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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제이 Jun 22. 2020

티끌모아 제주도

여자 3대가 당근해서 알뜰살뜰 떠날테다

 2020년, 서울에 집을 구해 나와 살기 시작하자 독립생활 선배님들이 [당근마켓]을 소개해줬다. 

 어플계의 절대강자로 등극했다는 바로 그 [당근마켓]에 입성한 지 한 달 반, 나의 프로필은 "재거래희망률 100%"를 자랑하기에 이르렀다. 스타벅스 커피를 준다는 말에 주변에 열심히 영업한 결과, 이제는 동생도 [당근마켓]의 마력에 빠져들어 자매는 결국 함께 집안 살림살이를 거덜내기 시작했다.  


 [당근마켓]은 중고거래 장터 어플이다. 나는 '중고로운 @@나라'를 단 한 번도 이용해 본 적 없다. 중고물품은 버리거나 기부했지, 누구에게 돈 받고 팔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뤄 본 물건이 있다면 중고책 정도? 

 중고거래를 꺼렸던 가장 큰 이유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사기당했다는 얘기, 무서운 사람을 만났다는 얘기, 막상 물건을 받아보니 하자가 많다는 등 사람을 무서워 할 이유는 많고 많았다. 열심히 당근하며 지내는 요즘도 사실 신랑이나 부모님들은 걱정을 숨기지 않으신다. 직거래는 무섭지 않느냐, 나쁜 사람이 나타나면 어떡하냐, 앱에서 바로 범죄 신고를 하면 경찰이 당장 나와 잡아간다는거냐. 

 즐거운 취미생활이 방해받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내가 남자였다면 조금 다른 질문을 받았겠지. 물건이 하자가 많으면 어떡하냐, 환불은 받을 수 있냐, 따위의, 중고거래라는 행위의 본질에 충실한 질문. 대부분의 걱정은 하나의 대답으로 얼추 무마된다. 

거래자가 대부분 여자고, 살림하는 아줌마들이 대부분이에요, 걱정마세요.

 그러면 다음 질문은 거래자가 여자인 건 어떻게 아냐, 프로필을 믿을 수 있냐로 넘어간다. 없다. 익명의 공간에 그런 방법은 사실 없다. 진짜 범죄를 저지를 마음을 단단히 먹은 사람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건 온라인이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길을 물어보는 노인도 의심해야 하고, 도움이 필요하다는 학생도 의심해야 한다. 나는 대답하기 싫어져서 역질문으로 말문을 막아 버렸다. 

"그러고보니 참 믿음이 없는 세상이 되었네요, 그쵸? 알아서 조심하래놓고, 조심하려고 했더니 또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지 말라고 하고, 그쵸? 근데 의심을 해야 맞잖아요, 그쵸? 아휴."

 그리고 중고거래로 번 돈 5천원을 드리는 걸로 쐐기를 박았다. 그러니 나의 '비움'을 막지 마세요. 전 원래 버리는 거 되게 좋아해요.

중국에 갈 때, 돌아올 때 다 버리고 빈 공간에 새로운 걸 채워 올 생각으로 한국에서 절대 안 입는 옷, 버릴 옷들만 싸들고 갔다.

 성인이 되고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떠나면서부터, 나는 잘못 된 습관(?)을 하나 키웠다. 바로 낡은 옷들로만 짐을 싸는 습관이다. 안 입는 옷이지만 아까워서 구석에 쳐박아 두고 있던 것들을, 여행을 핑게로 입고 버리고 오는 것이다. 가진 것 중 제일 예쁜 옷만 챙겨가는 신랑은 '왜 여행지에 쓰레기를 버리고 오냐'며 어이 없다는 눈빛이었다. 그랬던 그도, 베낭여행을 몇 번 시켰더니 이제는 본인이 알아서 제일 얇고 가벼운 옷들을 싼다. 

 그래, 짐이 가벼워야 체력을 아낄 수 있지. 네가 그 동안 부모님 뒤만 따라다니면서 편하게만 다녀봐서 몰랐던거야. 기념품이라도 사봐, 그게 다 무게야. 네가 이고 지고 돌아가려면 그만큼 비우는 수 밖에 없다구. 

 그래, 이 사람, 갖은 예쁨 다 받으며 곱게만 자랐지. 그의 그런 구김없는 모습이 참 부럽고, 사랑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짜증나고 답답하다. 짐 싸는 것 뿐만 아니다. 집을 구할 때도 그랬다. 우리는 둘 뿐이니까 절대 큰 집 필요 없고 작아야 한다고 누차 강조했다. 그이는 내 말 속에 다른 뜻이 있을거라 생각한 건지, 아니면 정말 매물이 없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40평 정도 되는 방 세 개, 화장실 두 개 짜리 분수에 넘치는 집을 구했다. 

 그가 고르고 앞으로 몇 년 간 살아야 할 집에 들어서면서부터 나는 솟아오르는 지적질을 참을 수 없었다. 이 큰 집을 네가 청소할거니, 너 화장실 청소는 할 줄은 아니, 부엌은 또 왜 이렇게 더럽고, 때가 그대로 껴 있는데 대체 뭘 닦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가는데 뭘 믿고 그렇게 당당하게 칭찬을 갈구하는 강아지같은 눈빛으로 잘했지? 잘했지?를 연발하는지. 

 너는 네가 청소기를 돌리겠다고 했다. 너는 네가 매일 아침 토스트에 계란후라이를 해 주겠다고 했다. 너는 화장실 청소를 하겠다고 했다. 너는 설거지를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너는 혼자 살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아니, 부모님과 떨어져서 살아본 적은 군대 밖에 없다. 군대는 네가 결정하고 네가 책임질 게 하나도 없는 집단인데다가, 씻고 닦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 차라리 군대에서처럼 시간을 정해놨어야 하나. 

 너는 회사에 취직해서야 처음으로 연수 받는 몇 개월간 기숙사에서 살면서 '진짜로 나.가.서' 살아 봤다. 관사에서의 너의 삶은 전적으로 너 스스로 결정해서 행동하고 책임지는 삶이었다. 너는 그 삶을 어떻게 보냈더냐. 너는 고작 그 몇 개월 동안 살이 얼마나 찌고 건강은 얼마나 버렸니. 너는 나를 만나 맛있는 것 많이 먹고 다녀서 살이 쪘다고 했지만, 사귀는 동안 우리는 주말에만 만나고 주중 5일은 너만의 생활이었는데 어떻게 너만 살찌고 나는 살이 안 쪘을까. 차라리 결혼해서 같이 살면서라면 몰라도, 그 때의 너의 삶은 전적으로 너만의 책임이었단다. 

 나의 '혼삶'은 너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너랑 나랑 같은 해 태어나서 같은 땅 밟고 같은 공기 마시면서 자랐는데, 너는 왜 내가 아는 걸 모를까. 나도 알고 너희 엄마도 우리 엄마도 아는 걸 너는 왜 모를까. 나의 동생도 아는 걸 너는 왜 모르냐면, 그건 네가 남자로 태어나 아들로 자랐기 때문이겠지. 


 나는 그래서 [당근마켓]에 여자가, 아줌마가 더 많은가보다고 생각한다.


베이징 이화원에서. 버리려고 중국에 가져갔던 니트인데 신랑이 버리지 말라고 챙겨왔다. 챙겨왔으면 네가 좀 정리해놓던가.

 남자들은 버리면서 살지 않아도 된다. 필요없어 진 걸 쌓아놓고 살아도 된다. 아빠의 취미가 그렇고, 아들의 옷가지가 그렇다. 먼지를 털고 빨래를 개켜서 제자리에 넣어 놓는 건 여성의 몫이니까. 우리 부부의 옷장에도 나보다 나의 배우자의 옷이 훨씬 더 많다. 그래서 잡히는 대로 신랑 옷도입는다는 나에게, 한 친구는 왜 그렇게 아줌마처럼 행동하냐고 물었다. 나는 결혼하기 전에도 남자옷 잘 입었는데, 결혼을 하고 나니 남편 옷 뺏어 입는 아줌마가 되었다. 그래도 나는 꿋꿋하게 그의 옷을 집어 입는다. 옷장에는 새 옷이 들어 갈 자리가 없으므로.

 아줌마들은 그래서 자꾸 비운다. 내 공간을 늘릴 틈이 없으니 주어진 공간 내에 새로운 걸 채우려면 비워야 한다. 나한테는 짐이지만, 누가 그걸 돈 받고 가져가 준다면야 아주 땡큐다. 중고물품을 살 때도 똑같다. 누군가는 이왕 사는 거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새 제품으로 사라고 하겠지만,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는 말이다. 2만원짜리 화장품을 8천원에 사고, 3만2천원짜리 후라이팬을 7천원에 사면 남은 돈으로 정형외과에서 물리치료를 더 부담 없이 받을 수 있거든. 살림이란 아주 관절 쑤시는 일이라구.

 혼자 살면, 나를 챙겨주는 사람이 없어지면 [당근마켓]은 더욱 친밀하게 다가온다. 좁은 공간에서 꾸역꾸역 살아내려면, 내 짐을 덜어주고 살림에 필요한 물건이 올라오는 [당근마켓]이 유용하다. 게임, 컴퓨터, 무리 내에서나 통하는 아이템, 해외직구 명품 등등이 거래되는 중고딩나라보다 훨씬. 주말농장에서 기른 야채도 올라오지 않는가. 우리집 신랑놈도 혼자 한 번 살아봐야 나의 당근질에 좀 더 공감할 수 있었을텐데. 이제는 너무 늦었다. 


 요즘은 엄마의 엄마가 엄마랑 함께 살게 되면서, 할머니가 전에 혼자 사시던 집을 정리하는 중이다. 동생은 할머니가 들어오실 방을 정리하느라 당근하고 있고, 나는 이제는 남의 집이 될 일산의 할머니집에서 이러저러한 물건들을 당근하는 중이다. 자매와 엄마, 엄마의 엄마까지, 여자 3대가 당근당근 하면서 바쁘게 지내고 있다. 그 와중에 동생은 할아버지의 카메라도 찾았다. 11월에 할머니 모시고 가족여행으로 제주도에 갈 때 들고 갈 거라고.

 나는 당근에 지역을 두 개 정도 설정해 놓고, 팔릴 것 같은 동네에 글을 올린다. 그래서 채팅을 내가 하고 정작 거래는 동생이 하는 경우가 왕왕 발생하는데, 그러면 당연히 현금은 동생 몫이다. 요즘 날이 더우니까 돌아가는 길에 그 돈으로 아이스크림이라도 사먹으라고 했더니, 이거 한 푼 두 푼 모아서 제주도 여행갈 때 보태겠단다. '당근통장'을 하나 만들어야 하나. 

 제주도 가려고 침대, 옷장, 장식장 다 팔아보겠다는 그대, 나는 네가 정말 사랑스럽다. 그리고 미안하다. 내가 돈이 많았다면 네가 당근에 열을 올릴 필요도 없을텐데. 네가 공간이 많았다면 비우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네가 아들이었다면 이런 소소한 노동과 더불어 매일같이 행해지는 감정노동의 희생양이 되지 않았을 텐데. 내 배 아파 낳은 인연도 아닌데도 나는 네가 아리고 또 아픈 손가락이다.

 그래, 우리, 당근해서 제주도가자. 가서, 바닷가에서 머리 산발하고 바람을 맞자. 태풍이 오면 태풍이 오는 대로 비 속에 갇혀 서울 복귀 못 하고 출근하지 말자. 그러고보니 제주도 조랑말은 당근 좋아 할까.


{재거래의사 100%의 당근팁!}

-사진을 잘 찍자: 배경은 깔끔해야 한다. 필터를 많이 쓰면 의심스럽다. 하자 부분을 여러 각도에서 찍어 올리면 더욱 믿음이 간다.

-아니, 이게 이 가격에?: 싶게 올려야 팔린다. 구매가를 밝혀도 좋지만, 실은 원가에 상관 없이 지갑이 열리는 가격대는 정해져 있다. 당근은 '나눔'과 '비움'이 핵심이라는 것을 잊으면 물건이 안 나간다.

-무료나눔은 비추: 돈이 걸리지 않으면 양심 없는 사람들이 쉽게 거래를 파토낸다. 나중에 얼굴 보고 무료로 줄 때 주더라도 불쾌한 경험을 피하고 싶다면 가격은 꼭 설정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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