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어록의 기계음이 멈추고 현관문을 열면, 방금까지 몸담았던 세계가 순식간에 진공 상태로 변한다. 서너 시간 전만 해도 사람들의 웃음소리에 박자를 맞추고 화제의 중심을 놓치지 않으려 부지런히 눈을 맞추던 내가 있었다. 그러나 신발을 벗고 정적 속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그 활기찬 모습은 마치 빌려 입었던 옷처럼 어색해진다. 나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고요를 걸친다.
우리는 흔히 사람을 내향과 외향이라는 두 가지로 분류한다. 누군가는 타인의 에너지를 먹고살고, 누군가는 혼자만의 동굴 속에서 빛을 발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삶은 그렇게 단호하게 구획되지 않는다. 나 역시 어느 한쪽에 완전히 귀속되지 못한 채 두 세계를 유랑하는 이향인이다. 외향의 세계에서는 고독이 그립고, 고독의 세계에서는 타인의 온기가 궁금해지는 정서적 유목민의 운명이다.
나는 원래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었다. 열정이 많고 일을 빠르게 벌이며 사람들 속으로 자연스럽게 끌려 들어갔다. 오래도록 나는 외향인이었다. 그러나 그 얼굴 뒤에 쌓이는 피로를 다루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머릿속은 늘 복잡했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 없이 현실에 쫓기며 달려가기 바빴다.
글을 쓰기 시작하며 내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이후 한동안 나는 거의 완벽한 내향인처럼 살았다. 고요 속에서 내가 나로 돌아오는 경험이 좋았다. 하지만 사람들을 만나 함께 웃고 이야기할 때의 즐거움도 여전히 분명했다. 그래서 이제는 선택하지 않기로 했다.
완벽한 내향인도, 완벽한 외향인도 아닌 완전한 이향인으로 살기로 했다.
이향인으로 산다는 것은 매일 적절한 두께의 가면을 고르는 일이다. 사람들을 만날 때 나는 기꺼이 밝은 에너지를 꺼내 쓴다. 그것은 가식이 아니라 타인과 연결되고 싶은 본능적인 다정함이다. 그러나 에너지가 바닥을 보일 때쯤 나는 예민한 안테나를 세워 퇴로를 찾는다. 억지로 자리를 지키기보다 영혼이 숨 쉴 수 있는 적막의 영토로 망명하기를 선택한다.
새벽 고요한 시간, 알람 없이 일어나 요가를 하거나 글을 쓴다. 도시의 소음도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없는 적막한 고요 속에서 나는 외부로 빌려준 나를 조금씩 돌려받는다.
그 시간으로 나를 채워야만 나는 다시 소란 속으로 뛰어들 수 있다.
진부한 자기계발서는 이향인의 유연함을 예찬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치열한 줄타기가 있다. 너무 깊이 숨어들면 세상으로부터 잊힐까 두렵고, 너무 깊이 섞여 들면 나라는 존재가 흐릿해질까 겁이 난다. 그래서 이향인은 경계선 위에 집을 짓는다. 어느 한쪽이 무너져도 다른 문으로 빠져나올 수 있다는 확신에 안도한다. 뿌리가 두 개인 이향인은 좀처럼 완전히 쓰러지지 않는다.
결국 이향인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이 아니다. 소음 속에서 고요의 가치를 읽고, 고독 속에서 사람의 소중함을 복기한다. 타인을 이해하면서도 나 자신을 지켜낸다.
오늘도 나는 다시 문을 열고 나간다. 새벽의 고요를 양분 삼아 사람들의 틈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리고 다시 돌아올 정적을 기대하며 지금 내 앞에 있는 이의 눈을 마주한다.
경계를 넘나드는 이 유연한 망설임이 지금의 나를 살아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