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 드윗 부케이터
“84년 전 일이지만 난 아직도 새로 칠한 페인트 냄새를 맡아요.” - 1996년 로즈
<타이타닉>은 26년 전 영화지만 난 아직도 주제곡 ‘My heart will go on’ 전주의 피리 소리를 들으면 바람에 날리는 로즈와 잭의 머리칼이 눈앞에 그려진다. 동네 비디오방에서 VHS 테이프로 된 <타이타닉> 상, 하편을 빌려와 온 가족이 함께 본 것이 초등학교 4학년쯤이었다. 난 로즈와 잭의 목숨 건 사랑에 큰 감명을 받고는 둘이 함께 있는 스틸 컷 엽서를 사서 책상 유리 밑에 오래도록 끼워놓았다. 언젠가 나도 로즈처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닮은 아름다운 남자를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는 상상을 하면서...
이후로 최소 열 번 이상 이 영화를 본 것 같다. <타이타닉>은 26년 동안 변함없이 명작의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볼 때마다 새로운 감상을 안겨준다. 로맨스 영화로서 처음 내게 다가온 <타이타닉>은 재난 영화였다가, 역사 영화였다가, 사회고발 영화였다가... 하며 변신을 거듭했고 결국 그 모든 것이 됐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게 나를 사로잡은 지점은 이 영화가 성장 영화라는 것이다. <타이타닉>은 1912년, 열일곱 살의 로즈 드윗 부케이터가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해 고뇌하고, 싸우고, 마침내 자신을 속박하는 것들로부터 해방을 이루는 이야기다.
1996년, 백발의 로즈는 모두에게 꿈의 배로 여겨졌던 타이타닉이 자신에게는 노예선이나 다름없었다고 회상한다. 로즈가 타이타닉을 탄 이유는 결혼을 하기 위해서였다. 몰락한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부잣집 아들에게 팔려가듯 하는 결혼이었다. 초호화 여객선의 초호화 객실에 머무르며 값비싼 옷과 장신구를 걸치고 있었지만 로즈의 눈빛은 죽어있었다.
절망의 끝에서 가난한 떠돌이 화가 잭을 만난 로즈는 진정한 자신을 찾는다. 삼등석 승객들이 모인 “진짜” 파티에 가서 벌컥벌컥 맥주를 마시고 구두를 벗어던진 채 신나게 춤을 출 때, 자신을 붙잡아 두려는 약혼자의 집사를 피해 잭의 손을 잡고 기관실을 마구 뛰어다닐 때, 로즈는 전에 없던 살아있는 눈빛으로 행복한 웃음을 짓는다.
“저 수평선을 향해 마음껏 달려 나가고 싶어요.” - 1912년 로즈
처음부터 로즈는 가슴에 불꽃을 품은 여성이었다. 로즈는 당시 무명 화가였던 모네, 드가, 피카소의 그림을 알아볼 만큼 미술에 조예가 깊었고, 타이타닉의 구명정 수가 부족하다는 것을 단번에 눈치챌 만큼 명석했으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책을 탐독할 만큼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여성에게는 투표권조차 없었던 20세기 초의 세상은 로즈에게 너무나 가혹한 형벌이었을 것이다.
로즈와 잭의 첫 만남은 잭이 로즈의 자살 시도를 막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데, 그때 잭은 로즈가 자살하지 않으리라 확신한다. 아마 로즈도 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 안의 불꽃이 절대 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래서 난 설사 로즈가 잭을 만나지 않았더라도, 로즈는 결국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아냈으리라 확신한다. 갈등하던 로즈에게 잭이 “당신만이 당신을 구할 수 있다”고 말한 것처럼. 어쩌면 잭은 1996년의 로즈가 만들어낸 허구 속 허구의 인물인지도 모른다. 잭은 로즈 안의 또 다른 로즈, 로즈 안의 불꽃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자신을 포기하지 않은 로즈는 잭과의 약속대로 참사에서 살아남아 천수를 누린다. 영화의 막바지, 백세의 로즈가 누운 침대 옆 탁자에는 사진 액자들이 가득 놓여있다. 카우보이처럼 말을 타는 로즈, 비행기를 조종하는 로즈, 낚시를 하는 로즈, 배우가 된 로즈... 열일곱의 로즈가 꿈꿨던 로즈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로즈라는 캐릭터를 만들 때 다다이즘 예술가 베아트리스 우드의 자서전 ‘I shock myself’를 읽고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베아트리스 우드는 실제 타이타닉 승객은 아니지만, 상류층 가문에서 태어났음에도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뒤로하고 배우이자 화가, 도예가로서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 나간 여성이다. 105세까지 장수했다는 점에서도 로즈와 닮았다. <타이타닉>의 도입부에는 백세의 로즈가 도자기를 만드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베이트리스 우드에 대한 오마주다.
난 더 이상 <타이타닉>을 볼 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닮은 아름다운 남자를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는 상상’을 하지 않는다. 대신 난 이 세상의 수많은 로즈들과 베아트리스들을 떠올린다. 차별과 억압에 굴하지 않고 진정한 자신을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은 수많은 여성들의 삶을 생각한다. 모든 시간, 모든 곳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 지킨 모든 여성들. 가슴에 불꽃을 품은 여성들. 그 생명력 강한 불꽃은 꺼지지 않고 시대와 세대를 넘어 이어지고, 그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나 역시 가슴에 불꽃이 살아있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