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FIFA 캐나다 여자월드컵을 앞두고 다음 뉴스펀딩에 게재한 글.
2015년 5월 15일 금요일 날씨 흐린 뒤 갬
제목: 쌤, 감사합니다! (출국 D-5)
아침에 25명의 선수 중 2명이 파주 국가대표팀트레이닝센터를 떠났다. 윤덕여 감독은 윤사랑과 박희영을 직접 불러 차마 꺼내기 힘든 말을 해야 했다. 담담하게 짐을 싸 동료들의 배웅을 받았지만 2015 FIFA 캐나다 여자월드컵을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이야 오죽할까. 그리고 함께 고생한 동료를 보내야 하는 마음은 어땠을까. 한국여자축구국가대표팀의 오전 훈련 분위기는 무거웠다.
윤 감독 역시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아휴. 결정하는 것도 어렵지만 말하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에요. 내가 나쁜 놈이지, 뭐.” 경쟁과 성장을 위한 어쩔 수 없었던 잔인한 선택. 누구보다 속상할 제자들 생각해 윤 감독의 마음도 아팠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스승의 날이었다. 점심 식사가 끝난 뒤 선수들은 조촐한 파티를 준비했다. 회의실에 윤 감독과 코칭스태프 모두를 모시고 ‘스승의 은혜’를 합창했다. 여민지가 함께 준비한 케이크를 들고 윤 감독 앞에 섰다. 윤 감독은 두 팔로 머리 위 하트를 그리며 화답했다. 가라앉았던 대표팀의 분위기에 다시 조금은 불이 붙었다.
2015년 5월 16일 토요일 날씨 햇볕 쨍쨍
제목: 마지막 점검 (출국 D-4)
능곡고등학교와의 연습경기가 있는 날. 미국 전지훈련을 떠나기 전 국내에서 마지막으로 훈련 성과를 점검할 수 있는 날이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박은선, 지소연, 임선주를 뺀 나머지 선수들 모두가 돌아가며 경기에 투입됐다.
“결과에 신경 쓰지 말고, 할 수 있는 거 다 해보자. 알았지?” 30분씩 3세트로 진행된 경기에서 윤 감독은 다양한 선수 조합을 실험했다. 이번 소집 훈련에서 처음으로 시도해 본 스리백도 가동해 봤다. 남자 고등학생들과의 경기였기에 선수들은 그간 훈련으로 쌓은 체력과 웨이트 운동으로 단련한 몸싸움 능력을 시험해 볼 수 있었다.
월드컵을 코 앞에 둔 대표팀에 가장 두려운 것은 부상이었다. 윤 감독은 소집 첫날부터 부상이 가장 걱정이라고 강조했다. 경기가 과열될라치면 양 팀 벤치에서는 “다치지 않게 해! 다치지 않게!”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였다. 2세트 도중 여민지가 상대 선수와의 볼 경합 이후 착지하는 과정에서 왼쪽 무릎을 잡고 쓰러졌다. 경기는 중단됐고 코칭스태프들이 급히 그라운드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여민지는 트레이너에게 업혀 대기 선수들이 쉬고 있던 천막 곁으로 왔다. 놀란 선수들이 여민지를 둘러쌌다.
무릎에 얼음을 대고 앉아 있던 여민지는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윤 감독은 “부상 여부를 확인해 봐야 할 것 같다”라고 말했다. 부디 큰 부상이 아니길… 대표팀은 소집 직전에 이미 이영주를 부상으로 잃었다. 연습경기는 1-1 무승부로 끝났다.
2015년 5월 18일 월요일 날씨 선선
제목: 여자축구선수로 산다는 것 (출국 D-2)
아침에 여민지의 정밀 진단 결과가 나왔다. 왼쪽 무릎 십자인대 파열.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오후에 있을 월드컵 출정식으로 들떴던 대표팀의 분위기가 일순간 바닥을 쳤다. 2010 FIFA U-17 여자월드컵 우승의 히로인, 그 후 연속된 부상과 재활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이제 다시 날아오를 준비를 하고 있던 여민지. 여민지는 전지훈련 출국을 이틀 앞두고 월드컵 대표팀 명단에서 제외됐다.
오후 3시쯤 22명의 선수를 태운 버스가 파주를 떠나 출정식이 열리는 서울을 향할 때, 여민지는 아직 숙소에 머물러 있었다. 버스에 오르던 선수들의 표정은 착잡했다. 울어서 빨개진 여민지의 눈을 보며 인사를 하고 선수들은 출정식에 참석해야 했다.
출정식은 많은 취재진과 팬들 앞에서 진행됐다. 월드컵을 앞두고 이례적으로 여자축구에 쏟아진 관심에 선수들은 어색하고 당황했지만 최선을 다해 출정식에 임했다. 대표로 출사표를 밝힌 주장 조소현은 “솔직히 많이 떨려요. 이렇게 많은 관심 보여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세계 무대에 도전하는 저희들의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봐 주세요. 기대에 걸맞은 좋은 모습을 꼭 보여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평소보다 훨씬 긴장한 모습이었다.
여자대표팀 최초의 공식 단복을 맞춰 입은 선수들의 모습은 멋졌다. 국가대표선수로서의 긍지, 한국여자축구를 이끌어가겠다는 책임감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출정식이 금세 막바지에 이르고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달라는 사회자의 요청에 전가을이 마이크를 잡았다.
“대한민국에서 여자축구선수로 산다는 게 그동안 좀 외로웠었거든요.”
전가을의 말에 장내는 숙연해졌다. 전가을을 시작으로 선수들의 눈시울이 하나둘씩 붉어졌다. 비인기 종목의 설움, 남자대표팀과의 비교, 텅 빈 관중석, 무관심 속의 시간들… 그간 가슴속에 맺혀있던 응어리들이 터져 나온 것이다.
“월드컵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어요. 지금 흘리는 눈물이 헛되지 않도록 정말 좋은 모습, 감동적인 경기를 하겠습니다. 2002 월드컵 때 남자대표팀이 그랬던 것처럼 이번엔 우리가, 여자축구가 기적을 만들고 싶어요.”
전가을은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주어 말했다. 대표팀이 잘해야 한국여자축구 전체가 산다는 것. 현실을 탓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여줘야 한다는 것. 선수들이 입을 모아 말하고, 또한 스스로 다짐했던 것들이다. 선수들의 눈빛과 말투에서 간절함이 뚝뚝 묻어났다.
2015년 5월 20일 수요일 날씨 화창
제목: 민지야, 너와 함께 갈게 (출국 D-Day)
아침 일찍 아이보리색 단복을 입은 선수들이 인천국제공항에 모였다. 월드컵이 열리는 캐나다로 들어가기 전 미국에서 전지훈련을 하기 위해서다. 선수들은 월드컵에 대한 설렘과 긴장이 공존하는 모습으로 취재진의 사진 촬영에 임했다.
인터뷰에 나선 지소연은 “첫 승과 16강. 말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드릴게요”라고 진지하게 말했다. 함께 하지 못한 여민지의 이야기가 나오자 지소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출정식 날에도 여민지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던 지소연이다. 지소연은 다시금 터져 나올 듯한 울음을 삼키며 “민지한테 꼭 좋은 결과를 안겨주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윤 감독 역시 여민지를 잊지 않았다. “민지와 마음으로 같이 갑니다. 민지 몫까지 우리 선수들이 좋은 모습을 보일 겁니다.
가장 마음이 복잡한 이는 대체 발탁된 박희영이다. 15일 짐을 싸 소속팀(대전스포츠토토)으로 돌아갔다가 19일에 다시 대표팀에 합류했다. 심지어 박희영과 여민지는 같은 소속팀이다.
“안타까운 일이 생기면서 다시 합류하게 됐어요. 합류 이야기를 듣고 정말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부담도 되지만 최선을 다해서 팀에 보탬이 되도록 노력할 거예요. 소속팀 경기를 뛰고 서둘러 대표팀에 오느라 민지를 만나지 못했어요. 민지가 얼른 나았으면 좋겠어요.”
며칠 만에 엇갈린 두 선수의 운명처럼, 월드컵은 얄궂게도 그 문을 쉽게 열어주지 않았다. 지난 12년 동안 한국여자축구가 월드컵과의 연이 없던 것과도 같다. 12년 전에 이어 자신의 두 번째 월드컵을 치르게 된 박은선은 “죽기 살기로 뛰겠다”는 각오를 남기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과정은 복잡하고, 가끔은 잔인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준비는 끝났다. 한국여자축구국가대표팀의 본격적인 월드컵 여정이 마침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