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나에게 편지가 찾아왔다.

편지가 없는 시대, 편지를 얘기하다

by Tangpi

"어휴, 좀 빨리 갖고와."

오늘도 그의 하루는 부하직원에 대한 재촉으로 시작한다.


이제 50대 중반으로 가고 있는 그.

73년생 박태진.

직장에서 그는 고위직도 아니고 하위직도 아니기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렇게 쫓기듯 일을 할 필요도 없다.

그의 사회초년병 시절처럼 말이다.


"아니, 메신저가 PC에도, 스마트폰에도 있는데 늦을게 뭐가 있나.

앞으로는 지시하고 10분 이내 뭐가 되는지 안되는지 좀 보고 좀 해."



매일 아침

그는 오늘 하루는 어떻게 또 지나갈까 생각하며 출근한다.

그의 하루는 늘 긴장한다.

업무 말고도

보이지 않고 말도 섞지 않는 사람들과의 인간관계까지.


그러기에 하루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래서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면 좋다 못해 안도감도 든다.


그렇지만 바쁘게 살아가는 그에게

하루는 길기만 하다.

흰 수염고래처럼 혼자는 아니라는데

나는 왜 이리 여유가 없을까 생각하며.

그는 오늘도 흰 수염고래처럼 되길 바라면서 퇴근길에 오른다.


https://youtu.be/JDZuA9Drjok?si=SuwTD-iy_wHl0way



그에게 한 주는 어느새 금요일이 되어있다.


한 달은 말할 것도 없다.

생각해 보면 지난 1년도 금세 지나갔다.

아니, 자신이 언제 50대 중반이 되었는지

놀랄 정도로 시간은 그렇게 빨리 지나갔다.

시간은 그렇게 지나간 것이다.



"아이, 참."


퇴근길에 집에 다 도착했는데 아파트 출입카드를 사무실에 두고 왔다.

벌써 몇 번째야... 이놈에 건망증은 갈수록 심해지 다 못해 신경질이 난다.

휴대폰도 화장실에 탕비실에 그렇게 두고 다니더니,

이젠 집에 오는데도 사무실에 출입카드도 두고 왔으니.


"정신 좀 차려!"


전화를 받고 아파트 출입 현관으로 내려오는 아내의 짜증 섞인 전화를 꺼버리고

현관 입구에 우두커니 서있는 그.

오늘따라 출입구에 왔다 갔다 하는 사람도 없다.

기다리는 동안 우두커니 서있는 그에게 보이는 것은

각종 고지서가 수북이 꼽혀있는 편지통들이다.


편지통.


말은 편지통인데, 편지는 없다.

꼽혀있는 것은 오로지 수많은 고지서와 광고 전단일 뿐.


하긴 요즘같이 이메일이,

아니 손끝에 있는 스마트폰의 메신저들이 끊임없이 울려대는 시대에

편지를 쓸 만큼 한가한 이들이 어디 있나.

우리 시대 있었던 삐삐나 시티폰이 사라져 갔듯이

편지도 국어사전에 없어질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편지 없어질 생각 말고 당신이나 없어질 걱정이나 해.

뭔 편지 얘기야. 뜬금없이.

방에 무슨 귀신 나올 것처럼 처박아 놓은 책장 좀 정리하고.

버릴 건 버리던지."


저녁을 먹으면서 아내에게 편지 얘기를 하니 한심하다는 듯이 답이 돌아온다.


그래, 내가 그런데 신경쓸데가 아니지.

식후의 편안함을 찾아 소파에서 잠시 몸을 기대 스마트폰을 보다 보니

어느덧 잘 시간이다.

침대에 누워도 잠이 잘 오지는 않는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전에 살아왔던 기억을 되새겨보면 길이 나오지 않을까...

이런저런 상념을 하다가 잠이 든다.

https://youtu.be/OxgiiyLp5pk?si=xRY94Usw4q3LnTfa



언젠가부터 잠이 일찍 깬다.


어렸을 때 주말이라고 좀 늦게까지 자려고 하면

늘 아침에 일찍 일어나 집안팎을 정리하는 아버지의 부스럭 소리를 들으면서

늘 생각했다.


아니 아부지는 잠도 없나...

좀 주말이라도 늦게 자고 싶은데...

그러면서 뒤척이다 일어났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


세월이 지나 그 아버지의 나이가 됐다.


이제 그에게 알람은 필요 없다.

새벽 4시 반에서 5시 사이에는 저절로 깬다.

12시 전에 자건 이후에 늦게 자 건 깨는 시간은 똑같다.

피곤함에 차이가 있을 뿐.

이제 주말에 좀 푹 자는 것이 바람이 되는 나이가 된 것이다.


그날, 어느 토요일 아침도

그는 아내와 아들은 잠든 집의 거실에 나와

우두커니 다시 소파에 앉아있다.


새벽에 해 뜨지 않은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는 거실에 있으면

마음은 편안하다.

또 오늘은 어떻게 하루가 시작될까.


점점 날이 밝아온다.

날이 밝아옴은 희망을 주기보다는

또 하루를 살아간다는 뭔가의 반복의 시작일뿐이다.


오늘 하루는 어떻게 살아갈까...

하루가 시작되기부터 그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한다.

걱정이 습관이 되고,

그 결과를 빨리 알고 싶어 하는 조바심이 그를 다그친다.

기다려도 될 텐데...


언제가부터 인스턴트 생활이 찌든 그에게 찾아온 병이다.

그렇다고 그를 치유할 약도 없으면서 걱정만 많고

뭘 해야 한다는 의무감만 늘어갈 뿐이다.


고민을 없애려면 몸이 피곤해야 한다는데...

그는 방에 들어가 책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당장 생각나는 것은 그것밖에 없어서.

정리하면 좀 낫지 않을까 해서.

음악이 나오는 유튜브를 틀어놓아 외롭진 않다.



PC 스피커에서는 김광진의 노래가 나온다.

천재 싱어송라이터 김광진.

이 노래는 자신이 3각 관계에 있었을 때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었다지.

그래, 이 노래의 가사가 편지 내용에 있었던

그런 시절에 나도 살긴 살았는데...

어느덧 나는 오십 줄에 중년이 돼 가고 있지....

https://youtu.be/AKSg5cOqf8M?si=Jd1vwec1Lzy-Sn7I



'후두두둑~ 촥!"


정리하기가 무섭게 서류더미가 떨어진다.

내 이럴 줄 알았다.

그렇게 처박아 놓았으니...

괜히 정리했나? 옛날 것까지 다 떨어졌으니.

그는 한숨을 푹 쉰다.


방안에 널브러진 서류 더미에는

여러 개의 종이 더미가 뿌려져 있다.


예전에 뽑아놓았던 신문기사,

영어 공부할 때 받아놓은 프린트물....

그리고 언젠가 모아두었는지 모를 편지 꾸러미들.


'아 나도 편지를 쓰고 받은 적이 있었구나.'

그는 히죽 웃으면서 하나를 펼쳐 들었다.


아직 창문으로는 햇볕이 안 드는데,

방구석에 쭈그려 앉은 그가 펼쳐든 30년 전의 편지...


30년간 책장 구석에 처박혀있던 후레시맨의 기억은 그렇게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