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 히피, 인권운동, 그리고 탕탕탕
2020년 시즌2로 돌아온 [엄브렐러 아카데미]의 시대적 배경은 60년대다. 세계적으로 인기몰이 중인 넷플릭스의 새로운 시리즈 [퀸스 갬빗]도 대략 50~60년대 미국이 배경이다. 올해 새로 개봉한 영화도 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은 아니지만 코로나 때문에 극장 개봉 대신 넷플릭스로 대중에게 소개된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도 1960년대 말에 있었던 실제 사건을 다룬 영화다.
그러고 보니 2020년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브래드 피트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로 남우조연상을 받았더랬다.
대체 60년대가 뭐길래?
1960년대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극에 달했던 시기다. '냉전'은 일상에서도 많이 쓰는 표현이다. 걔네 둘이 요즘 냉전 중이다, 부모님이 최근에 다투고 냉전 중이라 엄청 피곤하다 등등, 싸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서로 대놓고 부딪히지는 않아도 갈등의 골이 깊을 때를 주로 쓰인다.
딱히 긍정적인 의미로 쓰일 일이 없는 단어인데, 미국은 60년대를 추억한다.
60년대는 어쩌면 미국이 가장 미국다웠던 시기였다.
소련과 미국 간의 냉전은 경쟁적인 분위기 속에서 전쟁 아닌 모든 방식으로 숫자 '1'을 향한 치열한 경쟁이 계속되던 시기였다. 경쟁적인 개발과 성장 속에 두 나라는 독보적이었다. 오직 두 나라만이 독보적이었다. 소련 아니면 미국, 공산주의 아니면 자유주의, 모 아니면 도, 세계는 흑백으로 나뉘었다. 정체성은 '타자'를 정의함으로써 확보되었다.
극단의 세계에서 미국은 이쪽의 제일 끝에 서서 '자유'의 깃발을 들고 '리더'의 완장을 찼다. 소련 또한 깃발을 들고 저쪽 끝에 섰다. 둘은 앞다투어 깃발을 꽂고 다녔다. 산 정상에도 꽂고, 달에도 꽂고, 베트남에도 꽂으려다가 미국이 실패하고 말았다. 베트남전은 미국이 패배한 전쟁이라는 기록과 함께 히피를 남겼다.
히피문화는 60년대 미국의 반문화 또는 대항문화로 일어났다. '반문화'란 사회의 지배적인 문화를 파괴하기 위한 문화를 뜻한다. '대항문화'는 지배적인 가치체계를 거부하는 점에서는 같지만 새로운 질서로 대항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지배문화의 입장에서 볼 땐 똑같은 일탈이겠지만.
[엄브렐러 아카데미]의 넘버 포, 클라우스 하브그리스는 얼떨결에 사이비 종교, 아니 히피의 리더가 되어 자유! 와 사랑, 평화를 외친다. 에피쿠로스 학파처럼 평온한 삶과 행복을 주창하는 클라우스의 추종자들은 온갖 다름을 아우른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그리스 시대 당시에 처음으로 여성도 정식으로 받아들였다. 클라우스는 동성애자고 신자들의 인종은 다양하다.
60년대는 아직 피부색에 따른 유형, 무형의 제약이 존재하던 시기였는데 말이다.
인종차별, 여성차별, 성소수자 차별이 법으로까지 남아있던 60년 대지만, 동시에 각종 차별에 저항하는 인권운동이 적극적으로 발생하던 시대이기도 하다. 불의에 순응하지 않겠다는 저항의식이 들끓던 격동기, 달리 말하면 미국이 한창 젊고 패기 넘쳤던 시절로 정의할 수 있다.
대외적으로는 냉전으로 자유를 외치고, 내부적으로는 인권으로 자유를 외쳤던 60년대. 안팎으로 자유를 외쳤던 60년대는 '자유의 수호자'인 미국이 가장 미국다웠던 시기인 셈이다.
60년대는 베이비부머 세대의 10대 시절이다. 21세기의 기득권으로 자리 잡고 밀레니얼 세대와 열심히 갈등 중인 베이비부머가 60년대를 추억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는 히피문화의 상징처럼 자리 잡은 소설이다. 한국에서는 [노상(길 로, 위 상)]이라는 제목의 금서였다는데, 이제는 시대가 변해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로 나왔다.
1편, 2편으로 구성된 [길 위에서]는 50년대 말에 썼지만 60년대에야 간신히 출판된 문제작이다. 마약, 방탕한 성문화가 뒤얽힌 혼란한 로드스토리라 문제였다는데, 지금 보면 별 것도(?) 아니다.
젊음의 방황을 추억하는 미국을 이해하고 싶다면 한 번쯤 읽어보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