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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희 Mar 04. 2018

국립창극단 김지숙

카메라 앞에 선 김지숙의 눈을 가만히 바라본다. 또렷한 눈매, 맑은 눈동자에 우수가 서려 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힐 듯이. 그 모습은 이내 아들 아스티아낙스를 꼭 껴안고 흘러가는 암운을 무심히 바라보는 안드로마케의 얼굴로 바뀐다. 여인들의 한이 뜨겁게 타오르는 ‘트로이의 여인들’ 속에서 그녀는 되레 차갑게 식어갔다. 지켜줄 수 없는 자식 앞에서 모성애는 그렇게 움직인 걸까.


고상한 외모와 도도해 보이는 이미지는 김지숙이 처음 무대에 오르던 순간부터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하지만 잠깐이라도 그녀와 대화를 나눠본다면 이는 그저 수식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여전히 수줍음을 많이 탄다”라고 말하는, 전라도 사투리 섞인 느릿한 말투와 너털웃음에 나는 빙긋 웃음을 지었다.


김지숙이 소리를 시작한 건 열다섯이었다. 또래나 후배들을 보면 보통 아홉 살, 무려 다섯 살에 시작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남보다 출발이 늦었지만 어려움이 크진 않았다고 회고한다.


“원래는 성악을 하고 싶었어요.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고, 음악 시간에 노래 시험을 보면 늘 최고점을 받았어요. 학예회 같은 걸 할 때면 자주 반 대표로 뽑혀 갔고요. 노래하는 게 재밌더라고요. 그저 노래가 좋아서 성악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거 같아요. 그런데 제가 전라북도 익산 출신이거든요. 시골이라 성악을 접할 길이 없던 거죠. 우연히 엄마 친구 분의 딸이 소리를 한다고 해서 거기를 쫓아갔더랬어요. 취미로 소리를 하는 할아버지가 가르치는 곳이었어요. 저는 언니 따라서 다닌 것뿐인데, 정작 그 언니는 소리를 안 하고 제가 계속하게 됐어요.”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던가.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국어 선생님은 그녀의 손을 붙들고 전주에 위치한 전라북도립국악원으로 데려갔다. 하루빨리 좋은 선생님을 만나야 한다는 선생님의 마음이었다. 그곳에서 민소완(성준숙) 명창을 만났다. 첫 소리 스승에게서 한두 해 배우고 광주예술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갓 입학한 김지숙의 소리를 들은 학과장은 “목소리도 좋고 노래도 잘하지만 발성은 기초부터 큰 선생님께 다시 배워야겠다”라고 했다. 그렇게 안숙선 명창과 연이 닿았다.


“으레 주말이면 레슨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어요. 그때는 안숙선 선생님의 제자가 많지 않았어요. 두 명인가 있었는데, 그중 저만 지금까지 소리를 하고 있네요.”


열다섯에 소리를 시작한 그녀는 채 10년도 되지 않아 무섭게 성장했다. 그리고 1997년 국립창극단에 발을 들였다.


“어릴 때 저는 그저 평범했어요. 그런데 우연찮게 노래를 시작하게 됐고, 길을 따라가다 보니 운명적으로 서울에 닿게 됐죠. ‘국립창극단이 내 목표다’ 이런 건 없었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나니 주위에서들 시험을 봐야 한다고 닦달해서 본 거였죠. 시험이라는 것이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고, 첫 번째에선 낙방했어요. 두 번째에서야 합격했죠.”


입단한 지 몇 해 지나지 않아 김지숙은 국립창극단의 새 얼굴로 부상했다. 주역 자리를 거머쥐었으니 ‘신예’ ‘차세대 명창’ ‘세대 교체’ 등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이 당연지사. 1999년 김명곤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극본과 연출을 맡은 완판 장막창극 ‘심청전’에선 유수정·최진숙과 함께 심청을 맡았다. 그야말로 ‘사건’이었다.


“배역 욕심은 없었지만 노래는 자신이 있었어요. 숫기가 없어서 연기는 잘 못했죠. 캐스팅 운이 따랐던 거 같아요. 당시 안숙선·유수정 선생님이 춘향으로 주목받는 때였는데, 제가 그 자리에 서게 됐으니 파격이죠. 안숙선 선생님은 오히려 저를 안 시키려고 하셨어요. ‘너는 향단이도 안 했는데 처음부터 춘향이냐’며 안 된다고 하셨죠. 노래는 열심히 할 수 있는데… 좀 서운하기도 했지만 어쩔 수 있나요.(웃음) 선생님께서 제대로 못 해내면 무대에 안 세우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결국엔 올랐어요. 제가 그때는 노래를 좀 잘 했거든요.”


이듬해 10월 국립극장 해오름에서 열린 베세토연극제에선 김지숙의 강단을 제대로 보여줬다. ‘베세토(BeSeTo)연극제’는 한·중·일 3국의 연극과 공연예술 교류를 위해 각국에서 번갈아 개최하는 축제로, 1994년에 시작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2000년에는 제3차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를 기념해 서울에서 행사가 열렸고, 고전 ‘춘향전’을 3부로 나눠 한국의 창극, 중국의 월극, 일본의 가부키로 공연했다. 그중 김지숙은 손진책 연출 창극 ‘춘향전’의 주인공으로 나섰다.


“공연을 준비하는데 자꾸 감기가 들고 몸이 안 좋은 거예요. 연습 도중에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약을 먹을 순 없고, 목은 하나도 안 나오고… 무대 위에서 온전히 다 보여주질 못하니 자존심이 상하더라고요. 안 하느니만 못한 것 아닌가 생각도 했지만 죽을힘을 다해서, 최선을 다해서 했어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잖아요. 지금까지, 아니 제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공연이에요. 나 자신을 뛰어넘게 한 작품이거든요.”


밀레니엄을 기점으로 김지숙은 쉼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춘향과 심청은 대부분 그녀의 차지였고, 창극만 아니라 스승과 함께 완창판소리 무대에도 자주 올랐다. 세계적인 오페라 연출가 아힘 프라이어의 ‘수궁가’(2012)에선 안숙선 명창과 번갈아 도창자로 나서기도 했다.


2012년, 국립극장이 시즌제를 도입하면서 국립창극단 작품에도 크고 작은 변화가 일었다. 판소리 다섯 바탕을 현대적 감각으로 선보였고, 유실된 판소리 일곱 바탕을 새롭게 무대에 올렸다. 판소리만이 아니라 희곡과 소설, 서양의 텍스트도 우리 소리를 입고 다시 태어났다. 비단 작품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동시대의 조류 앞에서 창작자와 작품뿐 아니라 배우들도 변화해야 했다. 김지숙에게 그 변화의 바람은 유독 세게 느껴졌다.


“새로운 조류에 적응하는 게 좀 힘들었어요. 입단한 이래 주어진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 쉬지 않고 노래만 해왔는데, 이제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죠. 원래 성격도 좀 내성적인데, 한동안 많이 우울했던 거 같아요. 대인기피증도 생겼고, 오디션도 안 봤죠. 그런 제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어느 날 김성녀 감독님이 부르시더라고요. 두 시간 정도 앉혀놓고 타이르기도 하고 용기도 북돋아주셨어요. 그때 다시 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고 할까요. 기회가 생겼죠, 그게 ‘옹녀’였어요.”


2014년 초연한 고선웅 연출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명실상부 국립극장을 대표하는 레퍼토리로 꼽힌다. 첫해엔 창극 최초로 26일간 23회 장기 공연하며 화제를 모았고, 초연 이래 3년간 꾸준히 재공연했으며 2016·2017년 공연은 객석점유율 100퍼센트를 상회했다. 이 공연에서 김지숙은 옹녀로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새롭게 썼다.



오랜 숙제를 풀다

올해로 김지숙은 입단 20년을 맞았다. 국립창극단이라는 입구에 들어서니 평탄한 길, 굴곡진 비탈길이 있었고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스스로를 단단하게 다시 세웠다. 지난해에는 반가운 수상 소식을 들려주기도 했다. 전라북도 남원에서 열린 제44회 대한민국 춘향국악대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것. 네 번의 도전 끝에 거둔 값진 결실이다.


“그건 자존심 회복이었어요. 국립창극단의 주역으로 무대에 서는 일, 당연히 쉽지 않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면 다냐, 소리를 잘해야지’라며 폄하하는 시선들이 있었어요. 또 한편으로는 창극단 공연에서만 얼굴을 비추다 보니 예전 관객들에게 잊힌 것도 있고요. 다시 인정받기 위한 도전이었어요. 쉽지 않았죠. 공연 일정이 계속 겹쳐서 체력적으로도 많이 힘들었고, 목을 너무 많이 쓰다 보니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가 어려웠어요. 나중엔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본선에선 ‘춘향가’ 중 이별가를 불렀어요. 상을 받고 많이 울었죠. 숙제 하나를 해결한 기분이었어요.”


오래도록 디디고 서 있던 자리에서 조금 더 멀리, 조금 더 높게 바라보는 일. 최근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한국음악과 박사 과정을 시작했다.


“극장에만 폭 파묻혀 공연만 하는 게 다 좋은 건 아니더라고요. 주변을 둘러보면서 살아야 하는데 너무 공연만 한 게 아닌가 싶었어요. 석사를 마친 지 20년 가까이 됐으니 박사는 꽤 늦은 편이죠. 학교 다니면서 제 부족한 점들을 채워나가고 있어요. 제자뻘 아이들이랑 같이 공부하는데, 견제나 시기·질투보다는 친구처럼 지낼 수 있어서 좋아요. 다만 학교에선 행정적인 부분까지 다 챙겨야 해서 그게 어렵더라고요. 극장에서는 노래만 하면 되는데 말이죠.(웃음)”


오늘날 창극은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해야 하는 존재론적 의무를 안고 있다. 공연예술의 경계가 점점 더 흐려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창극을 둘러싼 정답 없는 질문에 대한 김지숙의 생각을 물었다. 이내 ‘국립’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창극단의 분위기가 한차례 바뀌면서 개인적으로 슬럼프를 경험하긴 했지만, 전체적인 변화는 무척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연극이나 다른 장르의 연출가들이 국립창극단과 작업하면서 관객층도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창극 배우로서는 좋은 일이죠. 그런데 소리를 깊이 알고 좋아하던 분들은 발길이 뜸해졌다고들 해요. 소리꾼으로서는 아쉬운 부분이에요. 우리는 ‘국립’이잖아요. 나라의 녹을 먹고 있죠. 여기엔 전통을 보존하는 의무가 포함돼 있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우리의 작품을 보존하고 운영해 나갈 것인지가 중요한 시점인 것 같아요. 국립이니까 국립다운 작품을 하면서 새로운 시도도 잘 배분했으면 좋겠어요.”


자신이 처음 입단해 경험한 것처럼 이제는 다음 세대를 잘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꾸준히 세대가 바뀌면서 지속적인 발전이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다. 물려줘야 하는 자리에서 반드시 전해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 ‘전통은 지켜야 한다’는 신념이다.


“시간이 지나서 적당한 때가 오면 자연스럽게 물러나는 것에 대해 마음 아파하지 말자고 다짐했어요. 물론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재능 있는 후배들을 보고 있으면 부럽기도 하고,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무엇보다 대견하고요. 기회가 되면 후배들과 함께 작품을 해보고 싶어요. 제가 중심이 아니라 지원해줄 수 있는 역할로요. 그들이 모르는 부분은 제가 채워주고, 저는 그들에게서 젊은 기운을 얻을 수 있겠죠.(웃음)”


글 김태희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무용이론을 공부하고 있다. 월간 ‘객석’과 서울문화재단·국립극장에서 잡지를 만들었으며,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제12회 젊은 비평가상을 수상했다.

사진 전강인


*국립극장 월간 「미르」 2018년 3월호 ‘예술가의 초상’에 실린 글입니다.

국립극장 홈페이지에서 원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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