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코로나 때 이탈리아를_2

유럽 속 중국이라는 이탈리아, 코로나 직전의 풍경

by 티제이

이탈리아에서 교환학생으로 1년 간 있으면서, 솅겐협정(EU 국가 간 국경 개방 조약. 비자 역시 마찬가지라 연합국 중 한 나라에서만 비자를 받으면 다른 나라 갈 때 비자를 받을 필요가 없음)가 부여하는 자유를 200% 활용하기 위해 부지런히도 유럽을 쏘다녔다. 기차도 타고 저가항공도 타고, 돈 아껴서 다른 데 더 보겠다고 5시간, 6시간 넘게 기차타고 이동하기도 하면서 젊음을 만끽했더랬다.

10년 뒤 나는 중국에서 살게 되었다. 중국에서의 여행은 유럽여행과 닮은 점이 많았다. 어디를 가도 비자가 추가로 필요하지 않다는 점이 그랬고, 매 여행마다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점도 비슷했다. 중국이라는 하나의 국경으로 묶여 있기는 하지만, 다른 나라라고 해도 믿을 만큼 달랐고, 서유럽 국가들이 그러하듯 얼핏 유사하기도 했다. 10년 전 체력과 마음가짐은 잃은지 오래지만, 여행을 떠나지 않을 이유가 없기에 조금은 다른 속도와 다른 질감으로 꾸준히 쏘다니기를 계속했더랬다.

그럼에도 이탈리아는 내키지 않았다. 중국에 있으면서 굳이 또 '중국스러운' 곳을 가야 하는구나.


이탈리아는, 프랑스와 더불어 '중국같다'는 '욕'을 먹는 유럽국 중 하나다. '중국같다'는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잠자는 거인, 가능성의 땅, 유구한 역사 등등의 의미로 쓰일 때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부정적인 의미가 더 친숙하다. 더럽다, 시끄럽다, 무례하다, 혹은 이를 싸잡아 무식하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래서 프랑스의 더러운 지하철과 도로, 냄새를 두고 중국같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쉽게 흥분하는 듯한 말투의 이탈리아 사람들을 중국사람같다고도 한다.

솔직히 중국의 지하철은 새로 지어서 깨끗하다. 베이징의 지하철은 좀 오래되어서 냄새가 나기는 하지만, 프랑스 대중교통의 냄새가 더 심하다. 유럽여행이 처음인 사람들은 종종 어디에서나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홈리스에 당황해서는 중국이냐고 불평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히려 중국에는 정말 거지가 드물다. 매너 없는 사람들은 국경 가릴 것 없이 어디나 있어서, 한국 사람들도 예전엔 유럽에서 피해다녀야 할 존재로 여겨졌다. 시끄럽고 거칠 것 없이 무례하다는 이유에서다.

다만 자문화중심주의는 아무래도 부정할 수가 없다. 제국주의의 영화를 잔뜩 누렸던 프랑스, 로마가 유럽문명의 중심이라는 이탈리아와 중화사상으로 똘똘 뭉친 세 국가의 자문화중심주의는 본인들은 뭐라 하던 붕어빵마냥 닮았다. 자문화중심주의의 핵심은 '나 잘났다'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에 해당하지 않는 존재를 열등하게 보는 데 있다. 한글이 한자를 보고 만든거라 생각하는 당당한 중국인들 틈에서 적당적당히 살아가는 것도 때때로 심기가 불편해지는데, 겉으로는 아닌 척, 속으로는 동양인을 한 수 아래로 보는 분위기는 더더욱 껄끄러웠다.

게다가 명분이 절로 주어지는 시기였다. 중국에서 정체불명의 전염병으로 도시가 봉쇄되었다는 소식에, 역시 중국인은 더럽다, 야생동물을 마구잡이로 잡아먹는 것이 야만적이다, 멸종위기종도 가리지 않는 게 이기적이다 등 한국에서도 도는 세계 어디서든 돌았다. 평소에는 핑계가 없어 담아만 뒀던 차별이 슬슬 고개를 들고 있었다.

나는 중국인이 아니고 한국인이라고 해 봤자 소용없다. 정말로 바이러스가 문제였다면, 중국발 비행기에서 내리는 자국민도 경계 대상이 되어야 맞고, 그 말은 곧 누가 신생 바이러스의 숙주인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흐린 날 햇살처럼 은근히 쏟아지는 차가운 눈빛은, 실은 아시아인을 향한 혐오를 바이러스라는 핑계로 노출된 결과에 다름아니다.

IMG_8016.JPG 운 좋게도 겨울 로마 치고 비가 많이 안 와서 여행하기 좋았다. 중국인 단체관광객도 없어서 온 관광지가 다 여유있었다.

불평 불만 많은 것 치고 여행 자체는 나름 성공적이었다. '신종 폐렴'으로 우한이, 허난성이, 그리고 중국 자체 내에서의 이동이 통제되면서, 국경을 봉쇄한 것도 아닌데 벌써 중국인 여행객이 많이 없었다. 설날, 그러니까 lunar new year 혹은 Chinese new year이면 밀려드는 중국인 관광객으로 북적여야 할 쇼핑거리도, 인기명소도 이정도면 한산한 편이었다. 한국의 신천지, 일본의 '아베노마스크' 밈이 일어나기 전, 우한봉쇄가 시작 된 후, 두 분기점 사이의 짧은 기간 동안, 유럽에는 알싸하고도 안일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질병은 무지의 산물이며 유럽은 문명의 본산이라는 확신은, 늦었지만 이제와서 보면 정말이지 안일하다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는 것 같다. 밀라노에서 숨만 돌리고 가족들을 만나러 베네치아로 넘어가기 전 날, 수학여행 중인 듯한 무리의 중고등학생을 지나쳤다. 깐족거리던 남자애들 둘이 우리를 보더니

오오오 치네제(Chinese)!!!

하고 지들끼리 서로를 우리 쪽으로 밀치는 장난을 치며 도망갔다. 낄낄거리며 장난치는 모습이 어디에나 있는 애들 모습이었다. 이탈리아 뉴스에서 중국 우한의 폐렴바이러스를 어떻게 보도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짱깨들 꺼져라’로 도배 된 네이버 댓글창과 상황이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다음 날 부터 나는 어디 좋은 데 갈 때나 쓰려고 조금 덜어 온 화장품을 주섬주섬 꺼냈다. ‘중국사람’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말이다. 촌스럽고, 빈 티나는, 동양인이 아니라면 좀 다를까 싶어서. 여행 다닐 땐 귀찮아서 화장 잘 안 하는 편인데, 잊었던 10년 전 기억이 다시금 스멀스멀 피부를 타고 올라오는 느낌에 아이섀도우를 바르고 립스틱을 꺼냈다. 옛 기억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마음이 점점 더 차분해졌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착각이, 이탈리아 남자들이 동양 여자를 좋아한다는 속설이다. 아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냥 ‘예쁜’ 여자가 좋은 거다. 미국인 친구들과 같이 다닐 때, 유일한 동양인 여자인 나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청바지에 후드티만 입고 다닐 땐 무관심하던 사람들이, 긴 생머리에 구두 신고 쫙 붙는 옷을 빼 입은 날엔 너나할 것 없이 먼저 나서서 도와주기 바빴다. 짐을 들어 주거나, 길을 알려줄까, 먼저 물어보거나. 그들의 ‘예쁘다’는 기준은, 얼마나 잘 가꾸고 꾸몄느냐에 달려 있다.

한국도 외모지상주의가 심하지만, 스무살의 나는 똘레랑스라는 말에 속아 유럽은 다른 줄 알았다. 여기서도 뚱뚱하면 게으른 사람 취급받고, 옷은 깔끔하게 입어야만 하며, 적당한 브랜드를 시의적절하게 걸쳐 줘야 무시당하지 않았다. 어쩐지, 성형 광고가 많이 보이더라. 결국 나는 이탈리아 친구를 한 명도 사귀지 못했다. 대신 미국인 친구들만 왕창 생겼다. 미국도 인종차별이 심하다고는 하지만, 그 속에서도 편안함을 느낄 정도로 나는 이탈리아가 불편했다. 어차피 여기서는 그들도 ‘덜떨어진 아메리카니(Americani 이탈리아어로 '미국인'의 복수형)’ 취급이었기에, 우리는 모두 ‘이방인’ 타이틀 아래 서로 부둥부둥하며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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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이탈리안 퀴진을 많이 먹은 건 참 좋았는데, 매 번 스스로의 외모를 검열해야 해서 너무 귀찮았다. 하지만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지기 때문에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어쩔수 없었다

패션의 도시 밀라노의 중심을 가로지르며 남편에게 이탈리아의 못남을 강력하게 설파했다. 이탈리아 사람이 패셔너블하다는 건, 그만큼 외양을 많이 본다는 뜻이라고, 주절주절 한참을 얘기했다. 실은 불쌀하게도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신랑은 이미 주변의 시선에 신경 많이 쓰는 눈치였다. 옷 입는 것도, 머리 모양도, 심지어 식당에서 밥 먹는 매너도, 다른 사람 눈에 어떻게 보이려나 조심스러운 듯, 이렇게 먹는 것 맞냐고, 오늘 입은 옷 어떠냐고, 통통해 보이지는 않냐고 시간 날 때 마다 물어봤다.

애인의 그런 모습은 아무래도 귀엽기만 하지만, 감히 내 신랑을 주눅들게 한 이탈리아에 이번에는 짜증과 불편함에 이어 화가 났다. 낯선 공간이라 불안하다고 우물쭈물 하면서도 크게 짜증은 안 내는 그가 내 눈에는 소풍가는 아이처럼 사랑스럽다. 사랑스러운 그가 통통한 편에 속하는 건 사실이다. 2018년 조사에 따르면 한국 남성은 셋 중 한 명이 비만이고, 그 중 30대는 둘 중 한 명이 비만이라니까, 30대 한국남자인 우리 신랑의 통통함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중국에서는 그의 통통함이 하나도 문제 되지 않았다. 특히 중국에서도 북부인 베이징 같은 경우 여름에 동그란 배를 내놓고 다니는 남자들이 흔했다. 남자는 자고로 듬직해야 인격도 되었다고 생각해서, 사회생활에도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대신 명품이 중요했다. 가방, 옷, 신발은 물론 캡모자나 심지어 양말도 무슨 브랜드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홀리스터나 자라 같은 외국 브랜드기만 하면 일단 통과여서 그다지 큰 부담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어떻게 하고 다니느냐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는 건 살기 참 빡빡한 일이다.


살기는 빡빡하지만 잠깐 스쳐 지나가는 여행이야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듣고 다닐 수 있다. 게다가 이탈리아가 코로나에 크게 얻어 맞기 직전은 예상치 못한 여유를 선사해주었다. 좋던 싫던 한 철 장사를 노리는 관광지 입장에서 중국인 요우커의 발길이 끊긴다는 건 너무나도 치명적인지라, 아무리 아시안이 띠껍다(?) 할지라도 손님 하나 하나가 아쉬운 가게 특유의 좀 부담스러운 친절을 잔뜩 받았다.


자본주의 미소를 뿅뿅 날리던 그 사람들은 지금 건강할까. 식당은 다시 열었을까.


혹 아팠다면, 우리를 의심하고 있지는 않을까.

한국에 돌아와서도, 이탈리아 봉쇄가 풀린 지금에서도 이탈리아는 여전히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언젠가 큰 코 다치기를 바랐는데, 이렇게 초대형 재난이 터지고 나니 괜한 저주를 했나 양심이 찔린다. 동시에, 닥칠 만한 일이 닥쳤다는 생각에 죄책감까지 들어서 아주 불편하기 그지없는 요즘이다.

IMG_8071.JPG 신랑이 꼭 가보고 싶어했던 포로로마노에서. 가족들에게 다시 없을 여행을 선사했다는 보람도 느낀다. 향후 몇 년 간은 이탈리아는 물론 어느 세계여행도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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