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네 아빠의 딸로 태어나고 싶다"

아내와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by 박태인
82년생 김지영 영화 포스터

장모님은 아내에게 "난 네 아빠의 딸로 태어나고 싶다"는 말을 가끔 하신다. 이 말엔 딸바보 장인어른이 86년생인 아내를 참 예쁘게 키워주셨다는 뜻과, 55년생인 장모님이 아내와는 다른 시대를 거쳐오셨다는 뜻이 함께 담겨있다. 오늘, 그렇게 예쁨을 받고 자랐다는 아내와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봤다.


아내는 영화 시작부터 펑펑 울었다

영화관에 휴대용 티슈를 가져간 아내는 영화가 시작하자 펑펑 울기 시작했다. 함께 살면 이렇게 운 적이 없었다. 왜 그리 우냐고, 당신은 정말 예쁨받은 딸 아니었냐고 물으니 "엄마가 생각났기 때문"이라 말했다. 공무원이셨지만 자녀를 가진 뒤 사표를 내야했던 엄마가 생각나 운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나도 엄마가 생각났다. 아직까지 사회 생활을 하고 계신 57년생 엄마가 겪어왔을 여러 풍파들이 떠올랐다. 아내만큼 울진 못했지만 나 역시도 많이 울었다.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은 30대 여성인데 아내와 난 이 영화를 보며 '엄마'를 떠올린 것이다.


내겐 영화 속 지영의 엄마 미숙이 아픈 딸의 얼굴을 쓸어만지며 "내 금같은 새끼, 내 옥같은 새끼"라 속으로 울부짖는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딸인 지영에게 "시집이나 가라, 네겐 그게 맞는 것 같다"고 막말을 하는 남편에게 "어디서 그런 고리타분한 소릴 하느냐, 지영아 나대, 더 나대"라고 말하는 미숙의 모습이 웃프기도 했다.

책 82년생 김지영

영화에서 지영의 남편 대현(공유)이 육아 휴직에 관해 고민하는 장면은 당장 나의 현실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아직 아이는 없지만 최근에서야 직장 내 '1호' 남자 육아 휴직자가 나오고 있는 것이 언론계의 현실이다.


아직 아이가 없는 우리 부부가 영화를 보기 전 백화점 푸드코트에서 "아내와 아이의 저녁거리를 사간다"며 이웃에 사는 친한 동생과 마주친 것도 우연이라면 재밌는 우연이었다. 지난 주에도 동네에서 우연히 만난 그 동생은 우산도 없이 비를 흠뻑 맞은 채 전동킥보드를 타고 "아이가 아퍼 집에 가야한다"고 말했다. 내겐 그 동생의 모습이 가까운 미래처럼 느껴졌다.


김도영 감독의 첫 데뷔작, 높은 완성도

이처럼 82년생 김지영의 이야기는 우리 부부가 마주할 현실이기도 해 상당한 몰입감이 있었다. 물론 영화는 영화 자체의 예술성만으로 김도영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임을 알아챌 수 없을만큼 그 구성이 탄탄했고 완성도가 높았다.


원작 소설의 아우라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란 우려는 기우였다. 음악과 빛이 아름답게 담겼고 스토리가 신파나 다큐처럼 흐르지도 않았다. 118분이란 러닝타임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정유미와 공유라는 맞춤 캐스팅과 조연들(특히, 미숙역을 맡은 김미경씨)의 힘있는 연기가 영화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82년생 김지영'이 남성 비하 영화라는 비난과 악플은 영화가 묘사한 남녀 캐릭터의 모습을 봤을 때 납득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여성 배우들이 다소 수동적이고 소극적으로 그려진 측면이 더 눈에 띄었다. 김지영의 남편 대현(공유)은 내 기준으론 꽤 괜찮은 배우자였다.


여성 캐릭터,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그려져

이따금 당황스러운 남성 캐릭터가 등장했지만 현실과 괴리됐거나 과장했다고 보긴 어려웠다. 오히려 며느리를 쏘아붙이는 시어머니와 그 시어머니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지영의 모습이 너무 전형적이었다. '이제 저런 시대는 지나가고 있지 않는가''왜 여성 캐릭터들이 더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가'란 생각이 든 장면도 제법 있었다.


고 노회찬 의원의 트위터.

오늘(23일) 개봉한 '82년생 김지영'을 보러 영화관을 찾은 관객 중엔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20~30대 여성보다 50대 이상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 관객들이 눈에 띄었다.


그분들을 보며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은 30대 김지영이지만, 이 영화 김지영 같은 딸읕 둔 5060 여성 관객에게 더 큰 공감과 감동을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영화가 딸을 어루만지던 엄마 미숙(김미경)의 이야기 세심하게 다룬 것으로 느껴진 장면과 대사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아내에게 영화가 끝난 뒤 "장모님도 이 영화를 보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런 나에게 아내는 "엄마가 보면, 너무 슬퍼하시지 않을까"라 말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구나, 내 생각이 짧았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