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이었다. 그 문자를 받은 것은.
고등학교 3년 내내 같은 반이었던 , 같이 술을 먹고 힘든 시절을 공유했던 친구에게서 너무 오랜만에 문자가 왔다. 아마도 내가 결혼한 뒤 아이를 셋 낳고 정신없는 삶을 사느라 바쁘게 된 후로부터였을까. 아니면 그 친구가 정상적인 회사 생활을 접고 수학 학원을 차려 원장이라는 삶을 산 뒤부터였을까.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내게 그 친구는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조금 '시니컬하고 무관심한 태도로', 그리고 역설적으로 '가장 나 다운 모습으로 있게 지켜봐 주는 태도로' 나를 자유롭게 하는 유일한 친구였다. 그리고 오랜만에 전화해도 그다지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그냥 그 정도의 거리에 있지만, 또 제일 가까운 느낌의, 내 고등학교 시절 3년 동안을 함께 한 유일한 친구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던 그였다.
그런 그로부터 근 6-7년 만인가에 문자가 왔다. 그것도 저녁 10시에.
난 웬일이지? 결혼한다는 건가? 라며 반갑게 문자 내용을 열어서 봤다.
"XXX군이 영면에 들어 내일 발인합니다. oo 병원 xx 호실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시길 바랍니다."
난 얼어붙어서 잠시 가만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많은 생각을 했다.
오늘 아침, 너무 오랜만에 주변 이웃들에게 그 친구 이야기를 꺼냈다. 같이 수학 과외 전단지 붙이러 다니던 대학시절 이야기를 꺼냈고, 수학 과외가 필요하면 내 친구가 있노라 이야기를 했다.
나는 요즘 힘이 들어 오랜만에 머리를 커트를 쳤고, 내 삶을 어디서부터 정리해야 할지 몰라, 그 친구에게 다시 전화를 해봐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언제나 시니컬하지만 내게 필요한 이야기를 해주는 친구였기에. 내 인생 또한 다니던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한 상태로 그래도 국내에서 잘 나가던 대기업 파트장에서 '전업주부'로 내 인생을 재설정해서 내 인생조차 정신없고 힘들던 시기, 딱 그때에 그 문자를 받은 것이었다.
내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접하는 일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더 가까운 사람으로 치자면 나의 친오빠가 오래전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그런데, 이번엔 또 느낌이 색달랐다. 굳이 말하자면 색다른 느낌의 슬픔이랄까.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는 빛깔의 감정들이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 가장 편하게 느꼈던 친구가 갑자기 또 떠나버린 것이었다. 그냥 정신없이 무조건 내일이 발인이라니 그전에는 가봐야지 라는 생각으로 아이들을 맡기고 그 장례식장으로 친구들과 함께 향했다.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그 어머니가 작은 쪽방에 갇혀 울다 잠들었다 하셨다. 나는 감히 그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다. 근 20여 년 전 다 큰 아들을 잃고 정신을 반쯤 놓았던 우리 어머니가 생각나기도 했고, 내 친구가 그의 어머니에게 어떤 아들이었는지 모르는 바 아니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난, 두려웠다. 그 슬픔의 크기가. 그리고 그 절망감의 깊이가. 물론 내가 들어가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면 그 어머니는 더 크게 울부짖었을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고.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기느냐고.
비겁하지만, 난 그 슬픔과 절망을 감당해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미 한 번 겪어 보았고, 그 시절 나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강하다고 느끼지 못할 만큼 약해져 있었다.
나는 그렇게, 내 고등학교 시절 절친의 어머니를 만나 뵙지 못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 동창들과 내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며 장례식장에서 만나 앉아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서로 사는 근황들을 물으면서, 서로 하나도 안 변했다 , 아니 변했다, 안부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이상하게 허리가 뻐근해져 왔다. 목 뒤까지 뻗뻗해지는 것이 심상치가 않았다.
이제 가봐야겠다. 나 허리가 너무 아파..
그렇게 친구들과 인사를 하고 돌아 나오는 길에 다른 테이블에 앉아있던 다른 남자 동기가 외쳤다.
너 우리 회사 다니지?
아. 아니, 나 오늘 퇴사했어. 몰랐구나? 나 이제 그냥 직업 없는 주부야.
씁쓸한 웃음을 뒤로한 채 돌아 나오면서 생각해 보니 그랬다. 시험 봐서 들어갔던 특수 고등학교. 그 1학년 학생들이 모인 자리, 다들 대기업, 공사, 공무원, 한의사, 사업가, 건축가 등 직업이 번드르르했다. 다들 사회적으로 한 자리씩 꿰차고 있었다. 그런데.. 아.. 난 직업이 이제 없구나. 그냥 나는 이제 아이 셋 엄마에 누군가의 아내이자 아줌마로 남겠구나. 이제 사회적 역할은 이곳에서는.. 나만,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기분이 더 이상해졌던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 가장 친근하게 느꼈던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리고 그 장례식장에서 하게 된 이상한 동창회(?), 그리고 거기에서의 나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자각. 그 셋의 콤비네이션의 시너지 효과는 상당했다. 집에 돌아온 그날 밤, 일이 터졌다.
난 그날 밤 급성 허리 통증으로 일어나지 못했다.
아니, 내 몸을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어서 비명을 질러댔다.
조금도 움직일 수도, 뒤집을 수 조차 없었다.
허리를 쓰지 못한 채, 응급 상황으로 동네 병원에 실려갔다.
나만 바라보고 있는 어린아이들 셋과 함께.
그 날, 나는 무척 두려웠다. 내 몸을 영영 쓰지 못하고 그대로 장애인이 되는 구나 느꼈다.
나는 남은 평생을 이렇게 식물인간처럼 온 몸의 근육을 쓰지 못하고 그대로 하반신 마비가 되는구나.. 라는 엄청난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것이 시작이었다.