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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임 Aug 19. 2023

옆을 돌보는 미덕

오는 봄을 나누세요

아침에 일어나 체리를 먹고, 점심에는 장을 봤다. 3개월 동안 멀쩡한 음식이라곤 냉동실에 넣어놓은 음식들과 냉장실에는 김치, 고추장, 된장 이 세 개밖에 없었다. 그리고 소스들 정도. 심지어 다져놓았던 마늘들도 산화되어 누렇게 색이 변했다. 너무 색이 변한 마늘들은 버리고, 그래도 조금 하얀 부분들이 남아있는 마늘만 남겨놓았다.

장을 보니 멈춰있던 자취생활을 다시 시작하는 게 실감됐다. 3개월 동안 본가에 있으면서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을 먹다가 이제 내가 차려먹을 생각을 하니 조금 까마득했다. 서울의 물가는 너무 비싸 내가 음식을 해 먹지 않으면 순식가엔 식비로만 모든 생활비가 나가게 된다.


토마토, 사과, 양파, 계란, 두부, 팽이버섯, 브로콜리를 샀다. 청양고추를 살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안 샀는데 갑자기 집에 와 양파 장아찌를 하고 싶어서 찾아보니 청양고추가 들어갔다. 내일 청양고추를 사러 가기로 하고, 매콤하게 된장찌개를 끓이고 싶어 내일의 나에게 미뤄버렸다.

브로콜리를 하나씩 떼어냈다. 생각보다 덩어리가 많았다. 나무처럼 생긴 브로콜리에게 가지치기를 해주고 있는 느낌이었다. 처음에 이걸 누가 먹기 시작했을까. 우리나라가 나물요리가 많아지게 된 이유는 사람들이 먹을 게 없어 들로 산으로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하나씩 실험을 해가면서 나물을 먹기 시작했다고 하던데. 브로콜리를 먹게 된 사람들도 같은 이유였을까.

가지치기가 모두 끝나니 밑동만 남아버렸다. 지저분한 가지를 조금씩 잘라내고 밑동의 새하얀 몸체만 남겨놨다. 마치 옷을 벗긴 느낌이었다. 모두 썰어 두고 끓는 물에 소금을 넣고 20초간 데쳤다. 두부도 끓는 물에 1분을 삼고 면포로 꾹 짰다. 모든 물기를 빼내고 브로콜리와 두부를 함께 넣어 간장과 소금, 참기름을 넣고 무쳤다. 국간장으로 넣으라고 알려줬는데, 국간장이 없어 양조간장을 넣었다. 다 같은 간장이니 맛은 괜찮겠지.

냉동실에 얼어 있던 계란국을 다시 데우고, 밥을 돌리고, 브로콜리 두부무침과 함께 먹었다. 속이 편했다.


요리를 하면 그런 기분이 든다. 나를 잘 챙기고 있는 기분. 돈으로 사지 못하는 것들을 내 안에 꼭꼭 채워 넣어 나를 달래는 느낌. 바쁘고, 정신이 없다 보면 배달음식을 시켜 먹게 되는데 편하지만 속이 더부룩해지고 얼굴이 띵띵 부어 나와 맞지 않는 옷을 꾸역꾸역 입고 있는 모습 같다.

책을 읽고, 낮잠을 자고, 울릉도 여행지를 찾아보다 소설을 썼다. 글이랑 가깝게 사는 삶. 내가 평생 꿈꿔왔던 삶이었다. 언제쯤 글로 돈을 벌 수 있을까. 아니, 글로 돈을 버는 순간 그게 또 하나의 스트레스가 되면 어떡하지. 내가 작가가 되는 꿈을 꿨다가, 그걸로 스트레스를 받을까 걱정을 했다가 별 쓸데없는 생각을 다했다.


그리고 필사를 시작했다.

오늘의 이야기는 '오는 봄을 나누세요.'이다.




오는 봄, 오는 여름, 오는 가을, 오는 겨울.

계절의 앞에 '오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니 이상하게 설렌다.


이제 가을이 오고 있다. 아니 입추가 지났으니 이미 온 것인가. 연일 폭염경보는 쏟아지지만, 지금은 가을이다. 내가 느끼지 못할 뿐. 곧 나뭇잎의 색이 변하고 온 세상을 알록달록 물들일 것이다.


입춘이나 정월 대보름 무렵에 행하던 품속 가운데에는 적선의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착한 일을 적어도 한 가지 쌓았는데, 개울에 징검돌을 놓아 사람들이 개울을 건너가기 쉽게 하거나 쌀독이 빈 집에 한 되의 쌀을 몰래 넣어 두는 일로 적선을 했다고 한다.


우리 동네에서는 정월대보름이 되면 축제를 한다. 달집 태우기와 쥐불놀이를 돌린다. 서울에 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쥐불놀이를 해봤다고 하면 어디 시골에서 왔냐고 물어본다. 그렇게 시골은 아닌데 속으로 중얼거리지만 옛 민속놀이를 해오는 동네는 서울사람들에겐 시골인가 보다.

정월대보름 축제는 내가 어렸을 적 살던 동네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됐다. 금강 변은 어릴 적에 친구들과 놀러 다녔던 곳이었다. 가끔 그곳엔 노숙자 아저씨들이 있기도 했고, 어떤 사람들은 제트스키를 타고 다니기도 했다. 나는 물웅덩이가 곳곳에 생긴 흙바닥을 지나며 물방개를 구경했다. 발에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물에 둥둥 떠다니면서 스키를 타는 물방개가 신기해 한 번 잡아볼까 싶다가도 벌레가 무서워 거리를 뒀다.

정월대보름 축제를 하면 온 동네 아이들이 다 모였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깡통을 집어 곳곳에 있는 불쏘시개 근처로 가면 어른들이 깡통에 불을 담아줬다. 내 손안에 있는 불. 어둑어둑한 밤 사이로 아이들이 깡통을 돌리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깡통 사이로 빛나는 불빛이 눈앞에 잔상처럼 흐렸다.


사실 우리 동네에 적선의 풍속이 있지는 않았다. 개울을 건너기 쉽게 징검돌을 놓지도 않았고, 쌀독이 빈 집에 한 되의 쌀을 넣어두지도 않았다. 우리 동네는 그냥 주택가였으며 가끔 초등학생 아이들의 목소리로 떠들썩할 뿐이었다. 다만, 그 당시의 우리 집은 정부에서 적선을 받았다. 방학 때 점심이 되면 도시락 배달 아주머니가 다녀가셨다. 동생과 나는 엄마와 아빠가 나간 집에서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있다가 도시락이 오면 허겁지겁 먹었다. 계란말이, 국, 급식에서 나오는 밥들과 비슷했다. 그래도 밥을 챙겨 먹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그러고 보면 봄이 시작되는 이즈음에는 나의 다복을 비는 일 못지않게 다른 사람의 형편을 함께 돌보는 일을 했던 셈이다. 옆을 돌보는 미덕이 있었던 것이다.


옆을 돌보는 미덕은 누구나 가져야 하지만, 쉽게 갖기는 힘들다.

나는 동네에서 빈 병을 주우러 다녔다. 동네에는 작은 슈퍼가 있었다. 슈퍼에 가면 파마머리를 한 아주머니가 매일 무료하게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당시에는 사이다를 페트병에 파는 것보다 유리병에 파는 경우가 많았다. 유리병으로 된 사이다병이나 소주병, 맥주병 등을 동네를 돌아다니며 찾았었다. 동생과 같이 찾기도 하고, 혼자서 찾기도 하고, 친구들과 찾기도 했다.

10원, 20원, 30원 조금씩 돈을 모으다 보면 300원이 되고, 500원이 됐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비틀즈를 사 먹거나 새콤달콤을 사 먹었다. 가끔 아이스크림을 사 먹기도 했는데, 빵으로 된 아시나요 같이 비싼 아이스크림은 사 먹을 엄두를 못 냈다. 작은 봉지에 담긴 200원짜리 소다맛 막대 아이스크림을 먹거나 저렴한 아이스크림들을 사 먹었다.


동네를 돌아다니다 동네 애들이 자기 집 앞에서 소꿉장난을 하고 있어 다가간 적이 있었다. 사실 그 애들이 빵을 먹고 있어서 부러워서 다가갔던 거였다. 그런데 거절을 당했다.


"너는 항상 먹을 거 하나도 안 사 오고, 우리 거 뺏어 먹기만 하잖아. 너랑 안 놀고 싶어."


오…. 다가가려던 발걸음을 돌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냉장고를 열어보았지만 아이들에게 줄만한 건 딱히 없었다. 나는 그 뒤로 그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걸 포기했다.


가난은 생각보다 사람을 위축되게 만든다. 나는 그 후로 다른 친구들에게 다가가는 게 조금 무서워졌던 것 같다. 아무렇지 않게 놀기도 했지만, 엄마에게 용돈을 달라고 조른다거나 다른 아이들이 갖고 있는 핸드폰을 사달라고 조르거나. 천냥마트에 함께 가 인형놀이 세트를 사달라고 했다가 혼만 났다.

엄마는 항상 나와 마트를 갈 때마다 힘들어했다. 내가 이거 사달라, 저거 사달라 떼를 아무리 썼지만, 아무것도 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엄마는 나한테 말했다.


"너랑 마트 오기 너무 힘들다. 다음부터 같이 오지 말자."


엄마 마음은 어땠을까. 내가 핸드폰이 없다고 아이들한테 무시당한다고 하자 아빠는 애니콜 슬라이드 폰을 사줬다. 당시에 정말 질리도록 갖고 있어 계속 눌렀던 곳에는 다 내 지문에 눌려 쇠가 펴질 정도였다. 리듬스타를 하거나 유행했던 인터넷 소설을 보는 게 내 낙이었다.


대학교에 왔을 때 난 국문과로 진학했었다. 글이랑 관련된 직업을 하고 싶었다. 출판사에 들어가든 방송작가가 되든. 어떤 것이든 글로 벌어먹고 사는 직업을 하고 싶었다가 점점 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 내 미래에 대한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중간에 나는 사회복지학과를 복수 전공하고 경제학과로 전과했다. 다른 애들한텐 배워보고 싶다고 단순하게 말을 했지만, 내 선택에 큰 영향을 미친 책이 한 권 있었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었다. 거기서 모리교수님은 파랑새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게 되는데 그중에 한 질문이 아래와 같았다.


'지역사회를 위해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


나는 내 마음의 평화와 내 일신상의 생각만 했었는데, 이 사람은 죽을 때까지도 자신만 생각한 게 아니라 옆을 돌보며 살아가고 있구나. 몇 번을 그 책을 읽으면서 이상하게 이 구절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집에서는 항상 이기적이라고 욕을 얻어먹었지만, 내가 그런 일을 하면 어떤 사람이든 좋은 일을 하게 되는 것 아닐까.

그래서 결국 취업을 아동을 돕는 복지재단으로 하게 됐다. 일을 하면서 스스로 자위할 때가 있다. 내가 이렇게 모금을 해서 아이들이 밥이라도 제대로 먹을 수 있는 환경이 됐으면 좋겠다. 가끔 후원자에게 보는 감사편지를 보면 기분이 좋다가도, 서류로 지원 신청이 들어오는 걸 보면 세상에 아직 힘들게 살아가는 아이들이 많다는 것이 조금은 서글펐다.


나도 저 중에 한 명이었을까.


가끔 서류를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감정을 이입하다가 범죄 피해를 당한 아이들을 보면 아직도 세상에 미친놈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다가도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내 어린 시절을 조금은 돌보고 있다고 여길 때가 있다. 후원자들을 만나다 보면 세상에 따뜻한 사람이 많구나 싶으면서도 커가는 아이들이 사회의 따뜻함을 조금만 믿어줬으면 혼자 되뇔 때가 있다.

사실, 나도 아이들을 아예 만나서 직면하는 일은 하지 못한다. 감정소모가 너무 많이 돼 모금을 하는 일들을 하고 있다. 후원자를 만나는 게 아이들을 만나는 것보단 감정소모가 적고 뿌듯함이 더 많이 느껴지니까. 지금은 그마저도 다른 부서로 발령을 받아 못하게 되었지만.


얼마나 이곳에서 더 일할지 모르겠지만, 지금 커가는 아이들의 냉장고에는 친구들에게 베풀만한 음식이 채워져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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