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섬기는 이는 굴에 살았고 그 곳에서 가장 신통했다.
나는 가끔 그녀를 보기 위해 지하의 공연장을 찾았고, 상처를 가시화한 그녀의 공연은 나에게 늘 고통을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기묘한 경험을 선사했다.
여전히 그녀를 보러 이곳 저곳을 다니던 나에게 한 번은 꼬리 같은 남자애가 따라붙은 적이 있었다. 서커스와 마술에 능한 신기한 친구였으며, 그게 아니더라도 퍽 재밌는 구석이 많은 사람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신이 나 어땠느냐고 묻는 나에게 그는 단호히 말했다. 아주 별로였다고. 그녀의 아우라에 굉장히 기대했으나, 공연의 구성은 그만치 촘촘하지 못해 실망이었다고. 기대하던 답변이 돌아오지 않자 나는 순식간에 아주 화가 난 얼굴이 되어 그녀가 살아온 삶이 맥락적으로 얼마나 예술적인지와, 그녀가 가진 시사점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에 대해 토로했다. 그 남자애는 잠시 나를 내려다보더니 무언가를 꿰뚫어보듯 말했다.
너는 지금 그 사람의 권위를 바탕으로 내 감상을 누르려 하는구나.
나는 그녀를 모르는 채로, 지금 이 공연만 보고 감상을 남길 권리가 있는데도.
나는 입을 꾹 닫은 채 그 눈을 노려봤다. 그의 말에 굉장히 괘씸했으나 그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그는 공연에 돈을 냈으며, 이 공연에 대해 감상을 남길 자유가 있었다. 그럼에도 왜 나의 내면은 그를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존재처럼 불경하게 생각하는가.
사실 나는 그 순간에도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
그것은 바로 내가 자발적으로, 나와 그를 소비자가 아닌 추종자로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임을.
현실과 유리된 정신을 가진 이들은, 함께 모여 공통된 믿음과 행동, 상징을 공유하며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믿음을 몸으로 실천하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세계를 이루는 무형의 벽은 단단해지나, 그러한 실천은 현실세계에서의 손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의 몫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기꺼이 행동하는 자는 자연스레 권력을 가지고 숭배를 받는다. 행동하는 당사자가 어떤 의도였건 간에, 섬기는 자들은 생기기 마련이고 자연스럽게 왕관이 씌워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에서 예술적 방식으로 집단의 믿음을 실천하는 이는, 예술가라기보다는 제사장의 역할을 한다. 몸을 던져 세계의 벽을 공고히 하는 의식을 치르는 존재인 것이다. 세계에 거주하고자 하는 이들은 관객이란 탈을 썼으나 마치 님프처럼 그들을 섬기며 그들이 베푸는 세계의 은혜를 입는다.
따라서, 어떤 세계에서는 창작자에게 완성도보다 과감함이 더 큰 가치가 된다. 관객이 원하는 것은 수준 높은 예술이 아니라, 그들을 세계에 몰입시켜줄 더욱 강력한 주술이므로.
이들에게서 일반적인 예술가와 소비자 간의 관계를 기대하기는 어려우며, 비평이 오가는 문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소비자는 자신이 거주하기 위해서는 실천자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고, 그들의 실천 의욕을 꺾는 비평은 자신이 거주하는 터를 불안정하게 만드므로.
저 분은 너무 아름다우셔요.
길게 붙인 속눈썹이 흔들린다. 긴 손톱을 바른 손을 입가에 가져다대며 하는 말에 나는 언뜻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본다. 치렁한 치마에 짙은 눈화장, 비슷하게 길다란 손톱.
못지 않게 예쁘셔요.
그녀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지만 장르의 바깥에 선 내 눈엔 정말로 그랬다. 비슷한 스타일의 여자 둘. 다른 것은 누가 더 자기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며 살고 있는가, 단지 그 뿐.
누군가를 추앙하는 이를 보며 나는 생각한다. 나는 왜 그 공연자를 섬겨왔는가에 대해.
나는 오래 전부터 내 안에 어떤 비주류성이 있다고 믿었다. 다르게 태어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면, 내가 주류세계를 살아오면서 마주한 내면적 고통이 전부 어리석은 낭비처럼 느껴질 것만 같았다.
따라서 나는 스스로의 일부를 비주류 세계에 두고 싶은 욕구를 느꼈고, 그렇기에 그 세계의 구성원들이 으레 하는 행동을 함께 실천함으로써 나도 그 세계의 일부가 되고자 했다.
그리하여 나는 세계의 구성원들이 그러하듯 제사장을 섬겼다. 섬김 자체가, 소속되기 위해 집단의 행동을 따라하는 하나의 의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의 비주류성을 확인하고 싶다는 나의 욕망은 꼭 타인이 창조한 세계 안에 거주해야만 가능했던가.
왕과 신하들은 자신들이 함께 사는 세계 안에서 편안하게 가라앉는다. 이러한 역할극은 종종 두 계층 모두의 성장을 막아, 이들을 더욱 고립시키기도 한다.
나는 편하게 욕망을 채우고자 공연가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녀를 왕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스스로의 비주류성을 직접 표출하여 확인하는 번거로운 일을 손에서 덜었다. 그쪽은 시간이 많이 들며, 창피한 시행착오를 견뎌야 하는 경제적이지 못한 일이었으므로.
그러니 따르는 이들은 생각해보아야 한다. 왜 스스로 누군가를 따르는 위치를 자처하려고 하는지.
왜 어떠한 가치관을 가진 세계에 속하고 싶었으며, 그 욕망은 꼭 타인의 세계에 속해서만 이룰 수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고백한다. 나는 편하게 욕망을 채우고자 상대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녀를 왕으로 만들었다. 비주류 세계의 창작자는 이러한 원리로 스스로 권력자가 되고자 하지 않아도 권력자가 되며, 생산자로서 받아야 할 비평과 성장을 놓치기 쉬운 구조에 놓인다.
그러니 그들이 진정 제사장이 아닌 창작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권력 구조가 통하지 않는 곳을 향해 스스로 걸어 나가야 한다. 과감함이 아닌 정직한 훈련을 통해 평가받고 성장을 요구 받는 환경을 향해서.
나의 역할이 대상에게 성장이 아닌 나태함을 남긴다면, 그것은 이타적 헌신이 아닌 자기애가 아닐까. 의존에서 벗어나, 내가 가야 할 길을 직시하는 자립이야 말로 나와 상대를 지킬 것이다.
그러니 당신, 손을 놓고 스스로 가야 할 길을 똑바로 보라. 다 함께 헤엄을 멈춰 가라앉지 않고, 왕도 신하도 없는 혼자만의 길을 향해 스스로 나아가며.
그 길 위에서 비로소, 개인은 그 자체로 온전한 하나의 세계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