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본능이다.
* 주말, 동네 카페에서(2025.12.3)
주말 오후.
태진은 가끔 아내의 성화에 따라 슈퍼에 장을 보러 간다.
집에 빈둥대니 그냥 바람이나 쐬자 하고 따라 나갔다가,
아내가 커피숖에서 '차나 한잔 할래?' 하는 제안을 받는다.
"야, 여자들이나 커피 시켜놓고 수다 떠는 거 좋아하지 남자들은 별로야."
라고 보통 말하지만, 내일부터 출장이라 그냥 봉사하는 셈 치고 따라간다.
"아까 뭘 그렇게 봤는데?"
커피를 한 모금한 태진의 아내가 묻는다.
"어.. 그냥 예전에 개똥이나 문룡이가 보냈던 편지들... 버려야지 뭐. 다 쓰레기인데."
개똥이.. 아내가 아는 몇 안 되는 친구 별명이다.
아마 '어 대학교 1학년때 처음 사귀었던 여자친구 편지인데...'라고 말하면
'야, 이 인간아, 내가 첫사랑이라메!'라고 바가지나 긁히겠지.
"근데, 뭘 그렇게 골똘하게 생각하고 그러나?"
"아니, 뭐 옛날에 친구들한테 이렇게 편지도 받았었네.. 라고 생각한 거지 뭐."
그래, 거기서 둘은 두 손으로 커피 잔을 감싸면서 말하지 않는다. 말할 필요 없는 동감의 표시랄까.
"편지는 고사하고 뭐 몇 명이라도 연락하나?"
"아유, 나도 마찬가지야~"
아내의 맞장구에 넋두리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너는 그래도 여기 부인들하고 브런치도 하고 차도 마시면서 수다도 떨고 바쁘잖아.
난 하루가 어떤 줄 알아? 출근-일-점심-일-퇴근이야. 보기 싫어도 봐야 하는 사람도 많고. 난 혼자 밥 먹을 때도 많아. 그게 편하기도 하지만."
"아이고, 누가 보면 언제부터 편지라도 많이 받은 사람인 줄 알겠네. 연애할 때나 지금이나 똑같으면서."
"ㅋㅋ 그렇긴 해."
태진은 할 말이 없다.
연애의 기억도 이젠 20년이 넘는 기억이기에....
'하긴, 누가 날 생각해서 그렇게 편지를 보냈다고.. 내가 무슨 연예인이냐..'
언젠가부터 누구도 관심을 갖아주지 않는 50대.
그나마 이렇게 커피 한 잔 하자고 끌고 오고 말 걸어주는 아내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니면 그는 오늘도 그렇게 주말을 보내다가 하루가 다 갔을 것이다.
"아휴, 애 점심 차려줄 시간 됐네. 얼른 가자."
아내의 재촉에 자리에서 일어난다. 젠장, 좀 몇 마디 더 하려고 했더니만...
점심을 먹고
아내는 안방, 아들은 제 방, 태진도 자기 방으로 각자 들어간다.
주말의 오후는 집 안에서 조차 각자의 삶으로 바쁘다.
태진은 내일 출장 준비를 하다가 생각보다 챙길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다시 아침에 아내의 등장에 갑자기 처박아 놓았던 편지 더미를 꺼낸다.
태진아!
니가 없는 중곡동은 아! 아!
소금 없는 순대, 고추장 없는 떢볶이다!
이 엉아를 보리고 어이 그 먼 곳으로 떠났느냐! 꺼이꺼이
그 노란 머리, 하얀 피부, 안경 너머 너의 큰 눈, 정말 보고파 미치겠다.
너와 보냈던 그 고교 시절이 이젠 추억의 저 편에서 나의 심금을 울리는구나!
네가 떠난 뒤 나는 가슴 한구석 빈자리를 느끼며
그리운 친구의 전화를 눈이 빠지게 기다렸단다...
(1992.2.28. 하 00)
1992.2월.
태진은 졸업식을 앞두고 갑자기 합격 통지를 받고 다음 날 대학으로 불려 갔다.
그날이 바로 고등학교 친구들과 밀가루 뿌리기로 약속한 졸업식이었는데...
갑자기 들어간 학교의 낯선 환경에서 힘들어할 때,
한참 사춘기를 시작하던 고등학교 시절 한 동네에서 3년간 등하교를 같이하고
교실 말고도 독서실, 도서관, 오락실 등을 함께했던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30명을 몰아넣은 군대 내무반 같던 방에서 포커로 밤을 지새우던 수학여행의 기억도. ㅎㅎ
얘가 이렇게 나를 보고 싶어 했나? ㅎㅎ
그 친구는 이미 몇십 년 전 미국으로 건너가 미네소타주에서 회계사로 살아간다는 이메일을 받은 이후로 연락이 끊긴 지는 한참 되어 버렸다....
문득문득
너와의 고등학교 생활이 떠오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즐거웠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독서실 층계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얘기 나누던 일,
밤 1~2시에 별을 바라보며 집에 돌아가던 일,
이런 모든 일들이
너와의 고등학교 시절을 한층 더 빛내주었던 것 같다.
(1992.5.10. 임 00)
92년 5월이면
다들 대학에 입학해서 후레시맨의 설렘은 사그라들 때지.
친구들은 처음 겪는 자유에 그땐 술들도 많이 먹었다고들 해. 그러면서도 생각은 났었나 봐.
이 친구가 생각나는 건,
공통점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지.
태진이 60명 중에 5번일 때 그는 56번이라 키도 반에서 제일 큰 축에 들었고 인물도 좋았고 집도 꽤 잘 살았던 거 같고,
그런 집에 누나가 둘이 있어 귀하게 큰 외동아들이었는데 이상하게 태진한테 잘해주었던 친구였지.
학력고사를 100일 앞두고
'우리도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면서 독서실 옥상에서
그 싸구려 양주인 '캡틴큐'를 사 갖고 와서 누가 보면 큰 일 나는 줄 알고 벌컥벌컥 먹었던... ㅎㅎ
대학교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해 미국 주재원으로 나갔다가 귀국하고 만나
이제는 기러기 아빠로 살아간다고 얘기했던 것이
벌써 10년이 다 돼 간다.
우리 만남 자체에 의의를 두는 것은
그만큼 생각에 대한 행복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 아닐까?
난 네가 매우 소중한 친구라고 생각되고
네가 또한 나를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러한 만남 자체는 그 자체의 의의를 가지는 것이라 생각된다..
너무 이상한 이야기를 한 것 같구나...
(1993.4.6. 김 00)
정말 이상한 이야기를 쓴 놈이군...
그 친구는 참 오래된 친구지. 중3 때 만났으니.
중3 때는 태진의 인생에 가장 좋은 친구들을 만났던 시절이었다.
함께 유재하의 '지난날'을 듣고 부르는 여유도 있고
착하고 공부도 열심히 했던 좋은 친구들.
10년 전인가 이 친구가 개업한 병원에 찾아갔다가
연고나 로션도 더 가져가라고 챙겨주었던 것이 생각난다.
가운을 입고 진료실에 앉아있었지만
왠지 장난치고 싶은...
보고 싶다.
요즘은 예전에 너처럼 날 이해해 주는 사람이 별로 없거든.
그래서 더 보고 싶고, 더 그립다.
웬 청승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정말 그립다....
(1993.5.17, 안 00)
어제는 왠지 네가 무척 그리웠다.
그래서 술도 조금 마시고 눈물도 조금 흘렸다.
그날따라 왜 이리 네가 그리웠던지.
이심전심인가 보다 오늘 너에게 엽서가 온걸 보니.
(1993.11.14, 안 00)
친구는 현존하는 태진의 가장 오랜 친구였다.
국민학교 4학년 때 만났으니... 40년이 넘었다.
그와는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같이 다녔다.
특히 중학교 때 태진이 어머니가 장사를 시작하면서
집에 혼자 있으며 외로운 사춘기를 보내던 시절,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같이했던 형제 같은 친구였다.
태진이 아내와 사귈 때 처음 보여준 친구도 그였고,
그의 신혼집에도
첫 딸이 돌잔치를 했을 때도
아내와 갔었던 친구였지.
언제 만나도 할 말이 많을 고향친구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겠다.
EXPO 장의 불꽃놀이를 보면서
사심 없이 어머니와 너를 떠올렸다.
한 분은 어머니이며
또 하나는 세상에서 엄마, 누나 다음으로 나를 신뢰하는 지우가 아닌가...
멀리서 내 마음으로 그려내는 너는 실제의 너완 다를 것이다.
내가 그려내는 너도, 또 너 자신도 변해간다.
그러나 변한다고 멀어지는 것이냐?
아니다!
언젠가 10대일 적의 우리의 우정이 얼마나 위태스러운 것이었나 하고
술 한잔 하며 회상하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1993.9.20, 박 00)
너에게 이렇게 멋대로 편질 쓴다.
읽기 불편하겠지만 너라면 싫어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너에게 편지를 쓰니까 좋다.
넌 내 고향의 한 부분이다.
응석 부리고 싶었다.
우울할 때 편지 쓰기 싫었는데...
(1995.5.13, 박 00)
그는 태진이 아는 가장 똑똑한 천재인 친구였다.
서울에 처음 생긴 과학고에 붙어 2년 만에 조기 졸업했고
천재들만 간다는 KAIST도 박사까지 무난히 끝낸 후
실력 하나만으로 굴지의 대기업의 임원급인 연구위원을 30대에 해냈다.
그는 참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도 공부를 잘했으며
친구들의 끊이지 않는 수학 질문에도 늘 친절하게 받아주고 책임감 있게 풀어주던
친구들을 품어주는 여유가 있는 착한 심성의 친구였다.
근데 지금 봐도 글씨는 여전히 악필이다.
뭐 먹고 사냐고, 그건 임마 짬밥이지.
살만해. 밥도 주고 재워주지 또 담배도 준다.
와, 담배를 몰아서 주는데 너도 담배 두 보루 쌓아놓고 피워봐.
쳐다보기만 해도 가슴이 뿌듯하다.
초반에는 정말 시간이 않갔는데 요새는 잘 가.
밥 먹다가 하루가 지나가는 것 같애.... 참 재미있다.
어쩌다 텔레비전을 보면 가장 재미있는 것이 광고야.
여자만 나오면 괴성 지르고. 불쌍한 군발이라니까.
새벽에 홀로 불침번을 설 때면 별별 생각이 다 난다.
벌레 우는 소리가 왜 이리 처량하게 들리는지.
보고 싶구나.
좀 있으면 개학이겠지.
여기 와서 가장 먹고 싶은 게 콜라 한 모금이다.
정말 시원한 콜라 한잔 먹었으면 좋겠다...
할 일 없으면 모여서 먹는 얘기도 많이 해.
시원한 콜라에 빵 하나 먹었으면...
젠장 내가 군대에서 편지 보내는 것 생각도 못했는데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늙었냐...
훈련소 생활이 끝나면 또 어디로 가야 되고 어떻게 생활해야 할지 까마득하다.
젠장할 또 집합이래, 나가봐야 해....
(1994.8.21, 정 00)
대학3학년이 되던 해는 친구들이 군대를 많이 갔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편지도 많이 받았다.
이 친구도 입대하기 며칠 전날 안암동에서 그의 여자친구와 술을 많이 마셨다.
얼마나 많이 마셨던지,
다음 날 오후 네시가 돼서야 깼으니...
그는 고1과 고3 때 같은 반이었는데, 대학을 같이 떨어지면서 친해졌다.
둘 다 재수를 결심하고 담임선생님을 찾아뵙고
'올해는 정말 독하게 하자. 한 달에 한 번씩 만나고...'
하던 1월의 겨울밤 중곡동의 한 언덕이 생각난다.
그는 자신의 아내 될 사람을 태진의 회사로 데려오기도 했고,
그 아내가 지금의 태진의 아내를 소개해주었다.
어찌 보면 가장 고마운 친구일지도 모르겠다.
태진이 편지더미 속에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몇 시간이 흘렀다.
왜 이렇게 지나간 편지를 뒤지는 것일까.
그 시간에 재테크 책이나
회사에서 써먹을 외국어 서적을 읽는 게 낫지 않을까?
이유는 모르겠다.
본능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맞을지 모르겠다.
그러던 중....
태진은 그 편지더미 속에
가장 많은 편지를 보낸 사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글씨가 특이한 것도,
편지지가 예쁜 것도 아니었다.
단순히 그가 보낸 편지가 가장 많았기 때문이다.
태진은 그의 편지들을 추리기 시작했다.
이번 출장길에 기차 안에서나
일을 마치고 숙소에서
그의 편지를 읽기로 했다.
여자도 아닌데 왜 이렇게 편지를 많이 보냈을까?
추리는데도 한 참 걸린,
그 친구의 편지들.
이번 출장은 업무 출장이 아닌 시간 여행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먹어!"
아휴, 저놈에 여편네...
내일 호텔에서는
방해 없이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참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