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
동물농장을 다시 읽으며 가장 오래 붙잡힌 인물은 복서였다. 처음 읽었을 때는 나폴레옹이 보였다. 권력이 어떻게 이상을 삼키는지, 언어가 어떻게 진실을 지우는지. 그 독해는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충분하지 않다.
이번에는 나폴레옹이 아닌 복서에서 멈췄다.
풍차 옆에서 묵묵히 일하는 말 한 마리.
그는 어리석지 않지만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다. 판단은 지도자의 몫이라 믿고, 자신은 노동에 집중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 태도는 충성이 아니었다. 구조를 의심하지 않겠다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선택은 한 번 굳어져 좀처럼 되돌리기 어려웠다.
마흔, 왜 그가 그렇게 살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풍차가 무너졌을 때 복서는 설계를 묻지 않았다. 자신이 더 강했으면 됐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를 개인의 부족함으로 끌어당긴다. 낯설지 않다. 일이 잘못됐을 때 방향을 의심하기보다, 내가 덜 노력한 탓이라고 먼저 생각한다. 그 편이 덜 아프다. 구조를 의심하는 일은 지금까지의 선택 전체를 흔드는 일이니까.
스노볼은 방향을 논의하던 존재였다. 왜 이 풍차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묻는다. 그 과정은 시간을 요구한다. 복서의 성실함이 농장을 유지하는 동안, 스노볼의 질문은 농장 밖으로 밀려난다. 한 번 사라진 질문은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질문에는 늘 대가가 따른다.
복서는 매번 더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그 말은 역설적으로 현재의 방향을 다시 묻지 않게 만들었다. 성실함이 반복될수록 체제는 면책되었고 결국 그는 동물농장을 지탱하는 축이 되었다.
복서는 착취당해서 무너진 존재로 보이지 않는다. 스스로 그렇게 만들어왔다. 그래서 그는 피해자로만 남지 않는다. 글을 읽으며 복서가 계속 불편했던 이유다. 동물농장은 이념의 문제나 권력과 노동의 문제를 넘어,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판단을 위임한 존재가 어떻게 소모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복서는 악하지 않다. 그러나 질문하지 않는 성실함은 무해하지도 않다.
열심히 사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워왔다. 힘들어도 참고, 더 노력하는 법을 익혔다. 무엇을 위해, 무엇 때문에 애쓰는지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되는 삶이라고 믿었다. '더 열심히'라는 말로 방향을 묻는 일을 미뤄왔다. 참 오래.
복서는 끝까지 성실했다. 그래서 끝까지 멈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