계 곳곳의 초청 안무가의 작품 60편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지난 40년 간 30개 국가에 해외투어를 다녔는가 하면, 26개의 타 발레단과 무용수 혹은 예술가를 교환하는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함부르크에 방문했을 당시 주말 동안 볼 수 있는 공연은 두 편이었다. 노이마이어가 함부르크 발레단에서 처음 올린 전막작품 <로미오와 줄리엣>과 2011년 12월 공연된 신작 <릴리옴>. 연달아 서로 다른 작품을 올리는 것도 대단하다 생각했지만, 클래식과 컨템퍼러리를 오가는 작품 선정도 놀라웠다. 관객인 나는 덕분에 두 편의 멋진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사진 속 커플은 카스텐 정과 알리나 코조카루


브누아 드 라 당스 수상작

<릴리옴>


어쩌면 존 노이마이어의 2011년 안무 <릴리옴(Liliom)>은 발레계의 판도가 바뀌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치 미국 서부영화를 보는 듯한 복고풍의 배경, 말하고자 하는 것이 분명한 피켓들, 무대 위에 자리한 빅밴드까지. 이 작품은 모던발레를 완전히 잊게 하는, 그러나 컨템퍼러리 발레와는 또 다른 새로운 장르의 개척이라 할 수 있겠다.


<릴리옴>의 장면들 (c) Dance Europe


함부르크 발레단의 <릴리옴(Liliom)>은 몰나르의 희곡 '릴리옴'을 바탕으로 존 노이마이어의 안무와 미셸 르그랑의 음악을 통해 새롭게 탄생한 작품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기존의 전막 발레 작품이나 최근 새롭게 발표되는 작품과는 다른, 노이마이어의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이라는 점이다. 발레보다는 뮤지컬이나 영화와 유사한 직접적인 표현방식, 흥미로운 전개, 화려한 연출은 발레가 어떤 방식으로 발전될 수 있으며, 다원예술의 시대에 타 장르와 다양하게 조화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특히 그가 추구하는 독일의 표현주의와 세련된 움직임이 만나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현대적인 작품이 되었다.


작품은 크게 프롤로그와 일곱 장면으로 구성되는데, 노이마이어는 이 작품의 결말을 강조하기 위해 두괄식 전개를 선택했다. 색색의 풍선과 마냥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 신나게 연주되는 빅밴드의 음악은 결국 릴리옴의 비극적인 결말을 더욱 강조하게 된다. 무용수들은 춤추던 도중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서슴지 않고 손가락 욕을 하는 등의 기존의 발레보다는 뮤지컬적인 요소를 강조했다. 그리고 오케스트라와 빅밴드의 연주가 교대로 혹은 동시에 연주되며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을 들려주는데, 과연 '브누아 드 라 당스' 작곡가상을 받을 만한 것이었다. <릴리옴>의 음악은 기존의 발레는 물론, 클래식이나 재즈 그 어디서도 듣지 못했던 새로운 것이었기에 전체적인 연출에서 가장 센세이션 한 부분이기도 했다.


<릴리옴> 커튼콜. 빅밴드가 무대 위에 자리한 것이 특징이다.


그의 현대적 감각이 집약된 이 작품을 완벽하게 소화하는 함부르크 발레단은 과연 '노이마이어의 발레단'이라고 할 정도로 연출에 꼭 맞는 옷을 입은 모습이었다. 무용수들은 자유롭게 무대를 누비며 산뜻한 움직임을 보여주었고, 특히 직업소개소와 릴리옴의 죽음 후 등장하는 역동적인 남성들의 군무는 관객의 기대치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릴리옴과 줄리의 파드되는 아름다우면서도 애절했으며, 특히 릴리옴과 그의 아들(원작에서는 딸)이 추는 듀엣은 함부르크 발레단 남성들의 저력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모든 무용수들이 마치 악보를 읽는 듯 음악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추는 움직임이 인상적이었고, 그런 노이마이어의 안무는 발레가 섹시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매력적인 것이었다.


지금까지 본 수많은 프로그램북 중에서 가장 로맨틱하다.


노이마이어 안무의 집약

<로미오와 줄리엣>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Romeo und Julia)>은 1940년 라브롭스키 버전을 시작으로 크랭코(1962)와 맥밀런(1965) 버전이 발표되었고, 1974년 노이마이어 버전(1971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세계초연 후 1974년 함부르크에서 개작 초연) 이후에는 누레예프(1981), 마이요(1996), 그리고 사샤 발츠(2007)의 작품이 등장했다. 노이마이어 버전에는 동시대의 다른 작품들과 유사한 면이 있으면서도 특유의 그의 안무 스타일이 엿보인다.


우선 플롯을 1-2-3막이 아닌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넷째 날이라고 구분한 것이 차별점이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강렬했던 이들의 사랑을 드러낸 것이 아닌가 싶다. 배경이나 의상은 중세 이집트를 연상케 하는데, 전반적으로 옅은 톤에 캐퓰릿 가의 주황색과 몬테규 가의 푸른색을 강조했다. 로잘린이 등장하지 않는 대신 티볼트와 마담 캐퓰릿의 사랑을 강조했다. 시대의 흐름과 상관없이 맥밀런·마이요의 버전을 섞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원작의 극적 상황을 살리면서 안무는 간결하고 현대적으로 꾸며져 있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장면들 (c) Holger Badekow/Hamburgische Staatsoper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텍스트로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 온 존 노이마이어는 항상 자신의 작품을 통해 '문학을 재창조'한다고 표현한다. 그런 그의 신념처럼 <로미오와 줄리엣>은 동작 하나하나에도 고증을 거쳐 만들어낸 안무가 인상적이었다. 노이마이어의 움직임을 통해 상징이 드러나는 동시에 배경과 이야기 자체는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잘 살려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아름답고도 애절한 파드되로 시작하는 3막은 무대디자인을 간결하게 하고 무용수의 움직임과 신체에 주목하도록 했다. 특히 텅 빈 무대를 홀로 달리는 줄리엣의 모습은 사랑의 설렘부터 죽음의 두려움까지 망라하는 연출이었다. 가면무도회에서의 만남부터 발코니 파드되, 침실 장면, 그리고 죽음까지 이어지는 그들의 사랑은 비극으로 마무리되지만 막이 내린 후에도 사랑의 기운이 풍겨나던 모습이 잊히지지 않는다.


<로미오와 줄리엣> 커튼콜


지난밤 <릴리옴>을 공연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또 다른 작품을 능숙하게 소화해내는 무용수들을 보면서 이 발레단의 저력을 느끼게 됐다. 또한 단순히 무용수들의 직급에 따라 역할을 배분하는 것이 아니라, 무용수 한 명 한 명을 생각하고 그에 어울리는 역할을 쥐어주는 수장의 능력이 공연의 퀄리티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을 했다. 좋은 작품과 탄탄한 레퍼토리를 갖고 있다는데서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소화해야 빛을 볼 수 있다는 것을 함부르크 발레단을 보며 다시 한 번 느끼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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