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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제이 Jun 11. 2020

결혼은 Fun하고 Cool하고 Sexy하게 대처해야한다

그걸 설명하는 것 자체가 Sexy하지 않네요

  지금 신랑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내가 평생 결혼 안 하고 살 줄 알았다.

서른도 안 돼서 결혼을 할 줄은 더더욱 몰랐다.


 우리 부부는 신혼생활을 외국에서 시작했다. 신랑은 한국에서 나고 자란 토종 한국인이었고, 나는 외국생활에 익숙해서, 익숙했던 만큼 언어장벽을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중국 베이징에서는 공항 직원조차 영어를 못 했던 것이다. 

 결혼하기 전 까지, 나는 내가 변화를 즐기고 능동적으로 대처할 줄 아는 의연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가족, 지인 모두 나를 조용하지만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사람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우리의 신혼생활은 서로에 대한 지나친 의존과 책임 떠넘기기, 외면, 무시, 불안, 태만, 그리고 그 뒤얽힌 감정의 폭발 그 자체였다. 나는 그저 더 바라는 것 없이 나답게 존재하는 것 만으로 충분했는데, 배우자라는 존재는, 그리고 결혼이라는 환경은 지금껏 멀쩡히 잘 살아오던 나를 부정했다. 

 우리가 베이징이 아닌 서울에서 시작했다면 좀 달랐을까? 너는 그렇다고 답했다. 중국에서의 여건이 많이 부실해서 그런 거라고 말했다. 나는 아니라고 확신했고, 서울로 돌아온 다음에도 너는 음식 주문을 나에게 부탁하고, 청소나 샤워는 미룰 수 있는 만큼 미루고, 바닥에 누워서 핸드폰을 보고 있다. 그런 너의 모습이 지금도 가끔은 역겹다는 생각이 들지만, 처음보다는 Cool하게 대처하고 있다.

칭다오(청도)의 라오산(노산)에서. 신랑은 중국에 있는 내내 매 주말마다 나를 데리고 여행을 떠났다.

 남편은 위기가 닥칠 때 마다 애교와 여행으로 나를 달랬다.

 남편이라는 놈의 자식이 대형사고를 칠 때마다, 나는 이따구로 행동하고 다니는 놈이 내 배우자라는 사실이 쪽팔렸다. 그래서 밖에서는 오냐오냐 하다가 집에만 들어오면 그를 다그쳤다. 실은 밖에서도 몇 번 소리지른 적이 있기는 하다. 다행히도, 꿍얼꿍얼 하면서도 단 한 번도 같이 목소리를 드높이지는 않았다. 이 사람까지 같이 괴성을 질렀으면 나는 분에 못 이겨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그에게 분노의 족발당수를 날렸을지 모른다.

 그도 그걸 잘 알아서인지, 매 번 혀짧은 목소리로 앵앵대며 사과하기 바빴다. 나는 그 때마다 제발 사과 좀 그만 하라고, 사과 할 행동 자체를 하지 말라고, 제발 행동하기 전에 생각부터 하라고 처절하리만치 애걸했다. 서로 다른 이유로 둘 다 이혼은 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편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을 바치고 나는 우리 둘 사이의 권력관계를 다시 한 번 못박는 것으로 더 이상의 폭언을 삼켰다. 

 보통은 이런 상태로 항상 여행을 갔다. 하얼빈에 갈 때도, 그의 재수없는 궁둥이를 세게 쥐어패고 밤을 샌 상태에서 비행기를 탔다. 가서는 죽어라고 놀았다. 아주 Fun하게, 웃는 낯으로 사진찍고 먹고 놀고 마셨다. 그렇게게 기분을 환기해야 일주일을 갈등 없이 버틸수 있었다. 혹여 문제가 생겨도, 며칠만 참으면 주말에 또 떠날 거라는 기대로 감정을 얼추 추스르고는 했다. 

 Fun이 없는 날, 어디론가 떠나지 않는 주말은 위태로웠다. 집안 꼴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고는 정작 힘들다고 뒷수습은 못 하겠다며 드러누워 있는 꼬라지를 참을 수 없어서였다. 대신 집이 아닌 호텔에 난장을 치고 누워 있는 건 나도 좋아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베이징 생활 반 년 차가 되자 신랑은 매일 밤 침대에 누워 폰으로 중국 지도를 구석구석 들여다보며 교통편과 숙박을 예약했다. 그가 나무위키가 아닌 트립닷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도 핸드폰만 하지 말고 네 눈 앞에 있는 인간을 좀 보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만약 남편이 나와 같은 성향의 사람이라 우리 문제의 원인을 끝까지 파악해서 뭔가를 고쳐보겠다고 진지하게 대응했다면, 우리는 이미 진작에 갈라섰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그가 매사에 진지한 나와는 달리 Fun으로 뭐든 해결해보려 덤비는 인간이라, 용케도 우리의 결혼생활은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다. 

미엔산(면산)의 도교사원에서.  나는 역마가 좀 세서, 가만히 있으면 병이 나는 사람이다.

 결혼은, 그리고 해외에서의 신혼생활은 나에게 둘도 없는 자유를 안겨주기도 했다. 일단은 가족으로부터의 자유가 가장 컸다. 많은 사람들은 시집살이 없어서 좋겠다고들 했지만, 나에게는 배우자의 부모님보다 나의 부모님이 가장 큰 부담이었다. 시가는 일단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임을 모두가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선을 마구 넘나드는 건 언제나 정서적 거리감이 없는 사람들이다. 거리감도 없는데, 심지어 사회적 위치도 동등하지 않고 권리까지 있다고 여기는 나의 부모 말이다. 

아이 소식은 없니? 난 또, 뭐 좋은 소식 있어서 연락한 줄 알았지. 신랑 밥은 잘 차려주고 있는거지? 너 그러면 남편을 혼자 두게? 애가 생기면 여차저차 해야겠네?

 저한테 있어서 제일 좋은 소식은 제가 좋은 소식이고요, 저의 배우자는 지금 다이어트 중입니다. 그이가 건강해 질 수 있도록 운동시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요. 이이도 다 큰 성인이고, 누군가가 미친듯이 돌봐주지 않아도 됩니다. 실은 그래야만 하고요. 이 나이 먹도록 남이 돌봐줘야만 한다면 그건 큰 문제 아니겠습니까. 제가 아들이었어도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혹은, 제가 아들이었다면 아주 큰일날 뻔 했겠어요. 요즘 시대에 장가 못가죠 이러면.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구 만리 해외에 떨어져 있던 덕분에 화끈할 뻔 했던 나의 부모자식 관계는 좀 Cool해 질 수 있었다. 얼굴을 보지 않고 음성이나 문자로만 소통하면서 우리는 서로 최대한 정제된 언어를 구사했다. 가끔 만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길지 않은 시간 알차게 보내려면 서로 아쉬운 소리를 할 틈이 없었기 때문에, 상대의 기분을 고려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않았다. 물리적 거리가 정서적 거리까지 보장해 준 덕분에 우리의 결혼생활은 시원하게 유지되었다. 결혼 하자마자 압박에 시달렸으면 나의 멘탈은 남아나질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한 껏 Cool 해진 우리 부부는 한껏 자유로웠다. 어느 쪽 부모님을 먼저 뵈러 가야 할까, 명절은 어떻게 하나, 주말은, 가족모임은 어떡하나 고민할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주말에는 여행가고 평일에는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하고 살았다. 놀고 싶은 대로 놀고, 마시고 싶은 대로 마시고, 대충 거지같이 하고 다녀도 괜찮았다. 남의 시선을 신경쓰기엔 중국은 이미 지나치게 자유로웠다. 첫 단추를 Cool하게 끼운 우리 부부는 이제 Cool하지 못한 결혼생활을 상상할 수 없다. 

중국에서는 같은 금액으로 어마어마한 퀄리티를 누릴 수 있어서, 남편은 어느새 IHG 바이징카(플래티넘카드) 회원이 되었다.

 한편, 우리는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가 새로이 부여한 혜택(?)을 마음껏 남용함으로써 결혼생활을 만끽했다. 신랑은 '유부남 드립'을 구사할 자유를 얻었고, 나는 '아줌마'만이 누릴 수 있는 섹슈얼리티를 획득했다. 나는 더 이상 '어디 결혼도 안 한 처녀가' 따위의 헛소리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것 만으로도 더할나위 없이 기뻤다. '유부녀가 어디'라는 새로운 헛소리가 따라오기는 하지만, 그에 굴하지 않는 게 또 아줌마기도 하다.

 당장 나의 아빠만 해도 내가 덥다고 짧은 옷을 입던 브라를 안 입고 다니던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시집을 '보냈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자신이 주권을 행사할 수 없는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빠가 소유권을 넘긴 주체는 사위인데, 정작 나의 배우자라는 사람은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참견할 마음이 전혀 없었으므로 자연스레 주권은 나의 소유가 되었다. 가부장제 속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이 작고 비실비실한 주권에도 나는 만족감을 느낀다. 지금까지도.

 이제 나는 '타인'을 마주해야 할 때를 제외하고는 브래지어를 입지 않는다. 전에도 브라를 워낙 답답하게 여기기는 했지만, '누구를 꼬시려고' 따위의 지긋지긋한 반응에 쉽게 땀띠와 접촉성피부염을 감내하기를 선택하고는 했다. 이제는 유부녀 쉴드가 있으니 산부인과도 자유롭게 다니고 여성성과 관련된 얘기도 서슴없이 묻고 답한다. 물론 결혼 전이라고 해서 내숭 떨던 인간도 아니었지만, 바보가 아니었기 때문에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그러고보면 브래지어를 차고 피부염에 시달리는 나는 언제나 주어진 시스템에 완벽하게 순응하는 인간이었다. 공부 잘 하고 말 잘 듣는 우수생, 명문대를 나와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다가 결혼까지, 기성체제에 정말 잘 적응하는 완벽한 모범답안이다. 입과 글로는 비판과 비난을 서슴치 않지만 정작 몸뚱이는 그렇지 않아서, 섹슈얼리티 마저도 결혼이라는 시스템으로 자유를 획득했다. 나는 이제 마음껏 Sexy해져도 된다. 

 현대사회의 결혼제도란 한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합법적으로 성관계를 즐기도록 정해 놓은 거라, 나는 이제 눈치 보지 않고 집에서 섹스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신랑도 이제 숙박시설에 돈을 쓰지 않아도 집에서 섹스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결혼을 무슨 고귀하고 신성한 행위로 묘사하는 건 이해할 수 없지만, 성스러운 행위라는 데에는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Sexy하지 않았다면, 나는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근데, 펀쿨섹좌의 말이 맞다. 이걸 설명하는 것 자체가 Sexy하지 않다. 

 결혼생활은 나의 기대보다 매력적이기만 하지 않다. 나는 정말 기대가 컸단 말이다. 그의 리듬과 나의 리듬은 결혼 한 지 몇 년 째인데 아직도 서로 파장이 다르다. 나는 Cool하지 못하게 칭얼대고 짜증내고 그를 다그친다. 그도 Cool하지 못하게스리 칭얼거리며 애교를 부리다가 리트리버 흉내를 내며 몸통박치기를 하고 냄새를 맡는다.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너무 고소하다는 듯이 놀리면서. 어젯밤만 해도 그가 한 시간 가까이 맥주 마시며 이런 저런 일 얘기를 하는데, 너무 Fun하지 않았다. 나는 본래가 Fun하지 않은 사람이라 가망이 없다.

 그래서 다시 시작이다. 나는 그를 꼬시려고 갖은 머리를 쓰고, 그는 나를 꼬시려고 갖은 운동을 한다. 간밤에도 빨리 들어와서 자자는 내 말을 씹고 수리야 나마스카라를 스무 번 도 넘게 하고 잤다. 곁에 온 그에게 인스타그램에서 저장해 둔 웃긴 짤들을 보여주고, 그의 뱃살을 쪼물딱거리며 잠이 들었다. 펀쿨섹 중 Cool이 좀 부족했다. 어쩌면 Cool은 부부사이가 아니라 부부를 둘러싼 가족관계에만 적용되어야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왜냐면 우리의 결혼생활은 이렇게도 다정하니까, 라고 변명해본다.

 개인의 결혼생활도 이러할진대, 환경문제까지 펀쿨섹하게 대응하는 건, 말은 참 이상적이지만 어려운 일일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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