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더스 헉슬리
'멋진'이라는 수식어가 이토록 낯설고 서늘하게 느껴질 수 있을까. 올더스 헉슬리가 그려낸 이 세계를 읽으며 나는 역설적으로 어떤 확신에 도달했다. 멋지지 않은 것을 '멋지다'라고 부르는 그 뒤틀린 명명이, 오히려 내가 끝내 놓을 수 없는 것들을 더 선명하게 했다.
"아기들은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책과 꽃에 대한 '본능적' 증오심을 가지고 성장할 것입니다. 영구불변하게 심어준 조건 반사인 것입니다. 그들은 평생 책이나 식물로부터는 안전할 것입니다."
사람에게 책과 꽃은 무엇일까. 책장을 넘기면 머릿속 어딘가 삐걱거린다. 꽃은 그 틈으로 향기처럼 스며든다. 효율의 잣대로 보면 지극히 쓸모없어 보이지만 바로 그 무용함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 헉슬리의 신세계는 그것들을 제거함으로써 인간을 안전하게 만든다.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감동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 고통 없는 평온함.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바라왔던 안식의 모습과 닮아있다.
멋진 신세계에서 '엄마'라는 존재는 역겹고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사랑, 가족, 헌신. 이 모두는 필연적으로 번뇌와 고통을 동반하기 때문에 고귀하다고 여겨온 것일수록 '멋진 것'과 멀어진다. 신세계의 시스템은 이 번거로운 감정들을 거세함으로써 완벽한 안정을 구축한다.
그러나 엄마라는 이름 안에는, 그리고 그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모든 번거로운 감정 안에는, 끝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이 감정들이야 말로 인간의 중심과 가장 가까이 있다.
작가는 인간의 고유성을 철저히 야만적인 것으로 밀어내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거부감을 넘어 반항심이 고개를 든다. '이것만큼은 지켜야 한다.'는 다짐이 문장마다 차오른다.
"행복이란 아주 귀찮은 주인이야— 타인의 행복은 더욱 그렇더군. 사람이 행복을 아무 말 없이 받아들이도록 훈련되지 않은 경우에는 진리보다도 더 섬기기 어려운 주인이야."
멋진 신세계를 지탱하는 가장 정교한 장치는 소마다. 불편함을 즉각 휘발시키고 고통을 지워주는 마법의 알약. 고통이 사라지면 질문도 사라진다. 선택할 필요가 없고 선택이 없는 삶은 안정적이다. 야만인 존은 그 세계에서 스스로 고통을 선택한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채찍질로 묻는다. 그 질문의 끝이 결국 비극이더라도 존의 비극은 소마로 얼룩진 세계에서 가장 인간적인 투쟁이었다.
우리는 정말 행복을 원하는 걸까, 아니면 그저 불편함이 없는 상태를 갈구하는 걸까.
나는 여전히 책과 꽃을 포기할 수 없다. 그것이 나를 흔들고 불편하게 만들어도, 사랑이 상처를 남기고 엄마라는 이름이 어깨를 짓누를 때도. 그 무게는 오히려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진다. 예측할 수 없는 슬픔과 통제되지 않는 기쁨 사이에서 흔들리는 것, 다음 순간을 알 수 없는 채로 버티는 것.
그 불완전한 선택들이 쌓여 비로소 내가 된다.
고통을 없애는 대신 나를 지워버리는 세계에는, 동의할 수 없다.
나는 완전하게 흔들리면서 인간으로 남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