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가을, 후레시맨의 첫사랑은 그렇게 찾아왔다.
* (구) 경찰대학 상징탑
1992년 봄. 3월.
지난 2월 말 신승훈의 '보이지 않는 사랑'이 가요톱텐 골든컵을 수상하면서 아웃되고, 그 밑에서 꿋꿋이 버텼던 양수경이 '사랑은 차가운 유혹'으로 정상에 등극했던 3월 초.
태진은 어설프게 학력고사를 거쳐 대학생이 되었다.
경찰대학생.
사관학교와 비슷하게 입시에서는 특수대학으로 분류되었지만 그래도 '대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좀 다른 거 아니냐고 하면서도, 사관학교에서나 보는 졸업식 분열 연습이나 기숙사를 ~중대라고 하면서 제복도 입고 매일 저녁 점호를 받는 통제된 시간 속에서 그는 경찰대학 1학년이 되었다.
제복을 입고 규율 속에 사는 그들이지만, 그들 역시 피가 끓는 20대 젊은 이들이기에 여느 대학생들처럼 미팅도 하고 예쁜 여자친구도 사귀는 꿈을 꾸지만, 현실에서 실적은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제복을 좋아하는 여자들도 많잖아요?"
물론 그렇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애들은 제복을 안 입혀놔도 여자들이 좋아할 극소수의 학생들이고,
백설공주가 자다가 일어나 '너 말구 6명은 어디 갔냐?'라고 물을 만한 난쟁이파나 멀쩡하게 생겼지만 입만 벌리면 손해라는 심각한 사투리-speaking의 촌놈들 그리고 '피티 10,000개 팀' 멤버 등 다수의 쭉정이들은 희망찬 기대를 안고 주말 외출을 나갔다가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고 귀교 버스에 올랐다.
※ 피티 10,000개 팀 : 입학 당시 너무 뚱뚱해서 제복이 맞지 않는 학생들이 제복 핏에 맞도록 밤마다 PT체조를 만 개 이상을 해 입학 전까지 감량을 하여, 실제 어떤 이들은 20kg 이상의 감량 효과를 단 한 달여 만에 이뤄내 인생 역전을 이뤄내고 내친김에 운동에 맛을 들여 이후 몸짱의 삶을 산 친구들도 있다. 물론 30년 전의 일이다.
한편으로는 주말마다 나가서 6~7명이 떼거지로 미팅하면서 퀸카를 바란다는 것은, 요즘 강남에 아파트를 청약으로 따내는 것보다 더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괜찮은 애들이 왜 주말을 기다렸다가 미팅에 나오겠는가? 그러니 맨 나오는 것은 '취미는 독서구요...'하는 이들만 쏟아져 나왔다.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태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별 성과 없는 흉작을 내면서 대학 입학 당시 기대가 저물며 주말에도 외출을 나가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어느 땐가 귀교길에 들른 지금은 없어진 강남 동화서적에서 사 온 에릭 시걸의 '닥터스' 같은 책이나 읽으면서 그냥 이렇게 주말에 편하게 지내자 하는 날이 많아졌다.
어쩌다 선배가 "너는 왜 주말인데 안 나가니?"라고 물으면 "취미가 독서라서요..."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방에 돌아와서는 "지는..."이라면서 분루를 삼키다 보니 1학기가 다 지나가 버렸다.
봄에 씨를 뿌리고 김을 매면서 여름에 땀 흘리지 않은 자는 가을에 수확이 없다.
경찰대학은 가을에 축제를 했다. 학교 뒷산인 청람산 이름을 따서 지은 '청람학술축전'.
일반인의 출입통제가 있는 이 대학도 축제가 있는 며칠만큼은 일반 대학생들에게도 오픈 하우스가 허용되고, 경찰대생들도 그 여학생들과 학교 여기저기서 손을 잡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목격된다.
경기도 용인군 구성면 언남리 88번지에 위치했던 이 시골 학교에도 오래간만에 도시의 세련미로 무장된 여대생들이 여기저기서 목격됬었다.
그러나 이 시기가 더 비참해지는 이들이 있다.
바로 봄에 씨도 안 뿌리고 김도 안 매면서 여름에 땀도 흘리지 않은 자들. 이른바 'KNPC(경찰대-'Kyeong chal dae' No Partner Club)'이라는 주홍글씨가 박힌 이들은 마치 나치의 박해라도 받은 유대인들처럼 곳곳에 숨어서 축제가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린다.
더구나 1학년 중 KNPC 멤버들은 숨을 자유도 없이 '축제 안내 요원'이라는 미명 아래 동원되어 축제기간 중 방문하는 외부인들에 대한 안내나 행사 진행요원으로 강제 동원된다. 사회는 약자들에게 더욱 가혹하다는 현실을 처절하게 느끼게 된다.
간혹 2학년임에도 불구하고 KNPC인 선배들을 보면서 위안을 삼지만, '작년에도 이거 했다'라는 애정 어린 조언에 착잡한 마음은 더욱 심해진다.
봄에 씨를 엉뚱한 데다 뿌려대고 김도 안 매면서 여름에 땀도 안 흘렸던 태진은 가을에 정의의 심판을 받았다. 그는 양재역에서 축제를 방문하는 학생들을 위해 마련된 버스의 승차 안내요원으로 선발된 것이다. 물론 '어차피 축제기간 생활실에서 뒹굴 놈들'이라는 요건 이외 특별한 선발요건은 없다는 것이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1992.9.25.
그날은 축제 2일 차였다.
태진은 무덤덤하게 양재역에서 출발하는 버스 출입문에서 탑승하는 학생들을 싣는 역할을 맡았었다. *팔림을 무릅쓰고 버텼던 첫 번째 셔틀과 달리 두 번째 셔틀에는 어느 정도 얼굴도 철판을 깔고 편해진 데다 다행히 앞 좌석에 한자리가 비어 한 시간 남짓의 거리를 앉아서 갈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학교까지 몇 시간 걸려요?"
30분 정도 지났을까, 옆자리에 앉은 여학생이 태진에게 물었다. 노란 점퍼에 청바지, 그리고 랜드로바를 신은 그냥 수수한 학생이었다. 태진은 반사적으로 답했다.
"한 30분 더 가면 됩니다."
만화책을 보면 '...'으로 표현되는 그런 썰렁한 분위기.
멋쩍어서 한마디 더했다.

"남차친구 만나러 가나 봐요?"
"아.. 우리 오빠가 4학년 000 학생인데, 같은 방 친구가 축제 파트너가 없다고 하루만 해달라고 해서 가요. 공부도 잘하는 사람이라는데."
"(조심해야겠네 -_-+) 000 선배는 제가 학교 처음 들어가서 생활관(기숙사)에 들어갔을 때 우리 중대장이었어요... 훌륭한 선배님이시죠. 그러면 오늘 만나시는 친구분도 우리 생활관인 거 같은데 누구신가요?"
"### 학생이라고 들었어요."

### 선배.
그는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맞았다.
그러나 우리 일반인의 통념상 '아무개는 공부는 잘해' 내지 '아무개는 착하게 생겼어'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지 않은가? 그는 무심코 말을 뱉었다.
"못생겼는데..."
DJ doc의 'DOC와 함께 춤'이란 노래에 나오는 세상의 막바지에 다다른 인간들의 세상을 향한 불만의 목소리처럼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본능적으로 말을 뱉어냈다.
옆자리 앉은 학생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태진도 자신이 뭔 짓을 했는지 심각하지 않게 생각했다.
30분여 지나 버스는 학교 본관에 도착했다.
태진은 버스에 내려 승객들을 하차시켰다. 축제가 펼쳐지고 있는 학생회관과 '늘푸름뜨락'이라는 잔디 광장으로 인파들이 사라져 가는 것을 보면서 오늘 일을 마쳤다고 안도하고 생활실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버스가 떠나고 한 학생이 남아있었다. 아까 잠깐 얘기를 나눈 이었다. 그녀가 먼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네?"
"학교 구경 좀 시켜주세요."
"오빠하고 ### 선배가 학생회관에서 기다릴 텐데요."
"괜찮아요."
이거 어떻게 하나...
고민하던 태진은 인간의 도리상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시죠."
숙녀의 요청에는 반드시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것이 그가 이십 평생 지켜온 인간의 도리였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어떤 이들은 아무리 준비하고 노력해도 잘 맞지 않는 사람이 있고, 어떤 이들은 그다지 준비 없이 처음 만나도 말이 잘 통하는 이들이 있다. 소위 말하는 '케미가 맞는'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를 학교의 '비룡지'라는 호수로 안내했다. 본관에서 학생회관과 반대되는 방향이었다. 옛날에 학교를 지을 때 호수를 팠는데 갑자기 용이 튀어나와서 비룡지라고 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았는데, 그녀는 자기네 학교에도 '자줏빛 노을이 내리는 연못'이라는 뜻의 연못이 있다며 거기 못지않게 예쁘다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비룡지를 돌아 다시 학교 대강당을 거쳐 강의동 뒤편으로 가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는데 편했다. 어차피 조금 있다가 선배에게 데려다줄 사람이니까. 원래 그렇지 않은가. 미팅 나가서도 정말 잘해야겠다고 생각하면 스텝이 꼬이는데, 마음을 내려놓으면 청산유수가 되는 것처럼.
강의동 뒤편을 지나 학생회관이 가까워지는데 사진 동아리 '빛여울'의 동기가 지나가다가(알고 보니 이놈도 KNPC를 면해보려고 장미꽃에 사진기를 들고 다니며 알바한다는 핑계 대고 다니던 중) 니가 웬일이냐라면서 여친에게 주라고 들고 있던 장미꽃 한 송이를 주었다. 아닌데... 그러면서 축하한다고 사진을 찍어주겠다나.
태진은 장미꽃을 그녀에게 주면서 사진이나 같이 찍어달라고 했다. 강의동 뒤에서 남이 볼까 몰래 멋쩍게 찍은 모습은 어차피 진짜도 아닌데 하면서 과장된 포즈로 과감하게 찍었다
학교 방송 스피커에서는 계속 방송이 울려 퍼졌다.
"금일 ### 학생을 면회온 *** 학생은 학생회관에서 오빠 000 학생과 ### 학생이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 와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저쪽이 학생회관이에요. 즐거운 시간 되세요."
그러나 그녀는 가지 않았다.
"그냥 학교 좀 더 구경시켜 주세요."
"어?"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순간 걸리면 죽는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태진은 다시 학생회관 반대편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그것은 영화 '졸업(1967년작)'의 엔딩 장면과도 같은 것이었다.
"금일 ### 학생을 면회온 *** 학생은 ### 학생이 학생회관에서 오빠 000 학생과 애타게 기다리고 있으니 제발 좀 와주시기 바랍니다... 열 번째로 말씀드립니다...."
그날 그녀를 버스에 태우고 다시 양재로 돌아갈 때까지 그녀를 애달프게 찾는 안내 방송은 끊임없이 교정을 울려 퍼졌다. 버스에서 그는 어색하지만 끊어질 듯 그러나 끊어지지 않는 얘기를 이어갔고, 그녀의 학교 기숙사 주소까지 얻을 수 있었다.
학교로 돌아오던 그날 밤은 십 몇 년 전에 읽은 안데르센 동화가 생각났다.
그는 '미운 오리 새끼'에서 '하얀 백조'로 태어난 것이었다.

그날 밤, 점호를 마치고 생활실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마주친 ### 선배에게 태진은 경례를 붙였다.
"어 그래, 축제 안내 요원하느라 고생 많았다메."
"예. 선배님도 고생하셨습니다."
선배를 뒤로하고 생활실로 향하는 그의 얼굴은 죄책감으로 가득했다.
'선배님, 죄송해요... 나중에 잘할게요..'

하지만 그날 밤, 태진은 이불속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잠이 들었다...
'내일부터 편지를 쓸 거야.... 몇 날 며칠이 걸리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