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종말의 허구』를 읽고 : 화폐라는 이름의 신뢰와 네트워크에 대하여
처음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때는 으레 경제 위기 때마다 등장하는 자산 배분 전략이나 투자 지침서일 거라 짐작했습니다. 혹시 그게 아니라면 경제 전망서 정도로 분류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난 뒤, 저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 책은 단순히 투자를 논하는 책이 아닙니다. 화폐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본 '국제 관계학'이자, '신뢰라는 자본의 흥망성쇠'를 다룬 깊이 있는 인문 사회서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공기처럼 당연하게 달러 기반의 세계 경제 체제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동안 미국이라는 국가가 보여준 경제 규모와 탄탄한 제도, 그리고 금융시장에 대한 굳건한 신뢰가 달러를 기축통화라는 왕좌에 앉혔습니다. 하지만 최근 그 기류가 심상치 않습니다. 중국의 맹추격과 더불어 스스로 '세계 경찰'의 지위를 내려놓는 미국의 고립주의 행보를 보며 사람들은 묻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달러의 시대는 정말 끝나는 것일까?" 하고 말입니다.
분명 달러의 위상은 예전만 못합니다. 미국의 외교적 신뢰는 곳곳에서 균열을 보이고 있고 세계는 점차 다원화되고 있습니다. 위안화나 엔화, 심지어 비트코인 같은 암호화폐가 달러 경제를 전복할 것이라는 자극적인 전망도 쏟아집니다. 하지만 저자는 매우 냉정하고 설득력 있게 상황을 짚어냅니다. 달러의 위기가 미국 경제에 보내는 경고일 수는 있어도, 그것이 곧장 달러의 몰락이나 다른 통화로의 완전한 대체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역설적으로 현재 전 세계에 달러를 완벽하게 대신할 만한 통화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크고 깊은 유동성을 가진 금융시장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미 세계 무역과 금융의 모든 표준은 달러라는 중력장 안에 있습니다. 위안화는 아직 기축통화가 되기에 제도의 투명성과 유동성이 부족하고, 암호화폐는 가치 저장 수단으로 쓰기엔 변동성이 지나치게 큽니다. 결국 영어가 국제 공용어이듯, 달러 역시 쓰는 사람이 많아서 더 쓰게 되는 강력한 네트워크 효과 덕분에 그 지위를 쉽게 잃지 않을 것입니다.
이 책에서 제가 가장 신선하게 느꼈던 통찰은 미국을 '금융 서비스를 파는 국가'로 정의한 대목이었습니다. 다른 국가들이 땀 흘려 물건을 만드는 '제조업 국가'라면, 미국은 그 물건들이 원활하게 거래될 수 있도록 금융이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대가를 받는 셈입니다.
서비스를 파는 기업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고객의 만족과 평판입니다. 저자는 이 지점에서 날카로운 경고를 던집니다. 미국의 경제적, 외교적 영향력은 '이성적이고 책임 있는 국가'라는 평판에서 나오는데, 만약 보호무역주의나 동맹과의 균열로 인해 이 신뢰 자본이 깎여나간다면 달러의 기반도 약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고객인 다른 국가들이 이 서비스를 불신하기 시작하면, 네트워크는 서서히 다른 균형점을 찾아 이동할 준비를 할 것입니다.
저자는 달러를 '자연법'에 비유합니다. 강제된 법이 아니라 관습과 편익, 그리고 구성원들의 신뢰로 유지되는 질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달러 가치의 하락은 단순한 환율의 조정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미국의 재정 건전성, 정치적 안정성, 그리고 통화 정책에 대한 전 세계적 신뢰에 빨간불이 켜졌음을 알리는 경고 시스템입니다.
책을 덮으며 저는 투자의 기술보다 더 중요한 본질을 보았습니다. 화폐는 결국 차가운 숫자가 아니라, 그 숫자를 보증하는 주체가 보여주는 '태도'와 '신뢰'에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결론적으로 달러의 위기는 실재하지만, 당장 그 종말을 논하는 것은 허구에 가깝습니다. 다만 그 허구가 언젠가 진실이 되지 않기 위해 미국이, 그리고 우리가 지켜내야 할 가치는 무엇인지 이 책은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거시적인 경제의 흐름 속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싶은 분들이라면, 저자의 전문성과 혜안이 담긴 이 책이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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