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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제이 Jun 15. 2020

어쩌다 코로나 때 이탈리아를_1

몇 주 차이로 코로나가 덮치기 직전의 이탈리아 여행

 중국에서 사는 동안 코로나가 터졌다.


 아직 국경이 봉쇄되기 전이라, 이미 예정되어있던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다.

 설을 보내고 중국에 돌아오니, 모든게 멈춰 있었다. TV에서는 '힘내라 우한!' 특별편을 시리즈로 방송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텅 빈 공항에서 텅 빈 비행기를 타고 안전한 한국에 돌아왔다. 

 한국에 돌아와 2주간 자가격리를 하려는데, 신천지가 터졌다. 


이건 코로나에 쫒기던 오싹한 체험기다. 




 겨울 베이징 지하철에는 마스크를 안 쓴 사람을 찾기 어렵다. 다른 도시에서는 마스크 쓰고 다니는 사람은 1)외국인이거나, 2)외국에서 온 중국인이거나, 3)예민한 사람인데, 베이징에서는 너나할 것 없이 다 마스크를 쓰고 다닌다. 겨울은 혹독하니까, 미세먼지가.

 2019년 12월 베이징도 그랬다. 다만 지하철에서 수다떠는 사람들 입에서는 이 말이 꼭 나왔다. 

 야, 요즘 같은 때는 재채기도 하면 안 돼~ 큰일난다

 우한에서 유행성 기관지염이 크게 유행 중이라는 소식을, 이미 11월 말 부터 모르는 사람이 없을 때였다. 정말이었다. 대중교통에서 기침 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람들은 흘끗 흘끗 눈치를 봤다. 혹 마스크를 안 쓴 사람이 기침이라도 하면, 분위기가 사-악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성격 좀 부린다는 사람은 나서서 잔소리를 할 판이었다.

 12월이 깊어지자, 베이징은 괜찮냐고 안부를 걱정하는 연락이 많아졌다. 여기는 괜찮다고, 시주석이 묵직하니 자리잡고 있는 베이징은 어디에도 비할 데 없이 안전하다고 소식을 전했다. 시간은 흘러 흘러 2020년, 쥐띠 해가 돌아왔다. 이번 쥐는 상서로운 흰 쥐니 어쩌니 하면서 대대적인 세일이 쏟아졌다. 타오바오와 징동의 매출은 저번 만큼 좋지는 않았다. 미국과의 무역전쟁 때문에 경기가 안 좋아져서라는 의견과, 이제 상술에 속지 않아서라는 의견이 갈렸다. 그만큼 멀쩡했다.

 1월이 되고, 반 년 전 부터 준비해 온 환갑기념여행을 떠날 날이 다가왔다. 이번 여행은 배우자와 함께한 첫 번째 이탈리아여행이자 배우자의 부모님과 함께한 두 번째 해외여행,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절.대.다.시.는. 가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던 이탈리아를 또 가야만 했던 여행이었다.

밀라노에서 먹은 밀라노 전통음식, '리조또 밀라네제'와 오소부코, 그리고 '코톨레또 디 밀라노'

 20대 때, 이탈리아에서 1년간 교환학생 신분으로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 역사학도로써 이탈리아에 대한 환상이 어마어마했던 때라 보통 신난게 아니었다. 1년 중 절반은 토리노, 나머지 절반은 비테르보에서 보냈는데, 잘 놀고 잘 먹고 잘 지내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이탈리아를 꺼리게 되어 버렸다. 

 그 후로 이탈리아 정말 꼴도 보기 싫다고 했는데, 살다보니 참 싫은 것 안 하고 살 수가 없는 게 인이라, 출장으로도 로마를 몇 번인가 가고, 회사를 관두고 나서도 이렇게 어른들 모시고도 이탈리아를 또 가게 되었다. 트레비 분수의 기운은 정말이지 너무 강력하다. 그 때 동전을 던지지 말아야 했는데.

두 번째 도시, 베네치아에서 탄 곤돌라. 베네치아는 세 번 째 간 건데 곤돌라는 처음 타 봤다.

 이번 여행은 설 연휴 황금주기에 떠났다. 코로나, 그러니까 COVID19 사태가 터진 바로 직후라, 이탈리아에서는 아시안에 대한 차별과 경계가 막 시작된 참이었다. 하지만 폭행사건이 뉴스에 나올만큼 심해지기 직전이기도 했다. 팬더믹 선포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때여서 왕래를 막기 전이었는데도, 중국인 여행객은 확실히 적었다. 당시에는 관광객 적다고 행복해하면서 아휴, 그럼 저 명품은 누가 다 팔아주나~ 걱정 같지도 않은 걱정을 농담처럼 흘렸는데, 명품 팔 사람도, 살 사람도 그렇게 많이 죽을 줄은 짐작도 못 했다.

 이탈리아 여행 초반 동안 신랑은 내내 자신이 코로나에 걸린 건 아닌지 걱정했다. 나는 시차 때문이니 걱정하지 말라며 시큰둥하게 소염진통제를 권했다. 그저 코로나라기에는 유럽에 오기 직전까지 쉬지도 못하고 출장에 야근까지 무리한 일정을 강행한 게 문제였다고 생각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두통은 코로나19의 증상으로 고려되지 않았기도 했다.

로마 근교 여행지 빌라데스테에서 내려다 본 이탈리아 전경.

 지금까지 밝혀진 코로나19 증상이 너무 많아서, 정말 우리가 코로나를 앓았던 건지는 모르겠다. 이제 와서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중국에서 이탈리아로 가는 과정 조차 편하지 않았던 터라, 코로나가 아니었더라도 아플 만 했다. 모스크바 국제공항에 폭설이 내렸던 것이다.


 중국에 살던 우리는 베이징에서 출발하고, 나머지 가족들은 모두 인천에서 출발해 베네치아에서 만나는 일정이었다. 그런데 베이징/베네치아 사이에는 직항편이 없어서, 우리 부부는 아에로플로트를 타고 모스크바에서 환승해서 가기로 했다. 트렁크 없이 2주일치 모든 짐을 베낭으로 준비해서 말이다. 예정된 대기시간은 무려 6시간 정도였는데, 폭설로 인한 지연 덕분에(?) 대기시간이 네 시간으로 줄었다. 

flight number ###** to Paris has been delayed 
flight number ***## to Milan has been cancled 
flight number *#*#* to Barcelona has been delayed


 결항으로 갈 수 없는 수많은 도시 이름이 반복적으로 울려 퍼지는 대합실에서, 우리는  활주로 쪽 전망을 따라 넓게 트인 창 앞 벤치에 자리를 잡고 담요를 덮었다. 전면유리 너머로 제설차량이 밤새도록 하염없이 눈을 쓸고 또 쓸었다. 해가 뜰 때 쯤엔 검은 활주로가 모습을 거의 다 드러냈고, 느릿느릿 비행기들이 각자 제 갈길을 찾아 달리기 시작하고 나서도 우리는 두 어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누우라고 만들어 놓은 플라스틱 벤치에 파묻혀 있자니, 아무리 롱패딩에 담요까지 덮어도 냉기가 가시질 않았다. 100%의 컨디션으로 출발했는데, 이탈리아에 도착 하기도 전에 이미 체력이 반토막 난 느낌이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우리 근처에는 아무도 가까지 오지 않았다. 마스크를 쓴 동양인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곁에 빈 의자에 왔다갔다 하는 사람은 같은 동양인 뿐이었다. 

 이렇게 몸도 힘들고 눈치까지 보이는데,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을까 걱정됐다. 동양인이라고 손가락질 당하고 수군대고 차별받으면 어떡하지, 해코지라도 당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근심스런 상상을 펼치다 설핏 꿈도 없는 잠에 들었다.

 10여 년 전, 이탈리아가 이토록 싫어진 이유가 바로 차별 때문이었는데.


(다음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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