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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제이 Jan 29. 2021

사진 정리를 하다가

우한 여행사진을 찾았다

 후베이성의 성도인 우한은 이제 베이징, 상하이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중국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황학루와 신해혁명은 잊힌 지 오래다.


 불과 몇 년 전 만 해도 우한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중국 여행을 막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조금 멀리 나가고는 싶고 그렇다고 깡시골 구석까지 찾아가기에는 레벨이 딸리던 즈음, 우한이라는 도시가 딱 무난해 보였다. 

 중국 대륙 가운데 즈음에 콕 하니 자리 한 우한은 처음 듣는 것 치고는 엄청나게 큰 도시였다. 이래저래 여행을 좀 더 다니고 나서야 중국에는 이렇게 크고 사람 많은 도시가 적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황학루에서. 당황스러울 만큼 개보수를 많이 해서 역사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중국의 모든 큰 도시마다 저마다의 역사성을 자랑하는 점도 자랑하는 방식도 비범하다는 사실을 우한에서 실감했다. 우한의 황학루는 악양루, 등왕각과 함께 문헌 속 그 황학루인데, 그렇다고 소개는 하는데, 실물은 조금 당황스럽다. 서기 3세기부터의 흔적은 바라지도 않지만, 이건 겨우 몇십 년 된 건물에 불과했다.

 역사를 전공하고 문화유산 업계에 발을 담갔던 경험으로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려는 충동을 내려놓고서도 좀 심했다. 역사상 한 번 도 존재한 적 없었던 모양새로 지어 올렸으니, 이건 같은 자리에 지은 레플리카라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다. 원본을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한행 비행기표. 젊고 패기 넘치는 신도시답게 우한 공항은 큼직하니 깨끗해서 베이징보다 훨씬 쾌적했다.

 놀랍게도 중국 도처가 새로 만든 문화재로 가득했다. 알고 보니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심지어 현재 진행형으로 제작(?) 중인 유산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시기가 오래될수록 왜곡이 심한 편이라 위화감 없이 감상할 수 있는 유산은 자연문화유산이나 근현대의 산물 정도였다.

 다행히 우한에도 감상할 만한 자연유산이 있다. 우선은 장강이다. 양자강, 혹은 양쯔강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장강이 내려다보이는 입지 때문에 황학루도 유명했다. 막상 가보면 그렇게 입이 떡 벌어지는 뷰는 아니다. 호수는 좀 볼 만하다. 우한의 동후(동호, 동쪽의 호수)는 그 유명한 항저우의 시후(서호, 서쪽의 호수)보다 약 6배나 넓고, 매화가 유명하다. 

 어느 봄에 다시 와서 매화축제 구경하자고 했는데, 그때는 중국에 우리가 오래 있을 줄 알았다. 다음 해는 없었다. 이제는 매화는커녕 콧구멍에 바람 넣으러 어디 나가기도 어려운 지경이 되었으니.

강과 호수가 많다 보니 민물게도 많이 난다. 우한에서는 중국 민물게 '따자씨에'를 비교적 저렴하게 먹을 수 있다.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야 중국인들에게 우한은 봄에 가는 곳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여름에는 너무 더워서 '중국의 3대 불구덩이' 중 하나라고까지 불리고, 가을에는 산에 단풍구경을, 겨울에는 눈구경을 하러 가야 하니 말이다. 평지인 데다가 습한 우한은 가을, 겨울에는 볼 만한 게 없다. 

 봄은 놓쳤지만 그래도 잘 다녀왔다고 생각한 이유는 우한이 우창이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우창과 한양을 합쳐서 우한이 된 거지만.

 우창봉기가 일어났던 우창이 바로 이곳이었다. 

후베이의 성도인 우한에는 후베이성립박물관과 우한시립박물관이 있다. 기원전 유물부터 수 천 점이 있어서 볼 만하다.

 우창봉기는 신해혁명의 시발점이 된 사건이다. 신해혁명으로 쑨원은 삼민주의를 기반으로 삼아 중화민국, 즉 중국 역사상 최초의 근대국가를 세웠다. 그리고 여기 우한에 혁명정부기관을 두었는데, 쑨원이라 하면 아무래도 국민당 문제가 있다 보니 현재는 '신해혁명우창봉기기념관'이라는 긴 이름의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현재 중국의 입맛에 국민혁명군의 '국민'이라는 단어가 좀 거슬린다 하더라도 일단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라는 봉건시대가 공식적으로 끝났으니 우창봉기는 의미가 크다. 게다가 우창봉기는 학생이나 지식인이 아닌 군인, 즉 군사력으로 얻어 낸 성과였다.

 지금의 중국이 충분히 좋아할 만도 하다.

말하자면 혁명정부의 청와대/백악관이었던 기념관 앞에서.

 우한이 우창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대체 이 아무 곳도 아닌 먼 땅에서 우리 독립군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버텼을까, 싶어 졌다. 무슨 생각으로 신규식은 남의 나라의 혁명단체에 가입하고 실제 봉기에까지 동참했을까. 을사년에 자결하려고 독약을 마셨다가 시신경이 망가졌다는 예관 신규식,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분열을 비관해 스스로 곡기를 끊고 죽었다는 그 신규식 말이다. 

 우한과 한국의 연결고리는 신해혁명에서 끝나지 않는다. 김원봉도 우한에 다녀갔다. 정확히는 한커우에서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었다. 

 한커우는 한구, 즉 '한양의 입구'라는 뜻으로, 우창과 한양이 합쳐져 우한이 되었다고 할 때의 그 한양이다. 여기에 조선이 수 백 명이 와서 중국군과 함께 항일운동을 전개했는 말인데, 수 백이라고 해봤자 겨우 200~300명 수준이었다. 중고등학교 한 학년 수준의 머릿수다.

 이름도 처음 듣는 우한이라는 낯선 도시에서 한국사를 더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비행기 타고 오면서도 어서어서 숙소를 찾아 들어가기 바빴는데, 나라 잃은 수 백의 사람들은 핸드폰도 없던 시절에 대체 뭘 어떻게 듣고 알고 여기까지 모여들었을까. 

숙소에서 찍은 우한의 야경. 1년 뒤 봉쇄되었던 바로 그 도시가 아직은 빛났을 때. 

 상하이 임시정부를 실제로 가 본 건 우한 여행으로부터 수개월이 흐른 뒤였다. 그 후로도 의외의 도시에서 대한 독립을 외치던 사람들의 흔적을 간간히 만나는 일이 생겼다. 당황스러울 만큼 외진 곳에도 독립군이 있었고, 대한민국 국적의 여권으로 못 갈 곳이 (거의) 없는 나로서는 그때마다 당황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한 여행은 중국에 대한 이해력, 분석력이 한 계단 더 올라가는 계기였다. 중국에서는 무엇을 눈여겨보아야 하는지, 어떤 생각과 관점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던 여행이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때는 그랬다.


 팔 걷어붙이고 본격적으로 여행을 다니면서 우한에 꽃놀이 갈 생각을 접었다. 장강과 호수와 매화가 아무리 유명하다지만 이 넓은 땅덩이에 봄나들이 갈 곳은 하고 많았다. 안 가 본 동네를 더 가보자는 생각에 우한을 살포시 접어뒀는데, 욕심부리지 말고 가 볼 걸 그랬나 보다.

장강의 풍경. 우한은 아니고 훨씬 하류의 쩐장에서 찍었다.

 다시 본 사진 속 나는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려 보인다. 매일 거울을 볼 땐 몰랐는데, 나이를 먹기는 먹었나 보다. 사진 속 우한의 풍경도 지금은 많이 달라졌겠지. 코로나19는 종식되었으니 파티도 하고 다가오는 춘절 행사도 거하게 할 거라지만, 사람들 표정이 전과 같을지는 모르겠다. 


 많은 것들을 잃었다는 사실이 또 한 번 새삼스러운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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