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부터 심리학 책을 함께 읽고 글을 쓰고 토론하는 심리 테라피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준원님 덕분에 좋은 책들도 읽고 모임을 갖게 되었다. 이번에 함께 읽은 책은 <감정을 읽는 시간>이다.
우리는 때론 감정을 극대화시키면서도 (가령 행복이나 기쁨 같은), 어떤 감정들은 무시하려고도 한다 (고독이나 수치심처럼 숨기고 싶은 감정). 그렇지만 이 책을 보면서 내가 좋아하거나 외면했던 감정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보고 싶지 않은 게 사람의 마음이다.
하지만, 보지 않은 것을 외면한 대가는 상당히 컸다. 나의 감정을 보지 않은 대가를 치르고 있는 요즘이다. 그래서 더욱 숨 막힌다. 나는 내 의지로 이 시기를 조금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라 처음엔 생각했다. 처음에는 나의 상황을 외면하고 싶은 욕심이 커서 일에 몰두하고 틈을 두지 않고 계속 무언가를 했다. 무엇을 꼭 할 필요 없는 시간에도 읽거나 쓰거나 무엇을 보거나 몸을 움직이거나. 나를 돌보려 노력하지 않았다. 바보 같았다.
나에겐 일종의 두려움과 공포가 있었다. 그 날 그때 몇몇 순간들을 다시 떠올리는 일은 지극히 상당한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면하려고 했다.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 건 인간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가능에 최대한 가까운 정도로 생각을 통제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나는 두려움이 컸고 무서움이 컸다. 지금도 그렇다. <감정을 읽는 시간>에서는 두려움이 한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두려움은 완전히 신체를 압도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두려움은 기쁨이나 행복보다 강력하다."
-조셉 르두-
무서움은 뱀을 만나거나 총이 발사되는 등 구체적인 사건을 향하며 즉각적 도피, 회피, 방어 태도를 유발한다. 반면 공포는 훨씬 더 복잡한 부정적 감정으로 가상의 위험을 향한다. 공포가 심해지면 그 무엇으로도 떨칠 수 없다. 그래서 위험을 보고 느끼는 구체적 공포는 우리 목숨을 보존해주지만, 공포심에는 우리가 이용당할 수도 있다. 온갖 위험에 대비한다는 보험 상품들, 무의미한 약과 치료도만 봐도 그렇다.
두려움이 큰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닥쳐올 미래가 가져다 줄 공포감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조셉 르두는 두려움은 완전히 신체를 압도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두려움을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밖에도 잘 안 나가고 특히 지하철을 한 달 동안 한 번도 타지 않았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항상 지하철을 타고 집과 회사를 왔다 갔다 했기 때문에 지하철 역으로 가는 길에서 느꼈던 감정을 겪고 싶지 않아서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아버렸다.
이런 불편하고 우울한 감정을 외면하고 피하려다가 결국 피하지 못했다. 상황은 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악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가족이 연을 끊어버렸다는 사실은 나를 더욱 비참하게 했다. 그 날을 기억한다. 혼자서 옷가지를 싸들고 집에서 지하철을 타고 오던 날. 마지막으로 엄마와 이야기한 날. 그 날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그때 나의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텅 빈 말이었는데. 몸이 좋지 않았고 피곤했다. 집에는 겨우 30분만 있다가 나왔다. 분노가 여전했고 나를 돌봐주지 않고 그 날 보호해주지 않았던 엄마에 대한 화가 남아 있었다. 엄마가 조금이라도 도와주었다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텐데. 자신도 피해자라는 엄마의 말이 너무 무책임했다. 그렇게 책임을 피하려는 엄마가 너무나 싫었다. 그렇게 엄마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거 하나 믿고 나는 집을 나왔는데...
그러니까 한 번 경험했던 공포는 언제라도 다시 돌아올 수 있다.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이 특정한 소리를 듣거나 냄새를 맡기만 해도 그 사건이 마치 실제로 일어나는 것처럼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다.
<감정을 읽는 시간>
그 날의 공포는 여전히 생생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숨을 못 쉬는 공포감이 밀려온다. 그러면 밖을 나가거나 누워있는다. 나가는 날은 그나마 힘이 남아 있는 날이다. 대부분 누워있는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공포감을 마주하게 되자 숨 막히는 순간들이 찾아왔다. 안 본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다. 여전히 내가 겪은 공포는 똑같이 내 눈 앞에 펼쳐진다.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강아지 달이는 나이가 많다. 대학생 때 처음 봤으니 이제 노견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달이를 보고 싶다. 달이는 이제 내가 아무런 조건 없이 상처 없이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가족이다. 달이랑 함께 하고 싶은데 보러 갈 수도 없다. 집에 두고 온 카드는 다시 만들면 되고, 여권은 재발급 받으면 되고, 옷은 사면되지만 달이는 다시 보지 못한다. 달이의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그렇게 내 삶의 일부이자 전부를 보지 못한다. 이런 사실들. 실제로 나에게 일어난 모든 상황과 사건들이 나를 힘들게 한다.
두려움과 공포는 나를 지배하는 감정이다. 이 감정은 끝이 나질 않는다. 그래서 더욱 힘이 든다. 시간이 지날수록 트라우마는 더욱 선명해진다. 고통을 이겨낸 사람들은 극소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그런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닌가 보다. 고통에 지고 무너지는 사람이다. 결국에는 내 감정은 나의 몫이다. 나를 돌보지 않았기에 불편한 감정을 오로지 내가 맞이한다. 그리고 이 순간들을 견딜 수 없다. 이제는 끝내야 한다. 마지막으로 달이가 보고 싶다.
4월은 너무 슬프다. 장국영이 떠났고, 아직 자기 손으로 무언가를 해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 떠났다. 슬픔이 차고 넘친다. 이런 슬픔은 처음이어서 어떻게 손 쓸 방법이 없다. 팬으로서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고 무책임한 어른으로서 죄책감을 안고 지낼 수 밖에 없다. 슬픔과 죄책감은 시간이 지나도 도무지 적응이 안된다. 살면서 익숙해지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은데, 왜 이런 감정들은 무뎌지지 않을까. 나에게도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4월이 예전같지 않다. 내가 보낸 4월은 처음 맞이하는 4월이다. 이런 4월을 맞이해 본 적이 없다. 이제 이런 4월은 마지막이 되었으면.
참고 <감정을 읽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