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감상이 공짜가 된 시기
좋아하는 노래를 듣기 위해 라디오의 채널을 돌리며 주파수 사이를 헤매어본 적이 있는가. 이리저리 다이얼을 돌리며 번호를 바꾸고, 하나의 방송에 오래간 머무르기도 해보며 디제이가 바로 그 노래를 틀어주기를 바라는 갈증과, 기어이 원하는 노래를 마주했을 때의 기쁨 말이다.
오래된 레코드 샵의 바이닐을 만지작거리며 가격을 점쳐본 적이 있는가. 테이프가 끊어질까 조마조마한 채로, 좋아하는 노래를 이어붙여 카세트를 만든 적은. 모든 좋아하는 것들을 감상하기 위해 굉장히 수고스러웠던 그런 기억. 기술이 없던 시절, 당연스레 감상을 위해 깊은 정성을 지불해야 했던 아주 비경제적인 낭비 말이다.
창작이란 것의 유통이 매우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책을 읽기 위해 필사를 해야 했던 아주 수고스러운 시기. 아주 오래간 이어지던 감상의 독점은 인쇄, 사진 등 기록의 수단이 발달하며 그 판도가 바뀌었다. 갇혀있던 영감이 모든 거리를 타고 흐르며, 많은 사람들에게 예술은 드디어 지불 가능한 것이 되었다.
나아가 책이며 악보, 바이닐과 비디오 테이프 등 단순히 기록을 하나의 물체에 담아 전달하던 시기를 넘어, 전파를 이용해 송출을 하는 방송 매체의 발전은 감상이라는 행위의 비용을 거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미디어가 선택적으로 감상할 거리를 아주 낮은 대가로 제공해주던 시기. 사람들은 시간에 대한 인내만 있다면 원하는 것들을 금전적 대가 없이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더욱 흘러 플랫폼의 시대가 열렸다. 미디어가 더 이상 사람들의 검색 앞에서 시혜적으로 제안하는 위치마저 될 수 없는 시기. 사람들은 더 이상 어떤 것도 기다릴 이유가없었다.
무언가를 감상하기 위해 아무런 비용도, 아무런 인내마저도 필요하지 않은 시기가 온 것이다.
2. 저렴한 것을 귀하게 여길 순 없어
너 좋은거 골랐다. 강렬한 붉은 색이 녹빛 섬유에 조화롭게 녹아든 니트를 들자 나의 친구는 말한다. 그는 플리마켓에 셀러로 초대받아 작은 부스를 냈고, 한 때 아끼던 옷들을 걸어둔 채 여러 지인이며 손님들을 상대했다. 미쏘니의 니트를 든 채 웃는 내게 그는 난감한 듯이 말한다. 비싸게 받고 싶지는 않은데, 거저로 가져가면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까봐 고민이라고. 결국 우리는 니트의 가격 흥정을 두고 가위바위보를 했다. 내가 손을 펼치니 주먹을 내밀었던 친구는 그저 활짝 웃는다.
여즉 작은 흠하나 없이 잘 입고있는 니트를 매만자며 나는 생각한다. 아주 좋은 브랜드의 옷을 그만한 값 없이 쉽게 얻었다면 어땠을지에 대해. 아무래도 그의 예상처럼 나는 그 옷을 그렇게 진지하게 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옷의 절대적인 완성도에 관한 문제는 아니었다. 첫째로 내가 이걸 얻기 위해 내 삶의 에너지를 아주 적게 사용했기 때문이고, 둘째로 물건이 가치란 대외적으로 매니아적인 기준이 있다 한들 그걸 잘 꿰고 있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주관적이라, 근거가 될 만한 것이라고는 이를 얻기 위한 나의 고생과 사회가 쳐준 값 뿐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무료로 창작물을 제공하고, 내가 감상을 위해 고생을 하지 않는, 말 그대로 클릭만으로 모든 걸 접할 수 지금의 환경. 많은 사람들은 이 속에서 창작물에 큰 가치를 매길 수 없게 되었다. 낮은 가치의 작업물을 감상하는 데 큰 시간과 고민을 쓸 수는 없기에,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창작물의 완성도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줄이게 되었으며, 하나의 창작물에 오래 머무르지 않게 되었다. 지금 흐르는 노래가 3분이건 2분이건, 그런 것이 대체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 어차피 한소절을 듣고 나면 아주 값이 싼 다른 노래가 기다리고 있을텐데.
3. 정통아트는 컨텐츠가 될 수 있는가
대학생 시절, 나는 여느때처럼 작업복을 입고 먼지를 털며 아버지에게 돈을 좀 빌렸다. 딸에게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전화를 받았던 아버지는 바쁜 아침에 이런 일은 문자로 하라며 타박을 놓는다. 나는 적당히 쾌활하게 웃어넘기고는 전화기를 바짓주머니에 넣으며 털레털레 작업실로 돌아간다. 어떻게든 재료값이 생겼으나 한 달이 좀 남은 기한 안에 의자 하나가 나와줄거란 각이 도저히 서지 않았다.
세상은 많은 창작을 크리에이션이라 부르고, 그 모든 것들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크리에이터라는 멋진 직함을 주었다. 그러나 세상에는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너무도 많은 시간과 비용을 쏟아붓는 크리에이터들이 존재한다. 아주 극단적으로는 건축가부터, 소소하게는 순수예술을 하는 화가와 조형작가들 등등. 눈 뜬 시간을 모두 바쳐도 대중, 그리고 알고리즘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사람들. 상품성 있는 빈도로 무언가를 창작할 수 없는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세상에 보여질 수 있을까.
갤러리 혹은 아티클이라는 전통적인 소개 방식 너머로 두각을 보이는 창작자들이 생겨나고 있는 지금, 10년이 넘는 시간을 바쳐 30대 중후반에 신진작가가 될 여건이 없는 저빈도 창작가들은 기껏 생긴 새로운 돌파구를 활용할 수 없어 좌절했다.
4. 물감의 잔해와 잘린 머리카락
거대한 맥락을 감상할 여유 없는 파편화의 시대. 내친 김에 하나의 작품도 점차 사방팔방으로 갈라졌다. 캔버스의 밑칠과 스케치, 채색 part 1과 part2, 운송과 전시 과정까지. 작은 발전을 만들기 위해 큰 시간을 투자하는 작업. 시각적으로 지진부진한 컨텐츠에 지루하지 않도록 과정마다 개인의 에피소드나 철학 등 자기의 어떤 부분을 함께 버무려 내놓으며 예술가들은 최대한 과정을 상품화하기 시작했다.
물감에 젖은 작품이 마르는 동안 생겨나는 정적 역시 기다림의 낭만이 아닌 치명상이 되었다. 어떻게 그 시간에 도움을 주러 찾아온 동료와 커피를 갈아 내려마시며 작업에 대한 기대감을 논할 수 있을까? 결국에 이들은 멈춰있는 알고리즘을 깨우기 위해 스스로의 일상이며 라이프스타일, 취향마저 상품화하여 공유한다. 겨우 붙잡은 시선이 흩어지지 않고 머무르도록.
이런듯, 권위의 선택을 받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사람들, 그리고 세상에 창작을 드러낼 수만 있다면 그 방식은 아무래도 상관 없는 사람들. 그들은 필연적으로 트래픽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좇기 위해 창작의 부산물과 삶의 일부를 잘라 전시하는 전략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자기 자신을 올려세우기 위한 커다란 다이를 짜서.
5. 그래도 진정성은 무사할 수 있다.
아티스트들이 스스로의 바이럴로 대중에 알려지고, 그 인지도를 활용해 전시기회를 얻는 시대. 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작품의 이미지를 해치지 않으며 과정을 상품화할 방법을 고민한다. 피할 수 없는 흐름마저 작품의 일부로 여기며 구상을 게을리하지 않는 이들을 두고, 전통적인 방법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수준을 폄하할 수는 없으리라.
이러한 과정의 공유마저 창작의 한 부분으로서 활용하는 이들이 있는 한 말이다. 누군가는 스스로의 작품에 투입된 노동력과 정성을 기록을 통해 증명함으로써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누군가는 간결한 작품의 외형 안에 숨겨진 맥락의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해 고민과 사유를 업로드한다. 필연적으로 찾아온 자기 전시의 시대마저도 작품의 가치를 증명하는 기회로 삼은 이들은 그야말로 진정한 창작가이다. 전시장에 세워지더라도 그 자세만큼은 스스로가 고를 수 있다고 믿고 있는 한.
6. 진짜가 만들어낸 미래 신뢰
과정과 삶의 부산물이 컨텐츠화 되는 것이 당연해지며,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미완의 영감 표출도 예술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파편도 언젠가는 완결된 작업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이전까지의 크리에이터들을 통해 학습하였기 때문에. 혹은 낮은 퀄리티를 가진 작업을 보여주더라도 이들은 더 나은 예술가가 되기를 꿈꾸고 있고, 물밑에서 노력을 계속할 것이라 믿기 때문에. 실제로 아무것도 아닌 쇼츠 크리에이터로 시작해, 갤러리가 인정하는 어엿한 작가가 되었던 이들을 비춰보며.
이렇게, 미완성에 대한 미래 신뢰는 대부분 미완성을 통해 무언가를 성취해온 크리에이터 집단에 대한 신뢰를 담보로 한다. 이로 인해 모은 시선은 개인의 매력이라는 능력으로 얻은 개별 자산이 아니며, 하나의 가문이 함께 사용하는 신탁자금에 가깝다. 이러한 신탁자금을 잘 경영하여 후대의 크리에이터들에게 더욱 좋은 조건을 물려주는 것이야 말로 현재의 루키들이 가진 의무가 된 것이다.
7. 기대감이라는 One Shot
물감을 던지고 거칠게 몸에 문지르며 춤을 추는, 화가라기 보다는 댄서에 가까워보이는 창작가. 테이블을 두드려 박자를 맞추며 미완의 곡으로 잼을 하는 음악가. 그림을 그린 종이를 순식간에 찢어발기는 예술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모를 파편들을 감상하며 스크린을 넘기는 미디어의 대중들. 나는 눈을 감으며 방금 스쳐지나간 이들 중 누가 진짜 창작을 하는지, 누가 단지 관심을 사용하고 있는지를 점쳐본다. 아마도 세 번째로 본 화가는 진짜인 듯 하고, 마지막으로 본 음악가는 가짜인 것 같기도 했다. 그 반대라고 해도 사실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너무도 많은 이들이 창작의 부산물을 공유하는 시기. 당장에 누가 진짜인지 알 방법은 없기에, 우리는 우선 이들 모두에게 관용적으로 믿음을 보낸다. 그러나, 밀려드는 크리에이터들 모두를 기억하고 다시 찾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크리에이터를 신뢰해야 할 이유를 찾기 시작한다. 그들이 단순한 관심몰이가 아니라, 창작을 하고 있다는 증거를.
이러한 과정에서 다양한 상징으로 상상을 유도하며 만들어낸 미래의 모습과 가까워지는 변화를 보여주지 못한 이들은 자연스럽게 대중의 기억에서 정리되며 잊혀진다. 약속을 지키지 않아 잃어버린 믿음은 대개 돌아오지 않는데, 이러한 신뢰의 하락은 보통 개인의 선에서 끝나지 않고, 씬 자체의 인식 저하를 초래하게 된다.
결국 한 번은 세상에 나를 드러내야 하는 지금의 시대. 창작가들이 나의 예술을, 그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를 빛낼 수 있는 한 발의 신호탄을 쥐고 있는 작금의 상황. 부디 무언가를 보여줄 준비가 되었다는 강한 확신이 그들의 방아쇠를 당겨주기를 기대한다. 대중과의 약속을 지켜온 이전의 창작가들,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대중의 믿음이 보다 견고해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