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땠을까-그땐 그런지 몰랐어...

다시 기다림은 행복이 된다.

by Tangpi

* 대학 1학년, 공강 시간에(1992.4월)



"뭐하노! 주말에 잠 좀 잘려했더구먼..."

아내의 짜증 섞인 단발성 고함이 고막에 꽂힌다.


"아, 니가 정리 좀 하라메... 알았어 문 닫고 할게.."

"지기뿐다..."


태진은 아주 옛날 어른 몰래하던 뭔가 하다 걸린 것처럼,

문을 닫고 흩트러진 편지 하나하나를 보면서

오래전 떠나온 그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잊었던 34년 전, 1992년 가을이다.

https://youtu.be/q7SDW-u0bYQ?si=ZhvTRithfMG5khRh



그때 대학생들끼리는 각자의 대학에서 만든 학보를

자신이 A4 용지에다 쓴 편지와 함께 보내는 것이 유행이었다.


어찌 보면 자신만의 편지를 보내기 쑥스러워

학보의 수많은 글 속에 묻어 자신의 글을 보내는

수많은 별이 떠있는 밤하늘 위를 날아다니는

반딧불이 같은 그런 학보 뭉치를 보냈다.

우체통 앞에 쌓여있는 학보뭉치를 보면서

내 것도 없나 뒤져보기도 하고

없으면 그냥 없나 보네라고 생각하고


어느 날 우연히 수신인이 자신인 학보를 발견하면

성탄절날 산타클로스에게 선물을 받은 것처럼

함지박 같은 웃음을 지으면서 뛰어가던 시절이었다.


메신저도 스마트폰이 없어도

바로바로 확인할 수 없어도

기다림이 설렘이 되고

설렘이 시간을 거쳐 기쁨으로 번져가는 시절이었다.


그때 축제 이후

***에게 편지를 어떻게 보냈는지

50줄에 선 지금의 태진은 기억할 수 없다.


하지만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경찰대의 가을,

특히 10월의 풍경은 너무 아름다웠다는 것이다.

경찰대 가을.jpg


아마, 20살의 그는

그 나무들을 바라보며 수줍은 첫 편지를

학보에 싸서 보냈을 것이다.

11월, 그 친구가 답장으로 보낸 학보가 아직도 남아 있으니.


20170728_받았던 학보들.jpg
921113.jpg


학보를 둘러싼 편지에 적힌 짤막한 글에

그는 늦가을의 스산함에도 외롭지 않았을 것 같고

굳이 학보에 포장 않고 용기를 내서

편지지를 채워 나갔을 것 같다.

진정한 친구가 되자고.

그래서 재밌게 살고 싶다고.


그랬을 것 같다.



곧 그 친구도 편지지를 가득 채워 서울의 향기를 보내왔다.



.... 함께 접촉하며 가까이서 걱정해 주기도 하고 얘길 주고받았던 친구들이 갑자기 낯설어질 때가 있거든. 때때로 '그들이 내게 어떤 사람들이지, 난 또 그들에게 어떤...?' 하는 의문이 생길 때 말이지.


오늘 수업 시간에 문득 그런 말이 나오더라.

"He is away but his presence is always with me"


태진이가 진정한 친구를 원하는 만큼 내가 그리고 네가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어느 날에 경찰대행 버스 안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태진이, 언젠가 정말 서슴없이 어떤 말도 주저 않고 얘기할 수 있는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 언젠가 만나 서로가 얘기를 할 땐 어쩜 일방적인 누군가의 얘기가 있을지도 몰라. 태진이 얘기를 듣고 싶고 많은 얘기를 하고 싶은데도 말이지.


근데 말이야.


난 태진이 생활신조가 "재미있게" 살자는 것인지 몰랐었어. 편지 때마다 자신은 그렇지 않다며 다음엔 재밌게, 재밌게... 하더니만 그게 신조 탓이었구나.


뭐든 거창하게 꾸미려들지 않고 소박하게 즐겁게 생활하려는 네 모습에 더욱 정감이 간다.


1992.11.24.

your friend **가

921124 친구가 되자.jpg


편지를 받고

나도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얼마나 좋아했을까?

웃음을 주체 못 했을 젊은 날이

그는 생각났다.


겨울을 재촉하는 여우비가 많았을

11월의 어느 밤에도

그는 행복했을 것이다.

https://youtu.be/9hese2_Bbig?si=oBJ_G_W70eZJ0jDZ


12월의 교정은

겨울이 찾아오면서

화사했던 캠퍼스의 나무들은 가지만 남겨두었을 테고


태진은

기말고사와 동기생회에 있으면서

학생수당 배분 등의 소소한 일상을

어린애가 엄마에게 조잘대듯이

아니면 오랜 친구에서 푸념하듯이

그런 신변잡기 같은 것도 써서 보냈던 것 같다.


12월 그 친구의 편지는

1년을 마무리하는 공허함을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써 내려갔다.



아침에는 문득 뇌리에 엄마, 아빠, 동생, 조부모가 겹쳐드는 것이 한참을 잠자리에서 뒤척이기도 하구 말이야. 요즘은 왜 그런지 몰라. 딴에는 늘 함께하던 친구들과 떨어져 조금은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게 되는 게 서운해서 그럴는지도 몰라. 요즘에선 늘 새벽 4시 무렵에야 겨우 잠들어 정오가 다 되어 깨곤 한다. 아침엔 늘 변함없이 잠자리는 따뜻하기만 하지.


근데 태진인 그간 잘 지냈니?

나처럼 회의가 드는 건 아니고?

수당 분배는 잘했나 모르겠네.

날씨도 쌀쌀한데 몸은 잘 추스르고 있는지.


어제는 눈이 왔었지.

시험이 14일부터라니 공부하느라 지금쯤 바쁠는지도 모르겠다.

문득 고개를 들었더니 태진이가 예전에 건네준 장미 송이가 눈에 띄었다.

보고 싶은데...


방학 때 편지 자주 하고 전화도 괜찮겠네.

이젠 짐을 싸야겠다.


잘 살아.

안녕.


1992.12.12.

**가

921212 연말, 회의감-성급,서투름.jpg



경상도의 어느 작은 도시가 고향이었던 그 친구는

그렇게 서울에서의 첫 대학생활을 마치고

기숙사의 짐을 싸서 내려갔을 것이다.


겨울방학 동안

그도 그리고 그 친구도

한 번쯤 편지를 보내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남아있는 것은 없다.


나머지 마지막 한 장의 편지는

그다음 해 4월

어느 봄비 내리는 날에 보내졌다.




밖에 빗소리가 꽤 요란하다.


가끔은 천둥소리까지 곁들어가며 지붕 처마 밑으로 칠퍽칠퍽 빗물을 떨어뜨려가며 연속 jump를 시도하고 있다. 안은 조용하다. 내 roommate 언니는 신문을 넘겨가며 기사를 재확인하고 있고 나는 지금 이렇게 태진이한테 편지를 쓴다. 그 편지글엔 이렇게 적혀 있다.


"진아, 안녕!"


어떻게 지내니?

아직도 슬럼프에 빠져 있는 것이니?

....


여하튼 차처하고 태진이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용인에도 비가 올 것이고, 혹 방안에 쭈그리고 앉아 음악을 듣는 건 아니지,


그럼 이만, Bye Bye.


1993.4.22.

비 오는 날


p.s. 경찰대 축제 때 너랑 찍은 사진 어떻게 된 거니? 있으면 한 장 보내줄래.

930422 시험기간.jpg


지금처럼 휴대폰이 없던 시절,

학교에서 그 친구에게 삐삐 메시지를 받으면

주위의 눈을 피해

생활관에서 한참 떨어진 강의동 3층의 공중전화를 잡고

그 친구와 통화를 했었다.


그때마다 그런 통화를 했던 거 같다.


"내가 니 남자친구 아니야?"

"니가? 하하"

"왜?"

"넌 그냥 친구야. 친구."


돌이켜보면 너무 어렸던 것 같았다.

사랑은 그렇게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거늘.

애인이 아닌 친구로도 좋은 친구였는데.

https://youtu.be/K3Bq9mIHbzw?si=4uxeIaT4Auz5NUsN


지나고 나면 아쉽다.


이후 외출외박을 나가면

태진은 그 친구와 만나 밥도 먹고 차도 마시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지금 생각하면 너무 서툰 사랑이었던 것 같다.

어떻게 이 친구에서 가까이 있어야 하는지 몰랐으니까.

그렇게 시간은 지나갔다.


태진은 2학년이 되면서 본격적인 전공 수업에 들어가고

무언가를 준비하기로 하면서

그 친구와의 연락이 잠시 미루기로 했다..


그렇게 해야 그런 결단이 있어야

마음먹은 것들도 빨리 끝나는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니 인생의 좋은 친구를

너무 쉽게 보낸 것이었다.


그렇게 그와의 기억은 잊혀 갔다.

그리고 한참 뒤에서야 알았다.


그것이 서투른 첫사랑이었음을.

https://youtu.be/75t1nGELRiY?si=AWLPmLQQFufnNMkj


만약 그때를 이어갔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그렇게 잊혔기에

지금 미소를 지으면서 회상할지도 모르겠다.


그 친구와의 편지들이

어느덧

바닥에 떨어진 종이더미 옆에 소복이 쌓여있다.


잠시나마 행복한 시간을 주었던

그 몇 장의 편지와 학보들을

태진은 비닐 파일 폴더에 꽃아 두었다.


고맙고,

살다가 힘들면 다시 봐야겠다고.


그에게 보낸 편지들을 기다렸던 날들처럼

그는 또 다가올 설렘을 기다리면서 살아갈 것이다.


기다림은 행복이 된다.

https://youtu.be/cHbNaFNoHCY?si=C0DhuyNHFSirmCFU




"한 시간을 종이더미를 쌓아놓고 뭐 하는 거고!!"


태진은 방문이 열린 채 편지를 보고 있는 것을

아내에게 들킨 지도 모르고 계속 보고 있었다.


ㅎㅎ 다시 현실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