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2035
‘버킷리스트’는 철 지난 유행어가 된 줄 알았다. 초등 의대반이 생기고, 로스쿨 지원생이 급증하는 대한민국에서 웬 꿈 타령인가. 기안84(김희민)에 대한 열광은 의외였다.
웹툰작가 기안84가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했다. 예능 대상의 강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세탁기 속 꿉꿉한 옷 한 벌을 챙겨 볼리비아 우유니 사막과 인도 갠지스강으로 떠나는 생고생 예능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태계일주)’ 때문이다.
그 속의 기안84는 아마존강에서 맨몸 수영을 하고, 우유니 사막 소금을 핥아 맛보며, 갠지스 강물도 대뜸 들이킨다. 보는 것만으로도 고생스러운 여정이지만, “버킷리스트를 이뤄가는 중”이라며 행복에 겨워 말한다. 인도 바라나시 화장터를 바라보며 “별거 없네요. 인생”이라고 툭 한마디 던지더니, “죽는 날이 더 아깝지 않게끔, 죽는 날이 제일 싫게끔 살면, 삶에 미련이 안 남지 않을까”라는 꽤 통렬한 질문을 되묻기도 한다.
‘태계일주’는 시청률 5%를 돌파하며 TV를 떠난 MZ세대에게 리모컨을 들게 했다. 한 시청자는 “‘무한도전’이 끝나고 볼 게 없었는데 재밌게 보고 있다”며 “세상의 모든 기안84 힘내라”라는 소감을 남겼다. 리얼 버라이어티에 대한 최고의 극찬이 아닐까 싶다.
‘태계일주’ 김지우 PD에게 성공 비결을 물으니 “내가 살고 싶은 삶을, 기안84가 대신 살아주니 시청자가 만족감을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기안84가 낯선 곳에서 삶의 구석구석을 체험하는 모습을, 마치 먹방을 보듯 대리만족한다는 취지였다. 어찌나 일상이 팍팍하면 경험과 행복마저도 외주를 주게 됐나 싶어 씁쓸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떠날 수 없는 것이 현실. 대리만족이라도 있어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남과는 다른 기안84의 독특함에 대한 열광은 의외이면서 역설적이다. 삶을 복제라도 하려는 듯 남과 비슷비슷하게 살려 아등바등하는 현실이 떠올라서다.
이젠 내릴 수 없는 ‘대한민국 열차’에 탑승한 승객처럼, 삶이 느껴질 때가 있다. 영어유치원과 사립초, 대치동을 거쳐 입시와 취업문을 뚫고 내 집 마련을 향해 달려가는 일직선의 인생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게 꽤 된 것 같다. 낯설고 다른 것을 경험한다는 것이, 뒤처지고 도태되는 것이라 여기기도 한다.
최근 10년 만에 외국에 사는 옛 친구를 만났다. 그동안 취업도 결혼도 했지만, 지난 세월의 기억이 촘촘하기보단 듬성듬성해 헛헛했다. 생생하고 충실한 경험이 잘 떠오르지 않아 10년이 너무 빨리 흐른 것 같았다. 앞으로 달려가기만 하는 인생 속에는 풀어낼 재미난 이야기와 기억이 많을 리 없다. 10년 후에도 똑같은 후회를 할까 봐 겁이 났다. 이제라도 버킷리스트를 만들어야겠다.
2023년 7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